Scratched and Layered

김유진展 / KIMEUGENE / 金宥辰 / painting   2021_0925 ▶ 2021_1003 / 월요일 휴관

김유진_Rainforest_캔버스에 유채_130×100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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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RASA 서울 관악구 관악로29길 2 3층 www.instagram.com/___rasa___

몸이 담지된 캔버스를 체화하기 ● 토드 크로넌(Todd Cronan)은 모더니즘 회화, 특히 앙리 마티스의 회화를 다시 분석하며 글을 썼다. 그는 역사적으로 재현적 회화에서 회화적 물성에 관심을 가지는 모더니즘 회화로의 이행을, 보다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몸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자 한 작가들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라 보았다. 즉, 재현에서 벗어나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가들은 형상보다는 물성에, 대상의 몸 보다는 자신의 몸에, 경험에, 그리고 감각에 집중하면서 캔버스에 현실을 채워나가길 바랐던 것이다. 오늘날 무엇이든 재현 가능한 스크린이나 디지털 이미지들이 너무나도 현실을 빼닮은 상황에서, 아직도 회화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모더니즘의 화가들이 바란 바로 그 능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일까? ● 나는 수많은 회화 캔버스들이 말하고자 했던 이 능력, '경험' 혹은 '감각'을 그림이 가지는 '묘한 힘'으로 이해한다. 신문지에 프린트된 인물들의 눈을 파내는 일이나, 얼굴표면 위를 긁는 것은 묘한 금기로 자리 잡는다. 왜냐하면 인물들 위 긁힌 작은 신문지의 궤적에 가슴이 긁히고, 팔에 소름이 돋아 몸이 내게 그만하라 명령하기 때문이다. 회화의 물성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들은 위와 같은 '묘한 힘'을 조절해 어떻게 하면 관객의 반응과 내가 현실을 경험하는 바를 일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 나갔다. 예를 들어, 중력을 따라 흐른 물감자국이 눈물자국과 유사하도록, 눈물과 유사한 물감이 떨어지는 간격을 조절하는 것이다. 나의 글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온 김유진 작가의 흔적을 한 관객의 입장에서 읽어 내려가는데, 이를 통해 김유진의 화면이 야기하는 특정한 물성들이 어떻게 관객의 경험에 복구되는지 추적하고 살피고자 한다.

1. 살결의 빛깔 ● 화면을 채우는 오페라, 샙그린과 같은 꽤 따뜻한 초록색, 무채색, 형광끼가 도는 퍼머넌트 오렌지 주황색, 다양한 색감들은 보이지 않는 순환을 그려내는 살결을 떠올리게 한다. 무수히 많은 과정과 요소를 담은 살결은 다양한 색감들을 가진다. 그 아래에 파랗고 보라빛의 정맥이 흐르는 살결은 결국 차가운 회색빛을 띈다.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이것을 그릴 때 주술처럼 분홍색 표면 위에 파란색과 보라색 물감을 올린다. 수분이 가득 찬 살아있는 피부를 위해서는 투명한 레이어를 한 겹 올려 생생한 반짝임을 올려줘야 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여러 과정을 거친 물건들이 집 안에 밀려드는 상황에서, 물건 자신을 이입하는 주술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 같다.

김유진_Flowers_캔버스에 유채_130×100cm_2021

2. 생채기 ● 작가는 도시의 빠른 속도가 버겁게 느껴질 때 자신에게 생채기가 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분류되어 먼 거리를 단숨에 오가는 택배박스의 생채기들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생긴 생채기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반복되는 트라우마의 깊은 상처와 달리 어떤 정도의 아픔을 지닌 것인지 궁금했다. ● 「Scratching (Tear Drops)」에서는 자신을 닮은 살결 덩이를 파란색 물감이 가볍게 긁어낸다. 파란색 물감은 주륵 흘러내리기 보다는 표면 위를 그저 날카로운 것으로 건드리듯이 표면 위에 가볍게 자리한다.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할퀴어진 이 생채기들은 깊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반복되면 계속해서 깊게 파고드는 상처들과 달리, 파란빛의 생채기는 살결 위에 또 다른 색으로 겹쳐져버린다. 이에 반해 회화보다 더 이전에 빠르게 그린 드로잉의 잉크자국들은 종이 안에 스며들면서, 우연히 그들이 겹쳐질수록 상처가 되어 깊이 파고들게 된다. ● 초기에 물건들에 살빛을 더해 몸을 은유하고, 생채기를 내며 자신의 정서를 드러냈던 작가는 「Scratching (Window Pane)」를 그려내던 무렵부터 도시의 풍경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시의 물체와 풍경을 찾고, 찍고, 색감을 변형시켜 정서를 담는 보다 구조화된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냈다. 그 첫 시작이었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얇은 피부와 같은 비닐 위를 긁어내는 풍경을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도 생채기와 같이 긁힘이 묘사되었다. 왼쪽에 자리한 내부를 드러내는 구멍과 달리 흰색 빛의 흔적들은 표면을 유지할 정도의 앝은 긁힘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 생채기가 야기하는 아픔의 감각은 계속해서 겹쳐진 붓질을 통한 화면의 환영적인 깊이감을 통해 기묘한 부위에 다른 아픔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김유진_Garments_캔버스에 유채_116.8×80.3cm_2021

3. 빛과 어둠으로 전복된 피부 ● 원본 사진 속 반투명한 비닐은 마치 쭉 하고 짜면 흘러나올 듯이 촉촉하게 뒤의 풍경을 담아낸다. 본래의 디지털 이미지는 기묘하게 '비춰냄'과 '배어냄' 사이의 위계를 투명하게 모두 담아낸다. 대상의 명도 대비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풍경의 채도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블러(blur)된 값에 따라 나는 꽤 정확하게 물체들의 층위를 가려낼 수 있다. ● 「김유진, Scratching (Window Pane)」은 위의 층위를 회화로 옮겨내는 과정에서, 서로를 구분 짓는 면들에 따라 상대적인 어둠들을 배열하였다. 공간이 압축된 두 면 중 솟아오른 공간은 밝고 명랑한 색조로 덧칠하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 공간은 어둡게 칠해주는 과정에서 각각의 물체들은 튀어나오고 또 뒤로 물러선다. 질서에 따라 차례로 조정된 것이 아니라 반복된 대비와 붓질의 겹침을 통해 조정된 화면은 깊은 곳이 압축되고, 얕은 곳이 다시 깊어진다. 따라서 생채기는 깊어지다 다시 얕아지고, 뒤에 놓인 공간에 따라 밀착하여 구부러지게 된다. ● 이러한 화면 구조와 유사하게도 「Garments」에서 대개 우리의 살결 위에 얇게 몸을 보호했던 옷은 오히려 배경의 살색 빛에 파묻힌 듯 보인다. 살결의 수분에서 등장한 흰 빛의 반짝임은 흐트러진 옷의 형태를 따라 사라지기에 오히려 옷 위로 튀어 오른다. 어두움도 이와 유사하다. 특히 화면의 오른쪽에서 김유진의 화면은 오히려 어둠이 빛 위로 튀어오르며 물체들의 구조를 어지른다. 두 회화의 투명한 붓질은 전복된 구조를 더더욱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김유진_Scratching (Tear Drop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21

4. 껍데기의 두께와 층 ● 「Garments」 에서, 전복된 구조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결국, 본래 몸이 있었던 껍데기의 역전된 부피감이다. 본래 가장 튀어나와 밝아야 할 것은 어두워지고, 어두운 것은 드러난다. 「Flowers」는 애초에 여러 곳에서 빛을 받은 대상을 소재로 했다. 집요한 사진기기는 단한번의 클릭으로 많은 경우의 수들을 단번에 포착해낸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이로서 이러한 이미지를 미묘한 깊이를 그려내며 차이를 벌리는 일은 집요한 멀티태스킹을 요하는 일이다. 작가는 매 순간 '이 부분에서는 이곳에서 빛이 오는 것 일 테고, 여기에서는 저 쪽에서 빛이 엷게 비치는 것 일 테다'하고 분석해야한다. 빛이 더 다양한 곳에서 올수록 점차 작가가 관리해야하는 경우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결국 너무나도 빠른 사진기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대상을 납작하게 만들어 관리한다. 작가는 납작해진 대상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흔들어 납작하고 가벼운 껍데기의 두께를 보란 듯이 보여준다. 이는 해당 화면의 왼쪽 배경을 보면 극명히 대조된다. 엷은 붓질로 이뤄져 흔적이 투명하게 보이는 물감이 흘러내린 궤적 따라 물감이 지워진 자국들은, 모션블러된 소프트웨어의 논리를 따른 꽃들과 달리, 아래로 갈수록 두꺼운 물방울의 형태를 띤다.

김유진_Scratching (Window Pane)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21

5. 덮쳐오는 생채기들 ● 꽃의 껍데기들은 남아 바로 아래로 복사되어 이동한다. 같은 이미지는 동시에 그려진 다른 화면인 「Rainforest」로 유사하게 옮겨간다. 이러한 논리들을 나는 '덮쳐오는 생채기'라고 부르고 싶었다. 덮쳐오는 생채기와 대조적으로 어떤 화면 위에 올라온 잔상들은 그저 겹쳐지는 것을 넘어서 화면의 표면 위에 진득하게 늘러 붙는다. 진득하게 눌러 붙은 감각은 「Scratching (Window Pane)」에서 두드러진다. 노란빛의 테이프는 비닐 위 가느다란 흔적을 남겨서 계속 내부로 파고드는 듯 했다. 이에 반해 덮쳐오는 생채기처럼 느껴진 「Garments」나 「Flowers」에서는 앞서 말한 「Scratching (Tear Drops)의 파란빛과 같은 아픔과 깊이로 가볍게 화면 위를 장악한다. ● 마지막에 그려진 「Rainforest」에서는 화면 위에 가볍게 자리한 생채기가 어지럽게 겹쳐져 있다. 이전이 보았던 모든 화면들의 특징들이 공생하는 장에서, 생채기들은 파고들기보다 가볍게 서로 얽히고 겹친 모양인데,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가 어떻게 겹쳐진 것인지 그 과정을 추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얇은 층층으로 겹쳐진 생채기는 작가의 화면 위를 넓게 차지하고 덮치며 위압감을 과시한다. 생채기들이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심리적 잔상이 차지하는 공간은 해당 작품에서 덮쳐오는 얇은 대기층에 의해서 더욱 더 작가의 심리를 압박하는 듯 했다. ● 여러 생채기들을 위해 작가는 상호간에 맞춰 전복된 공간, 껍데기의 두께, 여러 요소들을 함께 관리하고 처리한다. 적절한 공간에서 예민한 상식의 눈으로 대상들을 바라보았을 때 느껴지는 내 몸을 움직이는 그림의 '묘한 힘'은 때때로 작가의 몸과 정서를 비추면서 내 몸과 공명할 수 있는 적절한 시차를 두는 듯하다. 나는 결국 무엇 때문에 작가가 그렇게 생채기의 모양과 아픔의 두께를 알 수 없지만, 도시 속에 사는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치밀한 생채기들의 형태에 따라 적절한 경험을 선별해어 작가의 경험에 그나마 가까워지는 일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한슬기

Vol.20210925e | 김유진展 / KIMEUGENE / 金宥辰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