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다

임성희_홍빛나 2인展   2021_0917 ▶ 2021_1030 / 일,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갤러리 숨 Gallery SUM 대전시 유성구 테크노중앙로 50 (관평동 940번지) 디티비안 C동 201호

임성희는 그동안 돼지를 주요 소재로 삼아왔다. 그에게 있어 돼지는 우연히 마주친 소재였고 처음에는 일반적인 편견과 같이 심술궂기도 하고 욕심 많은 존재였다. 임성희의 돼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고, 인간의 욕망과 유한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돼지의 모습을 관찰하고 실제 돼지가 하지 못할 법한 자세나 표정을 부여해주다보니, 그림 속 돼지는 작가를 닮아갔다. 그만큼 돼지들은 그림 속에서 인간적인 표정과 행위를 한다.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듯 해맑게 웃고, 가족들끼리 서로를 껴안으며 체온을 나눈다. 실제 돼지와 달리 목을 위로 들고 달을 바라보고, 슈퍼히어로와 같은 복장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돼지 특유의 사랑스럽고 통통한 모습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충분히 교감할 수 있는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다.

임성희_Happ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45.5cm_2021
임성희_Luck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45.5cm_2021
임성희_In the se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21
임성희_치유의 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7cm_2021

그리고 그 돼지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최근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눈에 띠게 웃고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의 웨민쥔(岳敏君), 혹은 일본의 나라 요시토모(ならよしとも) 때문일까. 실상 중심을 이루는 소재의 행복한 모습은 멀리 풍속화나 장르화에 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그다지 현대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단지 이 시대에 있어서, 행복한 돼지와 같이 즐거워하는 인물 혹은 동물의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우울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감성 때문일 것이다.현실에서 우리가 작품 속 돼지들처럼 이렇게 활짝 웃는 것이 하루에 몇 번이나 될까. 누군가와 살을 부비고 온전히 서로만의 체온을 나누었던 경험이 있긴 할까. 그리고 내 꿈은 사실 슈퍼히어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있을까.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빠른 변화들 속에서 매순간 수많은 선택을 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무게로 인하여 행복이라는 것을 미뤄만 두었을 런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임성희의 작품 속 돼지를 보고 잠깐이나마 행복이란 것을 '지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찾고자 하는 행복을 미루지 않고 지금, 돼지들을 통하여 갖게 된다. 허나영

홍빛나_buddybird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1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과 동심의 세계 ● 다양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바다 위 종이배를 탄 가족이 뜰채로 달(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달을 포함한 원형은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위치한다.) 을 낚는 그림이 그렇고, 아이들이 거대한 꽃송이 속 피어나듯 들어선 그림이 그렇다. 곰으로 분한 아이와 고양이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이나, 거대한 물고기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작품 등도 과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 작가 홍빛나의 작품들은 일상의 삶을 비밀스러운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흡사 동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 장면 하나, 사물 하나마다 특유의 정겨움과 친근함이 녹아 있다. 하나같이 친숙하고 낯설지 않기에 되레 새롭다.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기에 접근성 역시 용이하다. ● 이들 작업에는 슬픔과 아픔이 배어있지 않다.(어느 경우 하나씩은 등장하는 초라한 존재의 불안감조차 들어있지 않다.) 온화한 표정의 인물들, 따뜻한 감성 물씬한 그림에선 뾰족함 없는 넉넉함, 풍요로움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도 가족과 음식을 함께 만들거나 휴식을 취하고, 산책을 하거나 바다 속을 헤엄치는 모습은 고귀하고 어여쁘다. 동그란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표정의 인물들은 마찬가지이다. 보드라우며 따뜻하다.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다.(그의 그림에는 특유의 따뜻함과 편안한 미감이 있다. 이는 작가의 조형적 탐구가 적용되고 있음을 읽게 하며, 삶에 있어 고운 결을 갖고 싶다는 작가의 작화적 의도를 발견하게 한다.)

홍빛나_love moon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1

그에게 색은 일종의 수레이다. 초록, 파랑, 분홍 등의 색들은 온기로 채워진 감정을 타자에게 옮긴다. 화사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튀는 난삽함이 없는 이 색들은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정겨움으로 물들이는 매개이면서 인물과 사물에 담긴 저마다의 스토리와 정서를 실어 나르는 메신저이다.(그 수레 안에는 삶이란 행복한 목적임을 일러주는 조형이 들어 있다.) ● 앞선 기술(記述)에서 유추 가능하듯, 홍빛나는 삶을 다룬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고지하지는 않는다. 알 듯 모를 듯한 기호와 상징으로 버무려져 있어 에두른 감은 있어도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도 있다. ● 예를 들어 그에게 달은 미지의 영역이면서 함께 그려갈 이상향이자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 바다와 새, 고양이 등은 극복해야할 두려움의 기호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승선한 종이배는 과거라는 노를 저어 나아갈 이상과 희망으로 향하는 수단이요, 집이나 자연 어딘가에서 행해지는 일상의 장면은 특별할 것 없는 삶의 형태이면서도 이어가고픈 아름다운 현재이다. ● 이밖에도 홍빛나 그림 곳곳엔 삶의 채록들이 곳곳에 심겨져 있다. 그의 그림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꽃과 나무, 다육이들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비롯한 소소한 행복의 표제이며, 그 자체로 긍정의 산물이다. 여타 사물과 행위 역시 희망에 초점을 맞춰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즐거운지를 이야기하는 장치들이다. ● 그렇다고 홍빛나의 작품들이 일기(日記)는 아니다. 자신의 일상을 다루지만 보편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창(窓)에 가깝다. 작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실마리라는 점에선 개인의 기록을 뛰어넘는다.

홍빛나_동그랗게 걸어요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1

물론 그의 작품들이 판타지도 아니다. 내용을 구성함에 있어 비유나 상징, 우회적이거나 동화적인 요소를 빌려 현실세계에서의 삶의 의미와 연관시키려는 방법으로서의 판타지는 그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단순히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써의 판타지, 보편성을 띠지 않는 추상성과는 거리가 있다. ● 그의 작품들은 기쁨을 고양하고 공유하는 일상과 가정생활에서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오늘로 소환하는 측면이 강하다. 한편으론 주제의식과 형상의 명료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으며 방법적 모더니즘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선 신선함을 말 할 수 있다. 대상의 시각적 변형을 통해 플롯의 낯섦을 유도한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 실제로 고양이와 물, 새 등을 무서워하는 작가는 상투성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소통으로 전환시킨다. 작가와는 달리 여러 생명에 두려움 없는 아이들을 통한 삶의 변화는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그 삶의 변화가 미적 동기 및 작업의 연속성을 부여한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고백이자 독백인 그의 작업은 이리저리 섞인 갖가지 대화보다 훨씬 명료하게 다가온다. ●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 찾아보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논리에 앞선 '동화적 상상력'으로 한층 짙어진 호소력을 갖는다. 삶에 관한 애정과 인생의 다양한 굴곡, 평범함의 소중함 등을 화면 곳곳에 앉혀놓음으로써 공감과 공유, 공명의 확장이라는 특별한 식단을 내놓는다. ● 이는 보편적 삶을 다루기에 되레 현실을 저버리지 않는 꿈과 환상이 생성될 수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거점으로 외부세계로의 시선을 담고 있기에 거부감이 없는 조형이라 해도 무방하다. ● 나를 둘러싼 우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특별함을 갖게 되는 삶을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시공 초월한 조형으로 다루며 '소소한 일상의 특별함'을 전달하는 홍빛나의 그림들은 상처와 아픔, 고통 없는 순수한 삶과 무관하지 않은 채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됨으로써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 부족하더라도 주어진 오늘에 대한 감사함,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두려움의 영역으로까지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보여주는 그의 작업엔 일상의 특별함이 새겨져 있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네 삶이 보다 완전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작품 전체를 감싸는 시적 연상의 자유로움이 덧대지며 홍빛나 작품에 탄력성을 생성한다. ● 한데 여기엔 빠질 수 없는 근본적인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과정이요, 존재자란 무엇이고 존재자를 그 존재에서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문이다. 홍빛나는 그 자문을 예술이라는 문법 아래 자신의 언어로 새겨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빛나_cozycozy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21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하이데거는 인간의 생각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어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철학자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예술언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은 모호한 존재를 형과 색, 내재된 의미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며, 안개처럼 가려져 희미한 존재의 이해를 돕는다. 홍빛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예술로 삶의 조각 혹은 파편들을 수거해 기억이 삶이 되고 삶이 곧 기억이 되도록 빚는다. 그로 인해 평범함은 특별해지고, 특별해진 우리의 삶은 존재의 의미에 보다 깊게 다가서게 된다. ● 물론 그 여러 의미 가운데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는 건 '가족'이라는 명사이다.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어우러짐으로써 작은 단위를 이루는 가족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무언가를 북돋는, 어쩌면 생의 불안을 해소시킬 힘이기도 하다. 특히 가족 구성원 중 아이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근원이자 존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본질이다. 따라서 어느 가정에든 있을 법한, 일상의 미학이랄 수 있는 그의 작품의 원천인 가족은 삶과 기억을 주어화 하는 그의 예술적 모태이고, 영감의 발원이며 예술과 삶을 이끄는 힘이다. ● 갈수록 꿈과 희망, 이상과 용기, 사랑과 관심이 무뎌지거나 희석되고 있는 동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따뜻함을 전제로 한 홍빛나의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는 알 수 없다. 미지의 목적지를 향한 오랜 여행 끝에 뒤돌아본 출발점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 하지만 작가에게 현실계와 상상계의 교묘한 결합으로 구축되는 주관적이며 동화적인 충동들과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객관적 요청들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는 지속될 것이 자명하다. 동화적이던 아니던 예술에 있어 상상력은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에너지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홍경한

Vol.20210917b | 행복 찾다-임성희_홍빛나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