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정태_김영세_김영진_김진혁_권영식 노중기_도지호_백미혜_이교준_한용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수성아트피아 SUSEONG ARTPIA 대구 수성구 무학로 180 Tel. +82.(0)53.668.1566 www.ssartpia.kr
전개 그룹, 어쩌면 대구현대미술제의 적자 ●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 이념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결성한 각종 그룹전이 미술계를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때로 작가들이 전시를 만들고 평문까지 쓰던 시절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작가가 동시에 큐레이터와 평론가를 겸하던 시절이었다. 화랑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관 역시 형식논리와 장르 위주의 전시가 일반적이었고, 어떤 이슈를 주제로 전시를 만드는 기획 전시가 드문 시절이었다. ● 보통 한국현대미술의 시점을 1950년대로 잡는데, 돌이켜 보면 50년대는 맹아기였고, 60년대에 본격화되었고, 70년대에 정착 혹은 안정화 시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현실 참여를 표방한 민중미술이 전면화했지만, 작가들이 그룹을 결성하고, 직접 전시를 만들고,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작가 중심의 미술계 환경은 여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비로소 작가와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상업화랑과 기획전 위주의 미술관 전시가 정착되면서 작가 중심의 미술 생태계는 변화를 맞게 된다. ● 1970년대 대구의 지역 화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구는 한편으로 구상화단이 여전히 강력한 지지세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현대미술 또한 활발한 편이었다. 특히 수화랑을 중심으로 일본 현대미술의 모노하 작가들과의 상호교류 전시가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구 현대미술 하면 아무래도 대구현대미술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아마도 이런 당시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최초로 열린 이후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 현대미술제가 연이어 열리면서 정착되는 사실상의 계기가 된 대구현대미술제는 1974년 그 첫 전시가 열린 이후 1979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후 대구.강정현대미술제(지금은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화랑 중심의 실내 전시와 함께, 강정 낙동강변에서 야외 설치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몸을 도구로 한 행위 예술이 이루어졌었던 것이 지금의 강정으로 옮기면서 자기 변신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전개 그룹이 있다. 참여작가들 대개가 그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고(겪었고), 그중 상당 작가들이 당시 막내 세대 작가로서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전개 그룹의 결성에는 대구현대미술제가 사실상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1974년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에 전개 그룹이 결성되었다(전개라는 그룹 명칭은 참여작가 중 김영세가 작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이은 1976년에 창립전을 열었다. 1976년 2월 대구시립도서관 화랑에서 열린 창립전에는 당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김정태, 김영진, 김영세, 도지호, 백미혜, 윤범, 이교준, 이금숙, 이태(이후 시공화랑을 운영하다가, 현재 작고한), 이현재, 황병호 등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 그룹은 1983년 제6회 전시를 끝으로 해체되는데, 매회 전시마다 참여작가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최초 참여작가가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새로운 작가가 영입되기도 한 것. 그 와중에서도 전시 내용만큼은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돌이켜 봐도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사료 된다. 그 일면을 제4회 전개 그룹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린 1980년 10월 20일자 영남일보 문화면 기사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대구 삼보화랑에서 열린 당시 전시가 실린 기사는 17일 열린 오프닝 이벤트를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부연하자면, 각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가 그 진행상 세세한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행위 예술로 총칭되고 있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몸을 도구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퍼포먼스가 대세지만, 당시에는 이벤트로 불렀을 것이다). ● 당시 기사를 바탕으로 이벤트를 재구성해 보면, 이교준은 각 「강」과 「나무」란 소재를 슬라이드 필름에 담은 이미지로, 슬라이드 필름에 기록한 텍스트로, 아마도 각 강과 나무라고 발음하는 녹취된 소리를 재생해 들려주는 녹음기 소리(음향)로, 그리고 각 강과 나무를 직접 흉내 낸 몸짓으로 재현해 보여주었다. 하나의 소재를 각 이미지로, 텍스트로, 소리(혹은 발음)로, 그리고 몸짓으로 보여준 것이다. ● 이것은 하나의 소재를 재현하는 방법 혹은 형식논리의 바이브레이션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재현은 최초 소재 자체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 그리고 재현이 소재를 반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결정적인 일인가. 최초 소재 자체와 재현된 소재 그러므로 재현이 지시하고 있는 소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에 하나의 재현이 다른 재현에 비해 소재를 더 잘 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처럼 실재와 재현, 현실과 재현과의 관계에 관련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조세프 코주스의 각 「세 개의 의자」와 「세 개의 망치」로 나타난 개념미술을 떠올리게 된다(참고로 작가는 각 실물 의자와 의자의 사전적 정의 그리고 의자를 찍은 사진을 대비시켰다. 망치도 마찬가지).
그리고 기사는 안승영의 이벤트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이벤트에서 안승영은 하나의 광원(전등)을 배경으로 자기 앞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분필로 표시한 연후에 다시 지워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관객과 일일이 악수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특히 전자와 관련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에 그 초점이 맞춰진 작업이란 점에서 보면, 자신의 손이 그린 흔적을(여기에도 분필이 등장한다) 뒤따르는 발이 지나가면서 지우는, 그러므로 자신의 몸이 흔적을 만들고 지우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을 상기시킨다.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선배 작가와의 상호영향 관계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당시 다른 작가들 역시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외 당시 전시에는 이현재의 「파도와 컵」이라는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었고, 제11회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고 돌아온 박현기가 비엔날레 정경을 슬라이드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유추해 볼 때, 물론 작가들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개념미술, 재현론과 기호론과 의미론, 몸을 도구로 존재를 사유하는 이벤트, 그러므로 어쩌면 몸의 현상학, 그리고 형식논리로 치자면 타블로와 함께 사진과 비디오 같은 당시만 해도 첨단매체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예외가 있겠지만, 참여작가들은 필요하다면 따로 모여서 스터디를 이어나가는 등 이론과 실천 면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리고 앞서 말했듯 전개 그룹은 1983년 제6회 전시를 끝으로 그룹이 해체되는데, 1983년 2월에 대구 삼보화랑에서 열린 전시에는 권영식, 박종경, 안승영, 이교준, 한용채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그동안 회를 거듭하면서 개별 작가의 신상에도 덩달아 참여작가들의 면면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그룹이 해체되는 이유는 더 이상의 동력을 상실해서라기보다는 최초 공유했던 이념을 각자 개별적인 작업을 통해서 심화시키기 위한 것, 곧 자기 자신에 더 충실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당시 대구현대미술제에 20, 30대 막내 세대로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이제 60, 70대의 중장년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전개 그룹을 소환한 것은 당시 명멸했던 다른 그룹에 비해 전개 그룹이 미처 충분히 조망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며, 특히 대구현대미술제와 관련해 그 관련성이며 상호영향 관계가 적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그렇게 이번 전시에는 당시 전개 그룹 맴버로 활동했던 권영식(인쇄의 망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아마도 하이포리얼리즘과 개념미술이 결합 된), 김영세(공과 색이 교합 하는 무용지용의 세계를 찾아가는,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를 찾아가는), 김영진(텅 빈 충만과 음양의 균형추를 찾는), 김정태(일본 모노하의 영향 관계가 느껴지는), 김진혁, 노중기, 도지호, 백미혜(민음사에서 세 권의 시집을 내기도 한, 그리드 시를 형식 실험하는), 이교준, 한용채(종이에 물이 밴 흔적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상 10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다. ● 전개 그룹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하는 한편, 당시 활동과 관련한 아카이브도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가 대구현대미술제와 그 시기(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그 존재마저도)를 같이하는 전개 그룹을 매개로 대구 현대미술의 빈 곳을 채워 완성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고충환
Back to the 展開전을 기획하며 ● 미술사에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20세기 미술이라고 한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바우하우스 등과 같이 20세기 전반의 전위적(前衛的)인 미술운동과 함께 싹이 텄다. 현대미술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야수주의, 입체주의, 독일표현주의, 신조형주의, 그리고 혁명 전후의 절대주의, 구성주의, 미래주의 등이 손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와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다다(Dada)'운동도 주목된다.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점은 혁신적이었으며 르네상스 이래 신봉해오던 미술의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이후 미술의 탈 장르화를 경험하는 현대에는 total art(토탈 아트), cross of art(크로스오브 아트) 등의 용어처럼 범주의 폭과 범위가 확장된다. ● 시기적으로 유럽보다 후발이지만 한국에서도 현대미술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의 1950년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미술은 공백기를 맞는다. 한국전쟁이 생계까지 위협하며 예술 활동을 침체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멈추었던 예술 활동이 서서히 부활하여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한국미술사에서 1970년대는 역사적 고난과 소용돌이를 체험한 미술가들이 현대미술이라는 새로운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 때이다. 이때 대구의 작가들도 혁신적인 미술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 1974년 대구에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현대미술제'가 열렸다. '대구현대미술제'는 현대미술제를 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촉매제였다. 이강소, 김기동 등,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한 청년작가들이 결성한 '대구현대미술제'는 1979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맥은 현재(대구·강정현대미술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대구현대미술제'와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미술단체 '전개(展開)그룹'이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6회의 전시를 개최한 '전개(展開)그룹전'은 45년이 지난 지금 그 궤적이 표면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소수 미술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개(展開)'라는 명칭에는 "우리 한번 열어서 펼쳐보자"라는 의미가 담겼고 창립멤버였던 홍익대학교 복학생 김영세 작가(52년생)가 이름 지었다. ● '전개(展開)그룹전'은 1976년(2월 21일~26일, 대구시립도서관 화랑) 결성 당시 대구의 계명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영남대학교 졸업생이 주축이었다. 20대에서 30대 초반의 구성멤버들은 김정태, 김영진, 김영세, 도지호, 백미혜, 윤범, 이교준, 이금숙, 이태, 이현재, 황병호 등 12명이었고 전시회가 거듭되는 동안 멤버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3년 2월 4일(금) ~ 2월 9일(수), 삼보화랑(대구시 중구 삼덕동 1가 8-13)에서 개최된 '6회 展開 group展'에는 권영식, 박종경, 안성영, 이교준, 한용채 등 6명의 작가만 참여했다. 창립전에 비해 작가 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6회전을 마지막으로 전개그룹전은 막을 내렸다. '대구현대미술제가' 청·장년들의 모임이었다면 '전개그룹'전은 20대 청년들만의 모임이라는 특징이 있다. 청년들의 혈기와 기개를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껏 펼쳐보자는 취지였다. ● 당시만 해도 매우 혁신적인 미술이었다는 것은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80년 10월 20일(월요일) 전개그룹전을 소개한 영남일보 문화면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전개그룹 네 번째 전시회의 개막일인 17일 오후 6시 30분 전시장인 대구 삼보화랑에서는 이벤트가 베풀어졌다. 젊은 실험화가 이교준, 안승영씨가 벌인 이날의 이벤트는 1백명 가까운 관중 안에서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이교준씨는 한 풍경을 담은 슬라이드와 글자를 담은 슬라이드 및 녹음기 등을 동원하여 풍경 [강], [나무], 등과 글자 [강], [나무] 등의 글자 및 소리 (녹음) 그리고 사람의 몸짓 등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표출했으며 동시에 그 재재들이 갖는 관계성을 보여주었다."(1980년 영남일보) ● "안승영씨는 2개의 이벤트를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하나의 광원(전등)을 배경으로 자기 앞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 길이를 분필로 표시하고 지우면서 자기 키와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중과 악수를 나누면서 그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이 밖에 이현재씨의 출품작 [파도와 컵]의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었으며 최근 제 11회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고 돌아온 박현기씨가 비엔날레 풍경을 슬라이드를 통해 선보이면서 설명했다."(1980년 영남일보)
당시 전개그룹 멤버들은 '대구현대미술제'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선배작가인 이강소, 박현기, 최병소 등과 소통하며 미술의 혁신을 꿈꾸었다. 이들 멤버들은 서울과 마산 등 타 도시의 젊은 작가들과도 교류하며 외연을 넓혀나갔으나 6회 전시 이후 유학과 거주지 이동 등의 이유로 전시회를 유지·지속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활발하게 그 맥을 이어가는 '대구현대미술제(현재-대구·강정현대미술제)'에 가려서 존재에 대한 이해가 미약한 실정이다. ●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은 1970년대의 기억을 소환해 『back to the 展開』전을 개최한다. 증언과 당시의 흔적들을 토대로 대구 미술의 역사를 점검하고 참여 작가들의 꾸준한 예술창작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대구현대미술 1.5 ~ 2세대들이 야심차게 결성한 단체 '전개(展開)그룹'과 참여 작가들의 꾸준한 창작활동을 전시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전시에 불참한 작가들도 있지만 1974년 한국에서 최초로 현대미술제를 개최한 도시가 '대구'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back to the 展開』전에 대한 흔적 돌아보기는 대구미술사에서 간과하거나 미루어둘 수 없는 단추 하나를 단단히 채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 45년 전만 해도 대구에서는 구상미술이 지배적이었다. 시류에 편승하기보다 독자적인 행보로 차별화된 예술언어를 찾아 나선 젊은 미술가들의 용기 있는 실천은 물론, 반세기 동안 꾸준한 예술적 행보가 후진들에게 호기심이 아닌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당시 20 ~ 30대였던 작가들은 어느새 60대 ~ 70대의 중진· 원로로 자리 잡았다. 개인전 경력이 30여회 이상인 이교준 작가는 현재 대구미술관 초대전을 앞두고 분주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한 백미혜작가도 개인전 경력이 30여 회에 이를 뿐 만 아니라 이번 기획전 참여 작가 대부분이 예술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전 멤버가 예술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인 60~70대 전개그룹 멤버들은 '예술이야말로 사람의 이야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의 이야기는 곧 삶 그 자체이다. 삶의 프로세스에는 철학과 종교, 인문학적 소양 외에도 복잡 미묘한 삶의 스토리가 녹아든다. 설렘과 기대 그리고 긴장하며 준비한 back to the 展開전이 대구미술계의 신(新)·구(舊)세대가 진지하게 교류하는 소통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40여 년 전 갈급했던 청년들의 미술혁신운동 展開전이 대구미술사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조심스럽지만 미술사연구자들에게 숙제로 남기고 싶다. ■ 수성아트피아
Vol.20210915c | Back to the 展開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