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1_0902_목요일_04:00pm
참여작가 신금례_한진수_이경순_노영실_김은희_천연순_김영희_원선영_최구자_곽연 김영안_이서희_강승애_이기미_이미혜_이정주_김홍자_전정희 한나민_서반숙 정정옥_유기은_박운주_김효정_안경희_강정현_김숙희_박혜경_이금희_이영경 조기주_공은희_김홍주_이명순_정미경_지연희_이영미_이준령_차명임_강애란 강태화_김정효_조기련_채정수_김미옥_이경희_김성혜_김연숙_김영란_김홍식 박인옥_서보희_신미선_우정하_유은_이경희_이경희_이현지_이혜영_이혜정 이희각_정경미_정지원_최경숙_현경원_김애란_김지선_남여주 동소신_박수경 박영은_박혜성_백다임_변해정_송영은_송은주_신명화_윤경_이경애_차승민 천동옥_강선영_김희경_박신숙_서영임_송현미_심연_윤경미_정두옥_제유성 주경숙_최운선_김현희_윤경숙_윤애영_이경란_이미란_이영신_차형미_황명희 강문희_금사영_김선주_김영지_김희선_민은규_박가나_박은덕_박현우_양수균 윤인정_이귀영_이상미_정연주_정인숙_하상희_한규호_한여옥_김길숙_나미경 박효실_이윤정_조강신_조수경_박형주_안혜리_오경아_김효선_김희진_이혜진 장수임_조현_최문선_이해정_조상은_허정원_김민신_나혜영_문유선_오수경 이수미_정선주_권혁진_성영희_주영신_백승주_서지원_신주혜_전영경_최원정 가우_권오신_박혜성_김현수_장윤정_원윤선_이고운_이지혜_서재정_손서현 송지수_이지은_이용미 이서전 작가 163명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1971년,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1931~)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라는 글에서 "우리의 별자리나 호르몬, 월경주기, 혹은 내적 공허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와 교육" 때문이라고 명시하였다.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소장된 몇몇 명작이 여성 미술가의 작품이 유명 남성 작가의 작품으로 둔갑했거나 '작가미상'으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한다. ● 과거 예술가가 되려면 도제식 교육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예술가인 아버지의 공방에서 교육받은 소수의 여성만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수 있었다. 대다수 여성은 수공예나 일상 용품을 만드는 데에서만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화가가 될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가가 된 여성조차도 장식적인 꽃그림 등에 그의 작품세계를 한정한 경향이 있었다. 여성의 특성이 그러한 것이라는 편견에 더하여 후원자의 주문에 따라 그림을 그리던 당시 판매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장대한 영웅화나 역사화 심지어 풍경화마저 남성의 영역이었다. 근대기 인상주의자로서 이름이 알려진 메리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5~1926)나 로코코 미술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이자 코로의 제자였던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마저 실내생활과 아이들이 주제였다. 풍경화에 나타는 장소들마저 그들이 경험한 공간, 소풍을 나갔던 장소에 한정되어 있었다. ●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전람회인 『서화협회전』의 수많은 동양화 사이에서 서양화를 출품하여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었고, 서울에서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작가적 양식을 규정할 수 없다. 1920년대에 많은 작품을 소장가들에게 판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 작품이라는 명제표와 함께 소장되어 온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나혜석이 불륜이나 이혼이라는 스캔들에 얽힌 탓에 그의 그림 소장조차 알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응로(李應魯, 1904~1989), 장욱진(張旭鎭, 1917~1990) 등이 나혜석에게서 서양화를 배운 것을 상기한다면, 근대기 위대한 서양화가로서 그의 입지는 굳건할 것이다. 하지만 남성 작가의 연애사가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된 반면 나혜석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나혜석은 1933년, "양화교육을 통해 전통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여성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계몽하는 것을 목적"으로 여자미술학사(女子美術學舍)를 설립하였다. 비록 경영난으로 몇 달밖에 운영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 전문교육기관으로서 유화, 수채화, 목탄화, 연필화 같은 본격적인 서양화 교육이 이루어졌다. ● 여성의 전문적인 미술교육은 단지 여성화가를 탄생시킨다는 데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물학적 성에 의해 구분되는 영역을 가로지르는 통로이자 모든 이들의 영혼에 닿는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나혜석이 꿈꾸었던 전문적인 여성 서양화가 양성 교육기관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열렸다. 광복이 된 그해 10월, 이화여자대학은 한림원·예림원 및 행림원의 3원을 두었는데 예림원은 미술과와 음악과를 둔 예술대학의 형태를 띠었다. 입학생들은 뎃생을 배우고,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려 전문적인 화가가 되었다. ● 1946년 8월 15일, 이화여자대학교는 국내 최초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예림원 미술과는 미술학부로 개편되었다. 미술학부 학생들은 승격기념식으로 11월 15일 『교내미술전람회』를 열었다. 대학 내에서 최초의 재학생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1948년 12월 6,7일 양일간에도 이화여자대학교 임시교사 낙성 기념으로 미술학부생들의 전시가 있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그러니까 제1회 입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경향신문사 후원을 받아 대원화랑에서 전시를 하였다. 『녹미회전』은 국내 최초의 여성미술가들의 전시회이자 여성미술가들만의 조직이었다. 국내 대학에서 최초로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학과가 설치된 곳은 이화여대, 최초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전시를 한 것도 이들이었다. ● 국내 '최초의'라는 대학에서의 전공으로서 미술학과, 전시, 단체 등을 조직한 것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왜 몇몇 연구자들의 서술에서는 '광복이 되자 서울대학교 등에서 미술대학이 생기고' 등으로 서술하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전문 고등교육기관으로 탄생.미술대학은 1946년 10월 15일 국립서울대학교가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개교할 때 예술대학의 미술부로 설립됐다."라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정리한 「연혁」에 의거한 것일 터이다. 또한 너무도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라 믿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자들이 그렇게 빨리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국내에서 여성미술가의 탄생은 주목받지 못한 것일까? 사실 당대에는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고 있었음을 오래된 신문만 뒤적여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기록에서 지워지고 폄훼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최초의 졸업생들이 생존하며 그들의 미술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시대를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귀기울이는 이들은 매우 적다. 서구 모더니즘이 백인 엘리트 남성의 시대였던 때와 평행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여성을 아마추어와 구분되는 전문가로서, 또 작가로 보기보다는 '여성작가'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 수많은 화가들이 꽃을 그린다. 그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꽃을 그리는 남성들은 생명력을 표현하는 전문가이지만, 꽃을 그리는 여성은 장식화를 그리는 아마추어로 쉽게 얘기되는 것을 본다. 대학 시절 교양강좌의 교재였던 H.W. 잰슨의 『서양미술사』에 여성작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던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 즉 기록에 의해, 지식에 의해 사실을 변형시키고 재구성하는 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 여성의 이름을 드러내기, 미술가로서 이름을 드러내기는 미술사에 편입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여성 추상미술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가 칸딘스키(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1866~1944)라는 상식은 아직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가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지식으로 변환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아주 동일한 시대를 살았지만 동시대인 중 칸딘스키의 '말'에는 모두가 주목했지만, 정말 존재했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는 여전히 수정된 곳 없이 저작되고 강의된다. 한국미술사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 왜곡된 정보의 잘못을 지적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수정하는 데에는 정말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현대미술에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말하기 시작한 이후 여성미술가의 미술관 진입은 훨씬 활발하여졌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미술관급 전시에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발견하기는 정말 어렵고,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에서 제대로 언급되는 여성작가도 적다. 다수의 여성 미술가들이 갖는 말랑말랑하고, 장식적이고 집요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수공예성, 혹은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 같은 것은 미술의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는 것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이번 성곡미술관의 『지구라도 옮길 기세』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그것도 동일한 학교, 동일한 학과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이들이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코 그 단일함에 의해 나타난 속성이 아니다. 개개의 목소리, 혹은 외부에 잘 들리지 않는다면 함께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작품이 세상에 있음을, 그들을 존재시키고자 쏟아부어온 무한한 노력의 시간을 가시화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동안 이 단일체의 전시는 화가로서 자신을 연마하는 경우이거나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조차 갖지 못한 모두에게 작가로서 함께하는 이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소중한 작품발표 전시였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전문가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전시이므로. ● 이 세상 모든 여성작가들은 다른 성별의 작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그렇지 못하면 또 그런 탓에, 미혼이거나 비혼이거나 어떤 편견의 말을 듣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이 세상 모든 여성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선 순간 두 발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무어라 딱히 지칭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게 된다. 가슴에 담은 예술 때문에 이 무거운 것을 어깨에 올려놓고, 작업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잠을 줄이고, 나쁜 엄마가 되기도 하는 여성미술가의 삶은 일반인은 상상치 못할 것이다. 철저히 예술 속에 거주하고 그 안에서 전투를 해야 하는데 자꾸 그곳에서 튕겨져 나와야만 되는 순간들로 구성된 그 시간들은 더더욱 짐작도 못할 것이다. ● 이들이 만나고 전시를 꿈꾸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소리를 내는 단톡방을 바라본 이가 말했다. "지구라도 옮길 기세입니다." 그 말이 내게는 데프콘(DEFCON)의 2단계(Fast Pace)에서 1단계(Cocked pistol)로 향하는 중이라는 말로 들렸다. ■ 조은정
Vol.20210831c | 이서전 : 지구라도 옮길기세-As if we could lift the earth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