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Ways of Mourning展   2021_0826 ▶ 2021_1014 / 주말,공휴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수지_김원경_이서영_이하영

주최 / 광주여성가족재단 기획 / 이하영

관람시간 / 09:00am~05:00pm / 주말,공휴일 휴관

광주여성가족재단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3층 기획전시실 Tel. +82.(0)62.670.0500 www.gjwf.or.kr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시각예술×문학 네 명의 여성 예술인이 제안하는 애도의 연대 ● 코로나19 확산 이후 20대 여성 자살률이 전년대비 34% 증가했다. "더 이상 단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는 구호가 무색하게 연이어 성범죄 피해자 사망 소식이 들려온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가 1.6일에 한 명꼴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된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다.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 전시를 위해 모인 네 명의 예술가는 애도할 틈 없이 치워진 삶을 헤아리며 나름의 대답을 만들어간다. 시각예술과 문학이 만나 완성된 작품을 통해 사라진 여성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애도의 느낌을 나누며 서로 연결되기 위해 애쓴다. 헌신의 신화를 벗겨내고, "떠나간 것들이 마음껏 거닐 수 있는 길을 낸다." 가해자를 찾아 추궁하기보다 남겨진 자리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충실한다. 애도할 틈조차 남기지 못했던 이유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 애도의 연대를 제안하는 작품 앞에서 다시 한번 질문을 떠올려보자.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어쩌면 애도가 필요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도의 이유와 방법을 고민해 본 사람은 안다. 떠나간 삶들을 품고 계속해서 내일을 이야기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힘을 다해 잘 보내주자. 동시에 내 앞과 곁의 삶을 지켜나가자. "애도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힘이 세다." ■ 이하영

애도하는 사람의 힘 ● 애도하는 사람의 시선이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곳은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동시에 텅 빈 시공간. 한 사람의 죽음은 곧 그가 머물던 세계의 죽음과도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구축했던 모든 시공간, 의미와 관계들이 허물어지는 순간. 누구도 그를 되살려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을 때에 그의 세계는 죽는 것이겠지. ● 그러나 정말로 죽는 것일까 그가 남긴 세계는. 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가 살던 세계마저 일순간에 죽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애도하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 되살아난다. ● 이제는 사라진 사람이 남긴 흔적을 들여다본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평범한 의자, 수천 권은 찍혀 세상에 퍼졌을 책, 특별할 것 없는 사물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가 입던 옷에는 아직도 그의 체취가 남아 있고, 그가 앉았을 모양으로 움푹 패인 소파, 그가 걷는 모양으로 닳았을 신발의 뒤축. 그와 자주 나누던 농담이나 말투, 목소리 같은 것을 떠올리면 그는 여전히 애도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곳이 하나의 세계이기를 가능하게 했던 한 사람이 떠난 후에 남겨진 시공간은 무릎을 꿇은 것처럼 무력한 자세로 제자리를 지키지만, 애도하는 사람의 시선은 그 시공간 위에서 사라진 이의 모습을 얼마든지 복원해낼 수 있다. ● 기억 속의 구체적인 감각으로 되살아난 그는 금방이라도 걸어 들어와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길 것만 같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때에 문득 느껴지는 서늘함. 이제 무언가가 변했고, 이를 어떤 힘으로도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불가항력적인 예감은 오히려 그의 부재 위에서 그의 존재를 되살린다. 애도하는 사람의 힘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애도하는 사람은 슬픔과 고통에 무력하게 지는 자가 아니다. 애도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힘이 세다. ● 애도의 주체는 혼자가 아니다. 떠난 자는 돌아올 리 없고 대답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사라진 이의 부재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제는 현존할 수 없는 그를 기억 속에 되살려 간직하는 일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원경

터널이 된다는 것 ● 내가 생각하는 장례(혹은 애도)의 절차란 이런 것이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을 조심히 눕히고, 비어있는 곳을 다독다독 메워준 뒤, 남겨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내 세계의 문 밖으로 떠나갈 채비를 하는 저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저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시간을 기꺼이 살아내는 일. ● 그리고 가능하다면, 떠나는 이의 모습을 평생에 걸쳐 간직해보고자 시도하는 것. 간직하긴 하되 가끔씩은 잊고 살아가는 것. 남아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 이기적으로 제 삶을 지켜내야만 한다. 자기만의 삶을 지켜내야, 시간의 회로를 지켜낼 수 있다. 시간의 회로를 사수해야만 길을 구축할 수 있다. 떠나간 자들은 그곳을 오솔길로 삼고 잠깐이나마 거닐 수 있다. 어쩌면 떠나간 것들이 마음껏 거닐 수 있는 길과 닮아있는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도, 제법 쌀쌀해진 길 위를 걷거나 흐르는 물에 컵을 씻다가, 문득 스치는 그이의 환영을 감지해내고, 기꺼이 반기는 일. ● 그 환영은 깜박이는 형광등처럼 내 삶 속에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있음, 없음, 있음, 없음…… 혹시 그 환영을 오랜 벗으로 삼고, 이 시간의 결 위에서 함께 미끄러지듯 동반해보겠다는 다짐은 조금 과한 것일까? 애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떠나간 자와 남겨진 이들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라던데, 과연 뜰채로 걸러내듯 망자의 세계를 남겨진 자들의 세계 위에서 걸러낸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일까? ● 내 경우엔 밤새 침대에 누워 내가 미처 지켜내지 못했던 것들을 헤아리며, 스스로를 죽도록 미워하던 시절도 있었다. 아기, 두 살짜리 고양이, 열 살짜리 강아지, 요양원 휠체어에 앉아있던 노인이 사람들에게 끝없이 건네던 요청―자길 두고 떠나가지 마라던 것, 마지막에는 집으로 돌아가 안방 소파에 누워 죽고 싶다는 것.―이 떠오르고, 이젠 그들의 서운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무엇보다 그들은 대체로 아주 무르거나 여린 존재들이었기에, 누군가의 무심함은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것이라는 귀결까지 생기는 것이다. 결국 어떤 시간은 죄책감 속에서 벼려지고 벼려지다가, 정말 화살처럼 내 몸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저 시간이 내 몸 위를 뚫고 지나간 자국을 들여다보며, 이왕 구멍이 생겨난 긴 김에 터널 같은 사람이 되어보자고 문득 다짐해보기도 했던 것이다. ● 그런데 터널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 터널 같은 사람은 뻥 뚫려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는, 죽음의 문 앞까지 망자의 손을 잡고 따라가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곳에서 통로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거닐 수 있는 중간다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샤먼(혹은 창작자)의 오래된 임무라고 한다. 샤먼은 비워져있기에 시시때때로 얼굴(형식)을 바꾸는 사람이다. 실제로 얼굴이라는 말이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데, 나 역시 내가 알아왔던 여성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내 얼굴에 드리워진 그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공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치 그 이가 앓아왔던 것을 함께 겪었던 것처럼 허망해하다가, 한밤중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하다말고 내 이목구비에 아주 잠시 내려앉은 그 이의 표정을 본 일이 있다. ● 터널이 되겠다는 것. 사실 그 결심은 제 안으로 왕래하는 것들을 모조리 수용하겠다는 것 마냥 겸허하게 보이지만, 실은 길 위를 지나가는 모든 것들의 자취를 (잠깐이라도) 제 안에 포섭해보겠다는 은밀한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그것이 창작자의 경우라면, 지금까지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연장을 기꺼이 내려놓고 자기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지워내는 과정 속에서, 제 속에 새로운 것들이 오갈 수 있는 여백을 확보하는 작업과 맞물리는 것이다. ● 이쯤에서 자문해본다. 터널(형식)을 짓는 행위는 과연 윤리적인가? ● 때론 내 자신이 터널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안전모를 쓰고 산을 뚫어가며 터널을 내고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물론 터널 같은 사람과 터널을 내는 사람은 다르다. 막혀있는 산을 뚫어내 길을 짓는 폭력성은, 아무것도 없는 곳 위에 상징/형식을 구축해내려는 자의 권위와 맞물린다. 어찌되었든 간에 형식을 짓는 행위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미학과 정치는 분리할 수 없으며, 애도는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 속에 선연히 진행되는 매커니즘이자,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애도에는 성공이라는 것이 없다. 하염없는 시도만 있다. ● 애도에 대한 형식을 짓고, 시도하며 자문했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해졌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위해 시를 쓴다. ● 결국 이 글은 이렇게, 애도의 윤리적(이면서도 미학적인) 형식에 관해, 새로운 방법론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다만, 내 스스로를 비롯해 주변의 여성창작자들에게 문득 요청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우리는 이제 터널의 은유 속에 감금되어왔던 시간으로부터 풀려나야만 한다고. 인공적인 터널의 성질―외력에 의해 파생된다는 것, 뻥 뚫려있는 것, 중간을 도맡는 것, 무엇이든 품고 수용해야한다는 성질 등―은 그 옛날 샤먼에게 강요되어왔던 운명의 궤적과도 닮아있다고.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우리를 우리가 직접 만나, 우리에 대한 정의와 성질을 끝없이 갱신해나가면 좋겠다. ■ 이서영

강수지, 이하영, 김원경_Ways of Mourning_피그먼트프린트, 시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김원경_Ways of Mourning_피그먼트프린트, 시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김원경_Ways of Mourning_피그먼트프린트, 시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김원경_Ways of Mourning_피그먼트프린트, 시_가변크기_2021

Ways of Mourning ● 강수지·이하영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폭증한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에 주목해 사라진 여성들이 서있던 자리를 기록해왔다. 장소를 담은 사진과 함께 놓인 일상의 장면들은 문학가 김원경의 글이 더해져 사라진 여성들, '20대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

강수지, 이하영, 이서영_애도를 위한 몸풀기_천에 자수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이서영_애도를 위한 몸풀기_천에 자수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이서영_애도를 위한 몸풀기_천에 자수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이서영_애도를 위한 몸풀기_천에 자수_가변크기_2021
강수지, 이하영, 이서영_애도를 위한 몸풀기_천에 자수_가변크기_2021

애도를 위한 몸풀기 ● 강수지·이하영은 공동체의 화합과 안녕을 도왔던 '길쌈놀이(단심줄놀이)'를 모티브로 한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이서영과 김원경의 글쓰기 수업에서 수집한 문장들로 반복되는 사운드를 제작하고, 퍼포머들은 이에 맞춰 시가 수놓아진 천을 엮고 풀며 몸을 움직인다. '이성-신체'라는 전통적 이분법에 구속된 몸을 해방 시키고 곁의 여성들을 돌보고 연결하기 위한 몸짓을 만들어낸다.

강수지_On The Nature Of Daylight_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_00:04:40_2021 이서영_패, 아니면 경, 옥_21줄 288단어, 시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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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지_On The Nature Of Daylight_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_00:04:40_2021 이서영_패, 아니면 경, 옥_21줄 288단어, 시_2021

On The Nature Of Daylight ● 시각 예술가 강수지는 5·18과 관련한 기억이 중첩된 장소들을 기록해왔다. 그가 영상으로 담아낸 구 광주국군병원은 이서영의 시를 만나 하나의 신체로 기능하게 된다. 버려진, 망명 상태의 건물과 여성의 몸은 달리 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낙관의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는 작품을 통해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형태와 방식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수지_조각, 애도하는_버려진 스티로폼, 시멘트_가변크기_2021
강수지_조각, 애도하는_버려진 스티로폼, 시멘트_가변크기_2021

조각, 애도하는 ● 가볍고,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스티로폼을 콘크리트로 덮은 뒤 단단히 굳힌다. 버려진 스티로폼은 기념비가 되어 전시장 한편에 서게 된다. 흠이 생기지 않도록 값비싸고 중요한 것들을 감싼 뒤 쉽게 버려지는 스티로폼은 남을 위해 본인의 꿈을 포기한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겹쳐진다. 시각 예술가 강수지는 버려진 스티로폼을 모아 완성한 작품을 통해 너무나 쉽게 평가절하 되는 여성들의 노동을 조명한다. 헌신의 신화를 벗겨내고 그들의 수고와 기여를 바로 세운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은 K-신화 뒤에 가려진 여성들의 노력을 돌아보게 된다. ■ 광주여성가족재단

전시연계프로그램 「애도를 위한 글쓰기」 일시: 2021.08.31.(화) 19:00-21:00 장소: 광주광역시 빛고을시민문화관 별관 아트스페이스 1호실(광주광역시 남구 천변좌로 338번길 7) 내용: 전시 연계 프로그램 「애도를 위한 글쓰기」는 참여작가 김원경, 이서영이 진행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이자 전시 작품 「애도를 위한 몸풀기」 완성을 위한 작품 제작 과정입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수집된 문장을 바탕으로 사운드를 제작하고 제작된 사운드는 퍼포먼스에 활용됩니다. 퍼포먼스 과정을 기록한 영상 제작 및 전시(상영)를 계획 중에 있으며 관련 소식은 추후 광주여성가족재단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Vol.20210826f |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Ways of Mourning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