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1_0806_금요일_04:00pm
주최,주관 / 전북도립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20pm / 월,공휴일 휴관
전북도립미술관 Jeonbuk Museum of Art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길 111-6 (원기리 1068-7번지) 본관 제5전시실 Tel. +82.(0)63.290.6888 www.jma.go.kr
《천칠봉, 풍경에 스미다》는 한국 근현대 서양화단의 사실주의 구상계열을 대표하는 천칠봉(千七峰, 1920~1984)을 다시 보는 전시이다. 천칠봉은 192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지역 서양화단의 1.5세대 작가로 활동했다. 50년대 중반 서울로 이주하였고 고향의 옛 풍경과 흙 내음을 기억하며 '한국적 풍경'에 천착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한국 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지역 미술의 인물과 작품, 사건을 재평가하기 위해 전북 미술사를 발굴·수집·연구하는 '전북미술사 시리즈'를 추진하고 있다. 전북 미술의 토대를 이해하고 한국 미술사의 여백을 채워 시각 문화의 밀도를 탄탄히 하는 미술사적 성과를 얻고 지역문화의 자긍심을 북돋을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기획하였다. 《천칠봉, 풍경에 스미다》는 풍경화로 한국 구상 미술의 실천을 대표했던 천칠봉의 자취를 조망하여 한국성과 교통할 수 있는 지역성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 천칠봉은 손응성(1916-1979), 변시지(1926-2013)와 함께 창덕궁 뒤편 동산인 후원(後苑)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은 '비원파'(祕苑派) 작가로 알려져 있다. 천칠봉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관전(官展)계, 소위 '국전'(國展) 작가라는 것이고 고전주의 구상계열 화가 모임인 목우회(木友會)의 작가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천칠봉의 화업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했다. 1949년 그가 30세 되던 해에 시작된 국전은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81년 폐지된다. 국전에서 천칠봉은 1961년 「고궁」으로 처음 입선한 후 69년까지 9년 동안 매해 입·특선하고 81년까지 매해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초청되었으며, 77년에는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시각적 재현에 충실한 보수적 구상화가라는 인식은 목우회가 주최한 제1회 공모전에 입상하고 목우회원으로 왕성히 활동하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 같은 평가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까지 국책(國責)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민족기록화'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 《천칠봉, 풍경에 스미다》는 그의 사생 실천을 돌아보며, 그가 즐겨 다뤘던 양광(陽光), 녹음(綠陰), 계절, 여행, 한국적 정물의 정취를 감상하도록 했다. 두 시기로 나누어 이들 '풍경'을 바라본다. 첫째는 천칠봉이 미술을 연마하던 전북 시기다. 둘째는 "미의식을 생존영역에 두고" 전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상경했던 서울 시기이다. 이 시기에 천칠봉은 비원과 서울 근교에서 점차 전국의 숲과 계곡으로 시선을 확장하면서 '한국의 풍경'을 되풀이하여 탐구했다. 전시는 그의 미술 실천과 방법론이 전북의 풍경과 사람에 기원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50년대 전북의 서양화가 : 풍경의 기원」, 「비원과 서울 근교의 풍경 : 양광과 반짝이는 녹음의 풍경」, 「전국의 산야와 바다 : 되풀이되는 풍경들」, 「정물화와 꽃 그림 : 복숭아와 모란이 있는 풍경」로 나누고 그 사이사이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데스크로 구성하였다. 천칠봉은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이 드리우던 그림자에서 막 벗어난 고향의 풍경을 사랑했으며 서울 시기를 거치며 한국의 풍경 속으로 스며갔다. 전시는 그의 여정이 우리의 고향을 담은 한국적 풍경에 흘러가는 도정(道程)이었음을 다루고자 한다.
50년대 전북의 서양화가: 풍경의 기원 | 1940년 전주공립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의 장남으로 생계를 위해 직장에 취직한 천칠봉은 정식 미술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양화'(洋畫)를 배웠다. 알려지기로, 해방 즈음 박병수(1914-1973)의 개인 아틀리에에 개설된 '동광미술연구소'(東光美術硏究所)에서 서양화를 배웠는데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청람 이순재(1905-1958)와 동창 이경훈(1921-1987), 주로, 훗날 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금릉 김영창(1910-1988)를 사사했다. 천칠봉과 함께 공부한 이들이 전북 서양화단의 1.5세대로 이들 스승과 제자 '양화가'는 일본 유학파 등 지역의 또 다른 서양화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역의 화단을 개척해 나갔다. 첫 번째 구역에서는 50년대 전북의 서양화가의 작품을 통해 천칠봉의 '미술 연마' 시기를 돌아본다.
비원과 서울 근교의 풍경: 陽光(양광)과 반짝이는 綠陰(녹음)의 풍경 | 50년대 중후반 '미의식을 생존영역에' 두기로 한 천칠봉은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천칠봉은 60년대부터 고궁에 매일 같이 '출근'히며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궁궐의 풍경뿐만 아니라 비원의 여러 권역을 그렸고, 1961년 창경궁 통명전을 그린 「고궁」으로 제10회 '국전'에 처음 입선하였다. 고궁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 자연의 반영으로 한국 감각의 원형을 포착하려 한 제재였다. 고궁에 가지 않는 날이면 서울 근교의 자연으로 자주 나갔다. 주로 북한산과 도봉산을 찾았고 겨울에는 북한산 아랫마을 '수유리'를 즐겨 그렸다. 광릉의 사계 또한 그가 즐겨 그린 모티프였다.
전국의 산야와 바닷가: 되풀이되는 풍경들 | 1970년부터 천칠봉은 '고궁'의 풍경이 아닌 전국을 돌며 산, 계곡, 바다로 야외 사생을 다녔다. 이들 작품에서 천칠봉은 실제 풍경과 상상 풍경을 오고 가며 한국적 정취를 탐구하고 있다. 자연 풍경에의 천착은 비원 사생에서 추구한 한국의 원형 감각을 탐구했던 것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천칠봉의 풍경화는 초목, 돌, 물, 계절감-시간 같은 자연의 기초 요소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인간의 발길이 드문 장소의 정적인 공기와 동적인 물의 조화는 고궁 시리즈 이후 천칠봉이 탐구한 중요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천칠봉이 묘파하려는 것은 한국의 자연을 조형하는 햇살에 있음을 되풀이하는 풍경의 변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같은 변주 속에서 천칠봉은 본다고 하는 자기 확신에서 성립하는 미학적 실천을 취하고 있다.
정물화와 꽃 그림: 복숭아와 모란이 있는 풍경 | 천칠봉은 구상 정물화 또한 많이 그렸다. 야외에서는 모란, 장미 그리고 포플러를 즐겨 그렸는데, 모란은 '고궁 작업'의 연장으로 덕수궁의 것을 선호했으며 포플러는 강천사로 가는 길의 것을 즐겼다. 집에서는 향토색을 상징하는 기물과 꼴을 찾아 그렸는데 주로 복숭아를 그렸다. 천칠봉은 손응성이 석류를 즐겨 그리며 "색감이 그렇고 또 오랜 인고 끝에 열매를 맺는 과정이 한국인의 역사와 상통"한다고 나름의 입장을 내세운 것처럼, 동양적인 정감으로 모란과 복숭아를 즐겨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 전북도립미술관
○ 부대행사 1. 「아트 토크1: 천칠봉, 녹색의 비문을 열다」 - 2021_0819_목요일_04:00pm - 김현숙(이응노연구소 소장) - 1부 녹색과 녹음의 비원으로 풀어보는 천칠봉의 풍경화 이야기
- 2021_0819_목요일_05:00pm - 이동근(원로화가), 김광희(전시 큐레이터) - 2부 천칠봉과 함께 사생을 다녔던 원로작가의 기억으로 돌아보는 천칠봉의 사생 여행
2. 「아트 토크2: 미술애호가와 컬렉션」 - 2021_0901_수요일_04:00pm - 황정수(미술컬렉터), 서정만(에이옥션 회장), 김광희(전시 큐레이터) - '1세대 상업화가' 천칠봉의 작품을 풀어보는 미술품 컬렉션 이야기
Vol.20210806g | 천칠봉展 / CHUNCHILBONG / 千七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