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스페이스55 프로젝트 『시차적응』 여섯 번째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프로젝트 기획 / 안종현 협력 큐레이터 / 김진혁 디자이너 / 서가온
토탈미술관×스페이스 55 토탈뮤지엄 전시기간 중 매주 월요일 3시, 사전예약 필수 문의 / 토탈미술관 02-372-3994
관람시간 / 12:00pm~07:00pm
스페이스 55 SPACE 55 서울 은평구 증산로19길 9-1 Tel. +82.(0)10.6304.4565 www.space55.co.kr blog.naver.com/newacts29
우리 … 사랑일까? ● 예술과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로서의 사랑 상담의: 옷을 벗어요. 여작가: 네? 위의 대화는 안옥현의 비디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2019)에서 상담의와 여작가가 상담하는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상담의가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하는지 꿍꿍이속이 궁금한데, 마음 한편으로는 만약 사랑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도 고개를 든다. 상담의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언행임에도 불구하고 수긍하게 된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열정적 사랑이라면 일탈을 허락하는 경향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랑의 이름으로는 객관적 기준자를 무시하고 주관적 기준자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의 유일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에는 고정된 정의가 없어서 사랑이 화두가 되었을 때, 한두 마디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그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무릅썼던 모험들도 모두 제각각이다. 사랑할 때는 이러 저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객관적 기준자가 없다. 대신에 사랑이 결부된 일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실은 오래된 연인들이건, 혹은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이건 심지어 상담의와 내담자 사이건 간에 언제나 따라오는 '그래서, 이들이, 혹은 우리… 사랑일까?'라는 질문이다. 그저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의 여부만 중요하다. 그러니 사랑은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고유한 관계에서 사랑일까? 라는 질문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기준자와 사회의 기준자가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는 매개체의 기능을 한다고 봐야 한다. 정의가 모호해 감정만 활성화하기에 소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니 상징적인 소통 매체이고 누구나 한마디씩 한다는 점에서 일반화된 소통 매체이다. 사회적 행위의 역학을 일종의 알고리즘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체계 이론가 루만은 사랑을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 매체라고 부른다. 개인의 주관적 의미와 사회의 객관적 의미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는 매체.
이를 고려하면, 스페이스 55의 전시 시리즈 제목처럼 사랑은 일종의 「시차 적응-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 개인의 주관적 의미와 사회의 객관적 의미 사이의 시차 적응을 시도할 계기를 마련해서 그렇다. 전시에 초대된 두 명의 작가, 안옥현, 윤정미 또한 사랑과 관련된 작품을 소개하는데 이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들은 객관적이기보다 어쩌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독특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주관적인 세계를 사랑이라는 매체로 판단했을 때 등장인물의 주관적 의미가 혹은 작가의 메시지가 그럴 수 있다고 수긍했다. 물론, 나의 해석은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이들의 작품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읽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주관과 나의, 혹은 객관적 의미를 비교하게 하는 흔한 활동이 있는데 그것이 작품감상이다. 예술도 사랑과 비슷하다. 우리는 예술을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데다가 각각의 작품도 하나의 의도와 정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또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작품도 소통의 동기를 유발하는 질문이 따라오는데 그것은 미적 쾌감을 주는가? 어떤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가? 등이다. 심지어 비평가라는 직업까지 생겨나 왈가왈부하면서 작가의 메시지를 비교하면서 소통을 더욱 활성화한다. 작품이 작가의 주관을 내용과 형식으로 풀어 놓은 것이라면 작품을 매개로 그 작가의 주관과 관객의 주관, 혹은 객관적 기준자와 같거나 다른 시차를 수긍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소통을 유발하니 작품도 시차 적응을 위한 소통 매체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아래의 글에서 소통 매체로서의 사랑과 예술작품을 키워드로 나의 시점이 두 작가의 의도와 어떻게 같거나 다르며, 사랑이 정체성의 문제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윤정미), 소통이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 인간의 생리학적 조건 아래에서(안옥현) 어떻게 사랑이 개인의 주관적인 세계와 사회라는 객관적 세계를 매개하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침투가 예술과 갖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윤정미-사랑과 정체성 ● 사진작가 윤정미의 「핑크와 블루 프로젝트」는 사회의 조건화라는 맥락에서 창작됐다. 「핑크와 블루 프로젝트」는 옷은 물론이고 장난감, 문방구, 가구에 이르기까지 핑크나 혹은 블루 한 가지로만 구매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핑크나 블루의 물품을 한데 모아 놓고 촬영한 작품이다. 한 예로 「블루 시리즈」 중 「Hyunho and His Blue Things, Seoul, South Korea」(2008)는 현호가 온통 파란색 일색으로 모은 물건들을 늘어놓고 그 중간에 현호가 앉은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회가 여아에게는 핑크색을 그리고 남아에게는 파란색을 조건으로 지정해 준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가 제시하는 정체성 조건에 자신을 동화하도록 유도하는 푸코식의 권력을 고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각각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색상 외에도 사진 속 등장인물이 선택하는 국내외 상품과 도서에서는 사진이 제작된 당시의 성 정체성과 밀접한 유행까지 가늠하게 한다. ● 이러한 의도는 근대의 개인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주체로의 탄생한다는 것이 곧 주체성의 상실을 동반함을 고발하는 탈근대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작업 활동 초기부터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2004)는 작가가 'woman' 'mother' 'wife' 'Korean' 'daughter' 'daughter in law' 'endure'라는 단어를 빨간 립스틱으로 얼굴이 모두 가려질 때까지 적고 지우는 퍼포먼스의 기록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발견되는 윤정미의 주장은 작가, 여성, 어머니… 등의 특정 정체에 부합하는 사회가 제시하는 역할 행동이 있고 이는 익명적 행동에만 국한되기 때문에 이를 수행하려면 결국 자신의 본모습을 일부라도 가려야 한다는 아이러니이다. 작가 노트에 의하면 작가는 주어진 여러 역할을 감당하면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버티기', '견디기'였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윤정미라는 개인 고유의 특징을 은폐해야 하는 일이기에 힘든 체험이었다는 서술일 것이다. ●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은 개인의 고유성과 사회적 조건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이다. 가 암시하듯이 그는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고유성을 확인받지 못했다. 독자성이 작가의 최고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름이나 직업이 설명하는 정체성은 나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허용하는 정체성을 행세하며 살아가는 동안 실존이 개입되면서 나의 주관에는 언제나 잉여의 의미가 더해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정체성이란 완료되지 못하는 현재 진형의 프로젝트이다. 사회적 주체가 자신의 고유성으로 인해 정체성 확정이 불가능할 때 이 불확정성이 야기하는 감정을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세계가 독특하면 독특할수록 그만큼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로 얻어지는 감정인 외로움이란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의미들이 사회 공동체에 지배적인 의미들과 개연성을 갖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 그런데 작가가 「Hyunho and His Blue Things」에 등장하는 현호를 찾아가 현재의 상태를 다시 기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Hyunho and His Red Things, Seoul, South Korea」(2014)에서 우리는 현호의 관심 색상이 온통 빨강으로 전환되었음을 발견한다. 현호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실은 몰입이다. 필자는 이를 애착으로 읽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그리고 색상을 그의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읽었다. 색상은 아이에게 지정된 사회가 강요하는 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성 정체성의 자발적인 선언이기도 하고 현호의 고유한 주관적 세계가 타인과 구별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핑크와 블루 프로젝트」는 한 가지에만 꽂히는 과도한 애착이라는 등장인물의 유별난 특징을 가시화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동진은 어디선가에서 인생을 관통해서 유지되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게 된 현대의 주체들은 대신 그때그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라이프 스타일을 구매한다고 언급했었다. 파란색이나 핑크색 물품의 과도한 구매는 사회 안에서 그의 존재와 그를 제외한 나머지 타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임시나마 정체성을 정립한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층위가 덧붙여질 때 사랑은 정체성 역학에 변수로 등장한다. 모든 물건을 한 가지 색으로 구비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에게 색상은 사랑의 징표가 된다. 그가 지속해서 한가지 색상을 고집하고 그것이 사랑임을 선언하는 형식은 혹시 사랑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받는 메커니즘 때문은 아닐까? 그의 애착은 그리고 그는 사랑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타인으로부터 그의 과도한 됨됨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 내지 인정받는 기회를 생산한다. 어쨌든 시간을 가로질러 현호에게서 지속해서 발견되는 사실은 그의 과도한 애착 사랑선언 그럴 수도 있다는 사회로부터의 인정 기제이다.
윤정미의 「컬렉터 프로젝트」(2008)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에게만 허용된 장난감을 수집하는 어른들과 그들의 컬렉션을 한 화면에 넣고 촬영한 작업이다. 어른에게 장난감 수집은 사회 안에서 공적 관계를 맺는 동안에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 공적 석상에서 비인격 관계가 효과가 있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를 원한다면 감추기까지 해야 하는 미성숙의 상징이다. 작품 속의 컬렉터는 어른이라는 이름을, 그러한 주체성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키덜트의 취향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지워야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장난감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진다는 일은 이전에는 지워야 했던, 그러나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주관적 의미가 사회의 객관적 의미로 귀속되게 한다. 이렇게 사랑의 기능은 완료된다. 안옥현-소통은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 사진과 비디오 설치 작가 안옥현의 작품세계 또한 사회의 조건화와 사랑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작가 노트와 서문, 리뷰를 참조해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특정 감정을 일으키는 방식을 탐구해 왔는데 상당 부분 사랑을 소재로 주제에 접근한다. 이전 작업, 「But Not Too Much」 (2011)의 경우, 대중가요를 립싱크로 부르는 가수가 등장해 폭력적인 관계에서 상처 입은 연인의 노래를 부르고 그의 노래에 동화되는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감정이 점점 더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처럼 표출되는 문화를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는 이와는 정반대로 같은 주제에 접근했다. 여기서 그는 사랑의 이미지와 관련된 다양한 관점과 인식이 제시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거기서 사랑의 이미지가 느낌과 불일치하게 했다. 이 작품의 사진 연작에서는 사랑의 느낌이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충분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이 뉘앙스에서 저 뉘앙스 사이를 찾아 헤맨다」(2019)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실존은 이름이나 성별, 직위 같은 관념이 정의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동의 잉여를 남긴다. 개인이 상황에 따라 느끼는 정동은 천차만별이지만 그것이 맥락에 따라 구체적인 의미가 부여되면 정동은 감정으로 구별되고 고정된다. 이 지점에서 사회의 조건화가 개입되는데 신파가 그 예이다. 「But Not Too Much」에서처럼 슬픈 노래를 들려주면 우리는 자신의 기분을 슬픔이라 인정하고 노래가 보내는 신호에 맞춰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감정은 언어의 일종이다. 따라서 정동 부분은 소통될 수 없다. 반면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는 이러한 사회의 조건화가 무효한 상황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상담의와 여작가의 대화로 구성되었다. 대화에서 이들은 온몸에 문신을 새긴 여작가 애인의 매력, 그리고 실제의 관능을 그리고 싶다는 여작가의 소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에도 사회의 조건화를 암시하는 장치로 삽입한 2명의 여성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우스꽝스럽게 표현된다. 상담의와 여작가는 간간이 등장하는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들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가 간간이 자신들의 반응을 과장된 표정과 춤으로 대신한다. 여작가가 사랑을 모호하게 표현할 때마다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을 짓거나 끝내 상담의가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모르~' 를 노래하며 사랑의 달콤함에 푹 빠져버린 여성의 관능적 몸짓처럼 흐느적거리는 춤을 선보인다. 이 여성들은 마치 그리스 비극에 등장할 법한 코러스나 싸구려 연애소설의 화자처럼 제시된 무대에 대하여 여작가의 반응 혹은 관객의 반응으로 무엇이 적절한지 강요한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속 상담의와 여작가의 소통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언제나 빗나가는 방식이 그러한데 다음은 축약, 편집한 작품의 녹취록이다. 상담의: 그분의 매력이 무엇이 있을까요? 문신 말고요. 여작가: 문신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그 자체가 매력이라… 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기억에 남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재현할 때 실수는 표피를 그리는 거죠. 아름다움은 문신 이미지 위에 있지 않아요 … 그런 게 관능 아닌가요? 상담의: 문신 자체가 매력이어서 문신에 대한 기억이 관능적이라는 말인가요? 포르노를 보시나요? 여작가: 선생님은 포르노가 외설스럽나요? 모두 정형 안에서 패턴화됐는데도요? 하아~. 너무 즉각적이고 틀에 박혀 있어요. 정말 외설스러운 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감정인 거죠. 상담의: 환상을 좇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닐까요? 여작가: 얼마 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 한 배가 들어오는 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어요. 거대한 것을 갑자기 대할 때 무릎을 꿇고 복종하고 싶은, 그 대상을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상담의: 옷을 벗어요. 여작가: 네? 상담의: 아니요. 제가 좋아하는 어느 소설 속 남자 상담의가 즐겨하는 말을 제 목소리로 한번 소리 내 본 겁니다. 그는 여환자를 만날 때마다, 연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죠. 여기서 이 두 사람이 사랑하는 애인의 매력을 이야기할 때, 상담의는 이를 표상의 수위에서 소통하려 하고 여작가는 표상으로 불가능한 지점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는다. 여작가의 경우 문신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는 문신남이 살아온 시간이나 '무릎을 꿇고 싶다'와 같은 정동과 행동을 표현해 이해시켜보려 한다. 여작가의 관심은 사랑에서 '이름이 없는' 부분에 있다. 반면 상담의는 '문신에 대한 기억=관능'처럼 도식화된 추상 언어로 답을 듣고싶어한다. 여작가의 화법이 체험하는 시간과 같은 현상계나 정동과 같은 가상계와 관련된다면 상담의의 추상화된 관념은 정작 소통 당사자와는 거리를 가진, 상징계에 해당할 듯하다. 여작가는 패턴으로 환원된 '명사'는 외설적인 이라는 '형용사'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상담의의 그다음 대답은 더 가관이다. 그는 '옷을 벗으라'는 말을 심지어 남의 문장을 제 목소리로 흉내 낸다. 어쩌면 그에게 대화란 글자의 조합을 자신의 아바타처럼 대신 상징계로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 방법으로는 소통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데도. ● 애초에 여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것이 정형화된 패턴이나 관념 너머의 주관적 실존인데 여작가와 전혀 다르게 관념으로 사고하는 상담의가 여작가의 세계에 접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를 루만은 "주체가 자신의 주관성을 선험적 진리에 관념을 매개로 일을 해결하는 근대 관념론적 사고방식에 모순이 내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근대인인 상담의가 상담의라는 공적이고 전문가적 주체 부분만 행세하려 할 때 그는 여작가와 정동적 교감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모순이 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끄트머리에는 마치 실패를 보여주듯이 상담의가 어깨에 문신을 새긴 채 축 늘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문신이 쉬베의 「그림의 기원」 이미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림의 기원」은 먼 길을 떠나는 애인의 본질을 벽면에라도 잡아 두고 싶은 어느 여인이 벽면에 드리워진 애인의 그림자 외곽선을 따라 실루엣을 그리는 장면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데리다는 이 여인이 그림을 그리더라도 표상인 그림이 애인의 본질을 담아낼 수 없음에 주목했다. 애인, 남자라는 관념은 그림을 통해 소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애인과 함께한 시간들, 애인의 매력은 그림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미지라는 기표는 정작 애인의 기의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회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녀는 계속해서 더 나은 버전을 만들기 위해 계속 그리기를 반복할 수 있고 성공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차연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여작가의 본질을 이해하기는커녕 남의 말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면서 여작가에게 환상을 추구할 용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냐며 사회의 객관적 의미인 관습을 흉내 내라고 부추기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그는 데리다가 지적하는 방식으로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 여작가가 상담의에게 설명에 실패하는 이유는 상담의가 화성인이고 여작가가 금성인이어서가 아니라 소통은 이해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 세계는 원천적 상호 이해 불가의 신경생리학적 조건을 가진 "블랙박스"다. 우리는 글자를 조합해 글을 쓰거나 발화해 소통하려 하지만 그것은 각자 나름의 자아 중심적인 의미체계를 토대로 한 조합일 뿐이다. 타인도 자신이 아는 의미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의미론을 통해 소통 불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먼저,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하나의 사회적 행위와 다른 하나의 사회적 행위들의 연쇄라 하자. 사회적 행위는 2명 이상의 상호작용이 관련되어야 하므로 소통으로만 실현된다. 소통은 한 명의 행위자가 자신의 의도를 주관적 의미로 조직한 정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로 시작한다. 메시지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파악되어야 하므로 의미가 통해야 한다. 하지만 대화 상대가 나의 의도를 이해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소통은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나의 의도를 상대방이 이해한다는 것, 소통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미래에 상대방의 행위를 관찰했을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어서 시간이 걸리는 사안이다. 옷을 벗으라는 소설 속 남자의 말, 즉 표상은 그것을 체험하는 관찰자, 여기서는 여작가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여작가가 생각하는 '옷을 벗으라' 와 상담의의 '옷을 벗으라'는 의미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때 소통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메시지를 전달받은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 것이 의미다. 소통의 알고리즘을 적용해보면, '옷을 벗으라'는 메시지를 통지받은 여작가는 통지된 정보를 인지하고 (수신받은 정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을 과거 경험을 토대로 선택해 자신만의 새로운 정보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그제야 비로소 여작가에게는 상담의의 말이 의미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계기가 마련된다. 여작가는 그의 말이 의미가 '있다/없다'를 선택하고 그때서야 후속 행동, 혹은 대답이라는 소통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소통의 과정에서 정보의 수신자인 여작가는 소통의 지평으로부터 일부 요소만 선택해서 상담의가 전달한 정보의 의미를 추측할 뿐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우리 각자는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메시지를 수신하는 이는 자기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뿐, 소통의 의미는 수신자가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수신자가 이해한 의미의 총합은 축적되어 사회적 의미를 구성한다. ● 이러한 서술은 마치 소통이나 그 결과로 구성되는 사회의 객관적 의미가 전적으로 메시지를 전달받는 이에게만 달려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아니다. 사회적 의미가 작동하는 비인격적인 (공적인) 관계의 소통에서는 나의 의도가 이해되고 상대방이 구체적인 행위를 따르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적 업무를 보거나 구매를 하거나 등등 비인 격 관계에서는 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관은 유보되고 어머니와 여성에게 요청되는 역할 행동을 따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상담의과 그의 사전에 없는 정동을 소통하려는 여작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각자가 아는 의미의 총합과 관찰자에게 이해되는 의미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객관적 의미의 총합 이렇게 세 집합의 교집합만큼만 의미가 통한다.
실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상호주관성 ● 소통이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윤정미의 작업 그리고 안옥현의 작업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내가 아는 의미의 집합과 사회의 객관적 의미의 집합은 교집합만 있을 뿐 일치하지 않는다. 이 두 집합의 차이가 소통이 불가능한 정도이고 누구나 여집합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소통의 공동체로부터 구성적으로 소외된 존재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개인은 자신의 주관적 의미가 사회라는 객관적 의미의 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같다. ● 인간의 이러한 존재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 작동 방식은 「핑크와 블루 프로젝트」에서 현호의 경우처럼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을 타인과 나누고 타인 속에서 확인" 받음으로써 드디어 애인과 나의 의미가 사회와 이어지는 알고리즘을 따른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의 경우 사랑의 작동 방식은 역설을 통해 드러난다. 상담의와 내담자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담의 궁극적인 목표가 내담자의 고민이 유별남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확증하고 내담자의 이후 활동이 사회질서 안에서 원만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고민을 건설적인 계획으로 전환하는 일, 이른바 '승화'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상담의와 내담자가 서로에게 공명하고 이를 통해서 타인의 세계에 들어가 그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담자의 주관적으로 체계화된 타인의 세계 준거를 확증하는 절차로서 내담자의 주관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내담자는 상담의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겪었던 특정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전이라고 부르고 특히 상담의가 내담자에게 동화될 때 이를 역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니 「얼굴 없는 미녀」(2004)와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해야 하면서 전문직업인의 행동강령을 따라 여작가를 거짓으로 사랑해야 하는 상담이란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 속 상담의는 여작가를 사랑하거나 여작가의 주관적 세계가 의미 있음을 확인하기는커녕 공명도 하지 못했다. 하긴 상담의가 자신의 내담자 모두를 사랑할 수도 없을 터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여작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상황이 상담과 사랑을 가르는 경계선을 작품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다. 우리는 타인과 공명을 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그 타인으로부터 그의 "자아 중심적 세계 설계의 확증"이 요구되는 순간이 뒤따라온다. 이때 상대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비인격관계로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대신에 사랑을 선택한다면 그는 확증하기 위해 타자의 세계로 침투하고 그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해야 한다. 이는 루만의 경우 상호침투, 바디우와 정신분석의 경우 간주관성이라 명명되는 이전까지의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과만이 가지는 배타적인 관계에서만 형성되며 그때서야 우리는 그 관계를 사랑이라 부른다. 주관이 타인에게서 확증받을 수 있다면 드디어 사회와 개연성을 갖겠지만 역으로 사랑의 실패는 곧 사회와의 동일시에 다시 한번 실패하고 이전보다 더 깊은 존재의 상실로 빠지는 일이다. "그를 낳은 부모도 그를 가르친 선생님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 그 성공은 오로지 둘만의 관계에서만 가능하고 그 실패는 오롯이 자기 몫으로 되고 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할 때 상호침투로 인한 주체성의 소멸은 자발적인 소멸이다. 이는 나의 준거자를 그의 그리고 그의 준거자를 내가 받아들여 지금까지는 바깥이었던 사회적 의미와 개연성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주관성, 혹은 상호침투가 사랑하는 이의 일부를 서로(스스로) 파괴하기에 인간의 원천적 소통 불가의 생리적 조건을 해소로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로서의 사랑과 예술 ● 사랑이 상호침투의 결과라는 지점은 존재론자인 바디우도 동의하는 바이다. 상호침투의 결과로 애인의 의미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두 사람이 하나의 유닛이 되어 같은 방향, 1인칭도, 두 사람 중에 나은 방향도 아닌 독특한 관점을 만들어내는 절차이다. 정형화된 관습이자 객관이라는 기존의 앎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그에게 사랑은 세계에 대한 진실로 향하는 실존의 프로젝트이다. 이때 둘만의 독특한 관점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순간을 진리가 현현하는 순간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과학, 정치 그리고 예술과 함께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4가지 중의 하나로 꼽았다. 그의 주장의 근거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자신을 재창조한 시점으로 진리를 체험하는 시간만 허용된다는 점, 그리고 사랑을 예술에 비교하면서 예술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체험하는 시간을 허용한다는 주장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와 관련해 사변적 실재론에서도 지금까지의 거대 서사가 칸트의 이론이 맞는지, 혹은 헤겔의 말이 맞는지 고민하면서 단 한 사람의 더 정확한 시각을 찾아다녔지만, 칸트나 헤겔이나 자신의 세계만 볼 수 있다는 물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다른 각도의 주관들이 교차 참조되었을 때 그나마 진리에 다가갈 잠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바디우의 둘만의 독특한 관점을 사변적 실재론은 다수의 독특한 관점으로 대체하는 차이가 있다 할 것이다. 한 사람 이상의 주관에 대한 변용에 진리에 다가갈 잠재성을 걸겠다는 판단은 이들 모두 유사하다. 이 지점은 루만이 이야기하는 예술의 정의하고도 호환된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우리가 인지는 하는데 딱히 표현할 수도 없고 그래서 해결하기도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데 예술이 바로 그 지점을 직관과 감각을 활용해 표현하고 잠재했던 대안적 사고를 공식적 소통망에서 회자되도록 한다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작품이 행간을 표현함으로써 기존의 매체가 소통하지 못하고 잠자던 관점을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보완적인 소통매체로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주관을 형식으로 전환해 작품에 담아 제공하며 관객은 작품을 매체로 서로서로 소통하면서 교차를 한다는 것이다. 2인 이상의 주관이 상호침투하는 사랑이 개인의 세계관과 사회의 세계관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는 기능을 했다면 그것이 다수의 세계관의 교차 참조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은 세계를 조금 더 정확하게 파악할, 아마도 실재에 한발 더 다가가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나가며 ● 2인 이상의 주관이 상호침투하며 실재에 다가갈 잠재성. 잠재성은 예술과 사랑이 나와 타인의 주관적 세계를 매개하는 매체처럼 작동했기에 가능하다. 미학에서 매체는 내용을 담는 담지체로서 물질이고 감각적 직관이 일어난다고 해석되어왔다. 혹은 대중매체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매체론을 쓴 디터 메르쉬는 이 모두 타자의 존재가 있어야 하며 타자는 처음에는 접근을 거부하지만, 그것의 전달, 상징화, 보존 이동 소통의 보장을 위해 필요한 제3의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한다. 사랑은 주관적 세계관을 활성화하고 타자였던 애인과 함께 만드는 다 자라는 대안적 관점이 사회에 진입하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주관과 타인의 주관을 깊이 고민해보는 예술의 절차와 동일한 활동을 하는 셈이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철학들이 통해 추구했던 세계의 실재를 향해 한발을 내디딜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는 윤정미와 안옥현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들의 작품을 매개로 그리고 매체가 작동하는 알고리즘의 순서를 따라 이들 예술가들의 주관적 논리와 형식은 기존의 사회적 의미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교차 참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예술과 사랑이 그들의 시각을 나와 비교하는 기회, 원한다면 나의 주관을 재창조하고 제3의 관점을 만들어낼 잠재성을 약속한다면 예술과 사랑은 서로의 시차 적응과 다르지 않다. 상대방의 시각이라는 대안을 서로에게 (스스로) 침투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더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온전하게 관찰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사회가 현재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어떤 관점에 대하여 대안을 교차 참조할 잠재성의 실천이다.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진화에서 필수적인 생존 전략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더 많이 시차 적응 혹은 사랑해야 할 것이다. ■ 신현진
Vol.20210730e | 시차적응 - 사랑-안옥현_윤정미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