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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네이버 사전 예약필수
스페이스 소 SPACE SO 서울 마포구 동교로17길 37(서교동 458-18번지) Tel. +82.(0)2.322.0064 www.spaceso.kr
스페이스 소는 7월 22일 부터 8월 22일까지 조성연 개인전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 A Complete Coincidence』을 개최한다. 2014년부터 진행해온 'still alive project 스틸 얼라이브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던 '지고맺다'와 'still alive' 연작과 맥을 같이하는 신작 총 22점을 소개한다.
1. 단서들 ● 그에게 나는 사진이 주관적이라고 했다. 그가 찍은 사진을 앞에 두고, 그것의 크기며 그것이 놓인 자리며 그 안에 사진 찍힌 대상의 생김새를 하나씩 살폈다. "사진의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 버거(John Berger)는 말했는데, 그게 내가 모르는 사진의 속사정인 셈이다. 어떤 대상이 사진으로 남겨진 데에는, "그렇게 골똘히 뭔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행위가 앞선다. 이를테면, 전시장 흰 벽 안에 아주 작은 크기로 자리 잡은 사진 『골목안 회색 대문과 벽돌』(2020)은, 녹슨 철문을 고이고 있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벽돌만큼 한 자리에 서서 저 장면을 골똘히 바라보던 사람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회색 철문과 시멘트 담벼락, 붉은 점토 벽돌과 회색 시멘트 벽돌, 담과 바닥 틈새에 끼어 있는 이끼와 맨 아래 놓인 벽돌 가장자리에 희끗희끗 묻어 있는 녹색 페인트 자국, 살짝 기울어진 바닥에 회색 철문이 부채꼴로 그려놓은 궤적, 이 모든 단서들 앞에서 그가 멈춰 섰을 테다.
2. 바라보는 행위 ● 조성연은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에서 그가 골똘히 바라본 풍경과 정물에 대한 특유의 사진적 접근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대상과 관계 맺는 태도에서 먼저 드러나는데, 그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응시하고 있고 또 그것과 어떤 경험을 공유하는지에 대해 묻게 한다. 그의 사진을 보면, 사진은 어떤 찰나의 순간을 기록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처럼 들리는지 스스로 되묻게 한다. 나는 그가 찍은 사진이, 적어도 지금 우리 앞에 펼쳐 있는 이 사진들이, 어떤 순간을 기록한 것이라는 사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내막을 나는 상상했고, 이 사진에는 아주 많은 시간의 순간들이 먼지처럼 두껍게 쌓여 있으며 그 "오래된 형태"를 골똘히 바라보는 사람의 행위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결국 저 사진 안에 담긴 장면은 연속하는 시간의 일부를 기록으로 떼어온 것이기 보다, 그 연속해 온 현실의 시간과 상관 없이 (어떤 홀연한 순간에) 제 스스로 현존하는 마술적 형태임을 환기시킨다. 조성연은 그것을 대상과의 "교감"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파편」(2021)에서, 그는 무엇을 바라봤을까? 저 매끄러운 평면을 뚫고 보풀처럼 생겨난 표면의 요철인가, 그로 인해 모순처럼 드러나버린 평면(너머)의 내부였을까, 아니면 채도와 명도가 교차하면서 비현실적으로 강조된 추상적인 감각이었을까? 『날카로운 붉은 철문』(2020)은 그가 붉은 색의 질감을 가진 어떤 대상을 보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힐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가 저 모호한 형태 안에서 무엇을 알아보았는가가, 이 사진의 "진짜 내용"인지도 모른다. 끝내 밝혀질/밝혀낼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그것의 크기와 모양과 질감과 무게와 같은 것을 결정하는 사진의 존재 방식이 대상에 대한 그의 보기 방식을 증명해 줄 것이다. 『시간의 파편』과 『날카로운 붉은 철문』에서, 조성연은 현실의 어떤 대상이 제 외부의 환경과 제 내부의 물성을 교차함으로써 스스로 구축해낸 (또 다른 상상적 형태로서의) 크기며 모양이며 질감이며 무게까지 골똘히 바라보다가 그것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서 모호한 추상적 형태로 존재하게 될 어떤 단서들을 알아차렸을 테다.
그의 바라보기는 원대한 세계의 선명한 윤곽을 살피는 데 있지 않고 진부한 일상의 불완전한 파편들에 대해 유독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수직으로 서 있는 사진 속 형태가 의심스러운 『불안정한 균형』(2021)을 보면, 바라보기의 행위가 빚어낸 저 불가능한 형태의 만듦새를 쉽게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골목안 회색 대문과 벽돌』에서 발견된 시각적 조형의 긴장감은 『불안정한 균형』에서 각각의 변형된 물성을 갖게 된 돌의 파편들을 조심이 쌓아 올리는 행위의 긴장으로 다시 반복된다. 그는 동네를 걷다가 주워 온 돌 세 개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의 집에 있어 왔던 둥근 구 모양의 돌 하나를 쌓아 올려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중력을 거스르며 도저히 서 있지 못할 것 같은 형태로 서게 했다. 그것은 회색 대문과 담벼락을 배경으로 삼아 알아채기 힘든 틈새의 검푸른 이끼와 기울어진 바닥을 단서로 어떤 (현실의) 균형을 성취해낸 벽돌 네 개의 현존에 대한 동일한 사유다.
언뜻 거미줄에 사로잡힌 곤충의 몸통을 연상시켰던 『기울어진 나무와 전깃줄』(2021)은, 사진에서 조금 물러나 봤을 때 천천히 사람의 얼굴이 보이다가 그것의 물성이나 양감을 가늠하면서 불이나 바람의 추상적인 형태를 떠올렸다가 하는 끝없는 이미지의 연쇄를 불러온다. 바라보는 행위는 이처럼 그 대상을 자신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아서, 형태를 눈/손/마음으로 다시 매만져 그 대상과 나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일련의 (관계에 의한) 형상을 출현시킨다. 조성연은 어느 때에는 이 감각을 일상에서의 걷기로 체화시켜, 그 무심한 행위로 삶의 면면을 골똘히 바라보며 현실에 깃든 숱한 형태들을 신중하게 발견해낸 것이다. 그렇게 골똘히 뭔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신중하다. ● 사진의 신중함에 대해서는 존 버거가 내밀한 통찰로 자신의 경험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Photocopies)』(1996)을 보면, 첫 장에서 존 버거가 자신을 찾아온 한 벽화 복원가를 설명하면서, 그녀가 동물들의 세계를 그리며 동물들과 살고 있다 했는데 그들 사이의 서로만 아는 비밀-교감-에 대해 말하다가 "그녀가 동물들을 택한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어진다"고 썼다. 그리고, 그녀의 카메라로 자두나무 곁에서 둘은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2분에서 3분 사이의 노출시간 동안 그녀의 카메라를 마주하고 서 있던 두 사람의 형상은 "바람에 흔들리는 자두나무보다야 덜했"지만 불완전한 파편처럼 비밀스럽고 신중한 모습으로 사진에 가서 찍혔다. 이 글의 제목은 「자두나무 곁의 두 사람」인데, 마치 한 장의 사진 제목 같은 인상을 주면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사진에서 볼 수 없는 사진의 진짜 내용이며 그것은 사진 외부에 있음을 알게 한다.
3. 호응하는 형태들 ● 조성연은 일상에서의 뭔가를 바라보는 행위를 매개로 사진을 바라보는 혹은 (존 버거를 참조한다면) 사진을 읽는 경험에 다시 다가간다. 『무대 위 레코드 판, 극락조, 공』(2021)은 집 안의 물건들을 가져다 재배열하여 찍은 사진으로, 이 행위는 그가 동네를 걸으면서 풍경을 바라보며 얻은 낯선 감각과 그 경험을 반복한다. 사진에서는, 오래된 레코드 판을 측면만 보이게 위로 쌓아 올려 표면의 낡은 질감이 육면체의 두 면에 대한 양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지체 삼아 다시 둥근 구 하나가 바위처럼 균형을 잡고 서 있으며, 그 주변으로 빨간색 반투명한 종이와 마른 식물과 초록색 천과 회색 테이블보 등이 힘의 균형을 증명하면서 서로가 호응하고 있다. 조각처럼 정지되어 있는 이 사물의 형태는, 잘 짜인 각본처럼 미리 계산된 연출이기 보다는 무심코 이끌려 나와 어떤 형태가 되(지 않)기 위한 공존을 감수한다. 조성연에게는 완성된 이 사물의 형태가 소리 내며 회전하는 오르골처럼 보였던 것 같고, 나는 마루에 서있는 무용수의 들숨을 보는 듯 했다. ● 나는 그의 사진에서 종종 어떤 이의 행위를 목격했던 것 같다. 그가 오랫동안 몰두해 왔던 정물 사진은 궁극의 집중과 긴장을 불러올 정도로 대상에 대한 골똘한 시선이 남달랐지만, 그 시선에 대한 신뢰가 사진 찍힌 대상과 삶을 공유하는 일련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진에서 알게 된다. 예컨대, 『지고 맺다(Waxing and Waning)』(2018)에서 그는 2015년부터 2018년에 걸쳐 제작한 사진 연작을 소개했는데, 그가 경작한 식물의 시간에 대한 기록에 가까워 보였다. 그 이전부터 조성연은 스스로 밭을 가꾸고 식물을 경작하는 행위와 어떤 대상에 대한 사진 찍는 행위를 중첩시켜, 삶 속에 출현하는 일련의 형상들에 대한 바라보기의 사유를 지속해 왔다. 그랬던 그가, 최근에는 직접 경작하는 일을 두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풍경과 대상에 대한 사유 자체로 경작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나란히 흰 벽에 놓인 사진들은 서로 상관 없어 보이지만, 나는 사진의 외부에 있을 지도 모르는 사진의 진짜 내용이 이 무심한 벽 표면을 관통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본다. 『빛나는 교감』(2021)과 『어떤 오후』(2021) 사이의 정황을 보면, 이 둘은 상대적인 차이를 주고받는 가시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응집한다. (먼 혹은 가까운) 바라보기의 방법을 둘로 나누고, 형태의 윤곽을 지각하는 조형적 감각을 구별한다. 예컨대,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다. 하나는 덩어리를 가졌고 다른 하나는 선으로 존재한다. 하나에는 색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과 어둠을 나타낸다. 이 둘은 서로를 구분해 주면서 함께 호응한다. 그런 식으로, 『붉은 공, 나무 토막, 삼각형, 식물의 기묘한 만남』(2021)과 『작고 유연한 움직임』(2020)과 『상처난 나무』(2021)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관통하는 "임의의 것"을 공유한다. 설명이 불가능한 임의의 파편적인 사물들을 가져와 대상의 실체를 낱낱이 바라보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형상을 상상해내듯 매만지는 일련의 과정은, 이번 전시에서 조성연이 사진을 통해 (보이지 않는/드러나지 않는) 사진 외부의 서사에 대한 현존에 주목해 보려는 중요한 태도라 할 수 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소설 『여름비(La Pluie d'été』(1990)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에르네스토가 책을 읽게 되는, 심지어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된 책을 읽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뒤라스의 소설에서, 주인공 에르네스토는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거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이러한 예외적 읽기의 태도는, 조성연이 사진에 접근하는 신중한 태도와 어떤 면에서 조금 닮아 있다. 그는 풍경이건 정물이건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되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투영해 그 대상에 (알 수 없는) 서사를 입힌다. 그 서사는 몸에 어떤 문자처럼 각인돼 임의의 사물을 물질적인 차원으로 끌고 가 그것으로 전혀 다르지만 동일한 서사를 끊임없이 엮어낸다.
『구겨진 화병』(2020), 『사소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2021), 『5층 석탑』(2021), 『마른 가지, 실, 마치 거미줄처럼』(2021)은 그러한 사진의 내막을 가졌다. 에르네스토가 읽었다는 불탄 책에 대한 경험처럼, 조성연은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 것에서 불확실한 서사를 읽는다. 존 버거가 "사진의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듯이, 조성연은 그가 사진 찍을 대상들에게서 결코 보이지 않는 서사/내용을 현존시킨다. 그것이 그러한 바라보기의 행위를 통해 사진이 되고, 그 시선에 호응하는 형태들이 사진의 형식을 만든다. 그에게 내가 사진은 주관적이라 말했던 것도,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형태의 기록이라는 사진에 대한 혹은 사진 읽기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조성연은 긴 시간 동안 집 안팎을 이동하며 풍경과 정물 사이를 오갔던 것처럼, 그렇게 골똘히 뭔가를 바라보는 자신의 신체에 감각을 각인시켜 사진이 갖는 일련의 태도를 신중히 드러낸다. ■ 안소연
Vol.20210723b | 조성연展 / JOSEONGYEON / 趙晟娟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