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의 세상나들이 2-사십 대, 서성거림

이범주展 / LEEBUMJU / 李範株 / painting   2021_0707 ▶ 2021_0713

이범주_천개의 노을_순지에 분채, 먹_130×97cm_2021 김포의 어느 평야를 지나면서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그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흩어지고 퍼지고 모였다가 속살거리고 다시 흩어졌다. 달리는 내 자동차 위로 노을은 그렇게 나를 따라 왔다. 나를 먼저 떠난 너희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나는 먼저 떠난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이젠 너도 천개의 노을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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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 홈페이지_youarewinner1.cafe24.com 인스타그램_@GWJJ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 blog.naver.com/gallh

1.intro: 차라리 알을 깨지 말 것을 ● 아빠는 뒷마당 언덕에 자라난 억새풀을 베다가 억새풀들 사이에 숨겨진 박새 둥지를 발견하였다. 뱀의 위협을 피해 박새는 억새풀의 상층부에 둥지를 틀었다. 아빠는 풀 베기를 멈추고 살포시 둥지를 숨겨두었다. 2020년 코로나19로 전세계는 활동을 멈추었고 아빠의 회사도 멈추었다. 아빠와 가족들은 오랜만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취침시간도 빨라졌고 집안에 거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라리 알을 깨지 말 것을...' 지난 해 억새풀들 사이에서 발견한 둥지 안의 새 알 꿈을 꾸었다. 아빠는 알을 깨고 나온 세상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알을 깨지 말 것을...'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가끔 들었다. 태양이 등뒤를 따라오고 아빠의 다리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휘청거리곤 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노란 빛 슬픔으로 물들고 아빠의 눈가도 촉촉히 젖어 들었다. 어느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 대 / 사십 대 들녘에 들어서면 /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시인의 「사십대」중에서)

이범주_숨죽인 시간_순지에 분채, 먹_30×46cm_2021 사십대에 나는 숨쉬는 것이 힘들었다. 아픈이의 가족이었고, 먼저 죽은 자들 사이의 살아남은 자였다. 아이의 엄마여야 했고 내 엄마의 딸이고 며느리여야 했다. 사십대는 그렇게 나에겐 숨죽인 시간으로 흘러 갔고 고요함으로 쌓였다.
이범주_bottom up D_pupple_순지에 분채, 먹_35×83cm_2021 나에게 바닥은 통찰과 영감의 대상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져 층과 층사이를 메꾼다. 나는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시간 속에 묻힌 사연들을 끄집어 내어 기록해 본다. 오늘의 나의 기록은 Deep pupple이다.
이범주_bottom up D_green_순지에 분채, 먹_35×83cm_2021 뭉터기로 피어난 클로버 아래에 소나무 잎이 켜켜히 쌓여 있고 무심히 툭툭 떨어진 솔방울과 나뭇가지들... 무심했던 내가 너희를 마음에 두었다. 그리고 한없이 바닥으로만 향하는 너희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오늘의 나의 기록은 Deep green이다.
이범주_bottom up D_yellow_순지에 분채, 먹_30×46cm_2021 노란 빛은 그 안에 슬픔이 뭍어 있다. 아직은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도 개나리는 노란 꽃을 피운다. 개나리는 그래서 숙명적으로 봄을 열어야 한다. 피다가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2.have+p.p: 나의 지나온 사십 대와 지금 사십 대들 ● 이번 전시는 지나 온 나의 사십 대와 지금 사십 대를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사십 대에 들어서면 부모님들이 아프거나 돌아가시기 시작하고 여자들은 갱년기를 맞이하고 자녀들은 사춘기에 접어든다. 돈도 제일 많이 벌고 소비도 제일 많이 하는 나이다. 직장에서도 승진을 하거나 누락되거나 하는 나이다. 인생이 고달프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손에 들고 먹지도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지나 온 나의 사십 대였고 지금 사십 대를 살고 있는 후배들의 상황일 것이다. ● 나는 사십 대의 마지막 해(49살)에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선택은 나에게 행운이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마도 뒤 늦게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엄청 열심을 내서 그 선택한 것을 한다. 평생교육원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든다. 특히 학점 반에서 시험 때가 되면 중년의 여성들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시험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건 젊은 시절 성실하게 다 해내지 못한 공부에 대한 열망일 것이고 이제는 선택할 그 무엇이 별로 없음에 대한 필살기일 것이다. 뒤 늦게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추격하는 맹수의 눈빛이 있다. 마지막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달리는 처절하면서도 절박한, 슬프면서 아름다운 눈빛이다. 그들에겐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고 계산하고 망설이며 계산기를 두두릴 시간이 없다. ● 사십이 넘으면 인생의 유한함을, 저하되는 체력과 흰머리와 노안과 기억력 감퇴로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마음 한 켠에 겸손이 들어 오고 주위를 둘러 보며 자기 삶의 절반을 결산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연하게 고민하게 된다. 나는 마흔 아홉 봄날에 우연히 미술을 만났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로 심심하지 않은 사십의 마지막 해를 보냈다.

이범주_먹다 버린 숲_순지에 분채, 먹_71×95cm_2021 먹다 버린 포도 씨앗으로 숲을 이루었다. 굳이 돌보고 가꾸지 않아도 씨앗을 움트게 하는 환경이 만들어 지면 생명은 순환하고 시간은 흐른다. 먹다 버린 숲에 우리가 갇힌 건가?
이범주_♭-SKY,플랫 스카이_순지에 분채, 먹_80×80cm_2021 바닥으로 가라 앉은 편평한 하늘~~나는 바닥에서 하늘을 날고 싶었나 보다. 내가 찾던 파랑새는 편평한 하늘에서 바닥을 날아다니고 하늘은 바닥으로 덥혔다. 아름다운 혼돈이다.

3.Have been+~ing: 서성거림 ● 다행히 습득이 빨랐던 나는 운 좋게 2019년 첫 개인전을 하였다. 이후 홍익대학교 문화 예술경영 대학원에 진학했고 지금은 예술경영에 관한 이론 공부를 하면서 학점 반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다. 사십의 마지막 해에 선택한 나의 결정이 50대의 나의 삶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50이후의 삶이다. ● 내가 살아 온 사회는 어떠한 특성이 개념화되면 자기부정을 통해 동일성을 향해 목표를 잡고 살아야만 했다. 예를 들면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목표이고 공부를 못하면 자신의 특성을 부정하고 공부를 잘해야 하는 목표로 살아야 한다. 다른 차이들은 극복 대상이었고 극복하지 못하면 루져가 되는 사회였다. 우리는 사유의 이미지에 갇혀 극복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평생을 살다가 불안하게 죽음으로 내닫는다. 그러나 사십 대에 나는 "존재는 수많은 차이를 가진 잠재성의 존재(다양체)"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이를 무시한 동일성은 폭력임을 알았고 그리고 나는 아팠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사회에 '내가 나로 살기위해' 내 몸은 스스로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몸이 나에게 주는 신호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로부터 나는 자신과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진정 나로 살아 보겠다고' 커밍아웃을 했던 기억이 난다. ● 그리고 올해에는 학점반의 그림 친구들 4명과 개인전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나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그림 친구들과 전시회 구경을 갈 것이고, 해마다 전시회를 열어 보려고 노력 할 것이다. ● 사십 대의 마지막 해에 내가 만난 그림세상에서 이렇게 나는 서성거려 본다. 서성거림은 정확한 목표나 방향성이 없다. 그저 희미한 가능성으로 남아 저 너머에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기웃거림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나의 서성거림이고 기웃거림이다. 내가 나를 존중하기에 그래서 너무 소중하고 미술 세상에서 만나는 스승과 친구들이 또한 아름다운 인연들이다.

이범주_서성거림1&서성거림3_캔버스에 유채_45.3×53cm×2_2021 서성거림1: 새 순이 초록으로 덮이고 아침의 햇살이 너를 감싼다. '너는 버려진 게 아니야~~ ' 라고 나는 말했다. 서성거림3: 연결하고 확장해서 더 큰 그림이 되고 싶었다. 정하지 않은 모양에서 더 큰 정함이 되고 무심한 마음에서 더 큰 사랑이고 싶었다.
이범주_서성거림2&서성거림4_캔버스에 유채_45.3×53cm×2_2021 서성거림2: 잘린 나무위로 나무들이 자라고 하얀 달이 걸려 너를 비춘다. 밤에는 달, 낮에는 해. 우리는 자연을 본 떠 그렇게 양분화된 개념을 만들어 낮과 밤, 여성과 남성,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었다. 서성거림4: 늦은 가을 눈 쌓인 나무 고아원에 너는 버려졌고 버려진 나무들과 어우러져 풍경이 되었다.

4.outro: Art society ● 나는 이 사회가 은유가 헤엄치는 예술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직접적이고 거칠고 경쟁적인 사회여서 인생을 피로하게 만든다. 나도 50여년을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 섞여 살아왔다. 어느 누구도 힘들지 않은 상황이 없고 살다 보면 늘 문제의 연속이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다가 나이가 들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실을 외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에만 직면해 살기엔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해 진다. 그런 팍팍한 현실에 예술은 다르게 다가간다. ● 한 번 정제되고 가공 되어 진 예술적 작품과 행위가 간접적으로 우리 인생들에게 쿠션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인생에 쿠션 하나쯤 가지고 산다면 그렇게 사는 일이 힘들거나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나의 내면을 채워 주고 즐거움을 주고 소비사회의 부유하는 정신을 가라 앉혀 주는 도구이다. 자신의 작품을 더 밀도 있게 완성시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 자본주의의 원리와는 맞지 않는다. 인풋과 아웃풋이 다르다. 자본주의에서는 하나를 넣으면 최소 하나이상이 생산 되어져야 소비사회를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 행위는 꼭 그렇지는 않다. 작가가 만족해야 끝이 난다. 나는 그것을 작가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 동양화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전신"(傳神)이라는 용어를 쓴다. 전신이란 인물이나 사물이나 정신 본질을 표현함을 가리킨다 그림에는 작가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꼼꼼히 잘 들여다 보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있거나 대립해야 할 때도 우리는 작품으로 말할 수 있다. 기쁠 때는 기쁨을, 행복할 때는 행복을, 사랑 할 때는 사랑을, 표현한다. 나는 그런 사회를 은유가 헤엄치는 예술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 나에게 그림은, 음악가에게는 작곡이고 무용가에게는 춤이고 소설가에게는 글쓰기처럼 나를 은유적으로 표현해내는 도구이다. 그리고 사십 대의 터널을 지나고 오십 대 중반을 들어서면서 그림은 나의 반려 물이 되고 있다. 식탁 위에도, 가방 속에도, 찻잔 안에도, 차 안에도 그림 흔적들이 나와 함께 한다. 그림은 인생 후반전의 나의 삶과 함께하는 반려 그림이 되어 간다.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그림이어서 고마운 일이다. ● 나의 그림을 보고 일상에서 각자가 느꼈을 생각들을 함께 공유하고 느끼고 때론 위로 받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당신들의 그림친구 완두가, 2021.06.10) ■ 이범주

Vol.20210707c | 이범주展 / LEEBUMJU / 李範株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