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이연지 주최 / 아웃사이트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공휴일 휴관
아웃사이트 out_sight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35가길 12 GF (혜화동 71-17번지) Tel. +82.(0)2.742.3512 www.out-sight.net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지만', 돌아보면 주변의 많은 것들이 이런 모습으로 있었던 것 같다. 몸 어디에나 다 좋다고 하는 미심쩍은 음식점의 효능 문구는 권위 있는 출처 표시 하나로 믿음직한 변신을 꾀하고, 부지마다 건물이 가득해 보였던 어떤 곳은 '탁 트인'을 수식어 삼아 소개되고 있었다. 사실과 다르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그렇게 할 것이고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낀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면 될 것이다.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고 느낌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라면, 이 마음의 본 모습은 어떤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불경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을 뒤로하고 시야를 좀더 좁혀 본다.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는 힐링 스톤, 힘들 땐 연락하라는 다정한 말, 다른 날보다 조금 버거운 하루가 될 수도 있다는 오늘의 운세, 이 예시들 속에서 무엇이 믿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선택을 위한 효율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쳐내고 걸러 낼 테지만 이 마음은 효율이 아닌 것도 효율이라 여기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고 말하는 부조리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네, 아니오 라는 대답을 위해 확신을 위한 의심과 그 의심을 더욱 타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설득을 반복해왔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구조가 마치 합리적인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당하다고 느끼게 하는 어떤 지점에 대한 환상이 이를 강하게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은 배제되어있는 듯하다.
환상은 줄곧 믿음이라는 언어를 둘러서 자신을 불러낸 현실을 감춰왔다. 자신이 보고 따랐던 현실이 환상으로 만들어진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을 수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현실보다 차라리 환상으로 얼룩진 현실이 우리의 두 발을 허공에서 다시 지면에 붙들게 한다. 그러므로 환상과 연결된 현실을 합리적인지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무엇이든 자기 현실을 실제라고 느끼게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런 믿음과 환상의 긴밀한 그리고 기만적 관계 속에 있었다. ● 한편 믿음에 따른 소망의 크기는 숙고의 단계를 압축시키기도 하는데 대상에 대한 판단 여하를 막론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지지 혹은 맹신의 사례들이 그렇다. 특정한 사상이나 혹은 어떤 정보를 유일하고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장치들은 그에 대한 믿음의 완벽성을 강조한다. 특히, 더없이 완벽한 조건으로 치장된 빈틈 없는 외피를 드러내어 보이며 자신 이외의 것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전략이라 볼 수 있겠다. 신성한 가르침은 완벽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고 또 간절하게 원해야 그것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말하면 말할수록 그 실체는 가까워지지 않고 그저 모호하게 다가올 뿐이다.
다분히 느낌으로 파악되는 이것은 오랜 시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언어에 의해 다듬어지면서 점차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믿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다른 누군가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 역시도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기대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믿기 위해서 믿고, 믿지 않기 위해서도 믿는다. 전시 『Fingers crossed』는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중심에 두고 세 명의 작가로부터 자신의 주변에서 혹은 삶 깊숙한 곳에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남긴 흔적들을 건져 보기로 했다. 신념과 맹신 혹은 미신처럼 믿는 마음을 일컫는 다양한 이름들이 삶의 전반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양태를 한정시켜왔다면, 전시는 이를 다시 풀어 보이며 의미만으로는 표상되지 못했던, 믿음이 환상과 현실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나타내 보기로 한다. 단순하게 보였던 이 마음이 어느새 무겁게 읽힌다면, 단단한 두 글자를 두른 그 몸 속으로 들어가 이 견고함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는지 상상해보기로 하자. ● 현실이 필요로 하는 믿음의 양태는 소망으로 만든 수많은 돌탑이 줄지어 늘어선 기괴한 풍경일 뿐 알맞지 않은 돌들로 탑을 쌓으려고 한 깊은 심중은 헤아려진 적이 없었다. 현실의 그런 모습에 반응 하는 것처럼 반지하의 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허공을 가로 지르는 보랏빛 주먹들은 비스듬히, 살짝 스치듯, 혹은 주먹과 주먹 사이가 완전히 맞춰져 있지 않은 모습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강나영, 「For the fist bump」) 어긋남이 없도록 맞붙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맞은 편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간격을 좁혀도 보고, 각도를 움직여 어긋남을 최소화 해보지만 한 방향이 맞으면 다른 방향에서 가까워져 있던 것은 다시 멀어지기도 한다. 가능한 많은 부분을 맞춰보려 애쓰지만 불가피한 들뜸을 감수하고 유지하기로 한다. 순수한 직진이라고 상상했던 기대와 달리 믿음은 언제나 미묘한 의심이 함께 충만해 있었다. 끝없는 의심과 설득의 팽팽한 갈등 속에서 이 마음이 이루어져 왔다면, 흔들림 없어 보이던 어떤 신념은 자신의 위태로운 모습을 애써 외면하기 위한 불안한 몰입을 선택한다.
벼랑 언저리에서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는 모습 뒤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오래된 기억과 이야기의 끝을 붙잡고 발걸음을 움직이는 이가 있다. 엄지은의 「해일의 노래」는 말을 잃어버린 이야기꾼이 남긴 해일이 쓸고 간 소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얗게 빛나는 소금만큼 기나긴 시간에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던 어느 노인의 기억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음성에 불과하지만 그는 이를 붙잡아 보기로 한다. 이미 사라졌거나 혹은 그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에도 미지의 장소를 찾아 나서지만 노인의 기억 너머에서 존재하는 그곳과 노인의 말을 간직하고 있었던 작가의 기억 속 어딘가가 비슷한 좌표를 가리키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사라진 곳이라 해도 그 흔적을 찾아 나섰던 그의 시간들이 그곳을 존재하게 했다. 그는 노인의 기억을 헤집어서 실물을 건져 올리려는 대신 신의 사랑으로 지상 만물을 감싸 안기로 한다. 멀리서 울려오는 선창과 뒤따라 이어지는 후창은 그곳에 목소리로 말뚝을 박으며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해일의 높은 파도는 창고를 가득 채운 새하얗게 빛나던 소금과 이야기꾼의 말소리를 쓸어갔지만, 바닷물이 마른자리에서는 다시 소금이 모이고, 이야기꾼의 잃어버린 말은 다른 누군가의 입과 기억 안에서 다시 모습을 찾아간다. 이처럼 무언가를 믿는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기적을 닮았다. 하지만 이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게 많다. 보이지 않는 이것을 증명하고 또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권위 있는 기관의 연구논문, 전문가의 검증이 있어도 우리는 더 권위있는 기관을 찾아보고, 하나의 리뷰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간증하는 댓글을 탐독하며 신뢰 있는 말에 안도한다. 하지만 동시에 듣기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는 불신 또한 무시되지 못한다. 그날의 운세나 징크스를 의식하는 순간 상상 속 희비극이 하루를 좀 먹일 때면 어떤 것을 믿는 상태 속에 자리한 불안과 안도, 두려움과 기대처럼 상반되는 요소들의 아슬아슬한 공존이 현재를 버티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이른다. ● 반지하의 공간에 들어선 마토토의 집에는 펭귄이 있다. 우리는 마토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집을 가본 적도 없지만 그의 집에는 펭귄이 살고 있다(양윤화, 「마토토의 집에는 펭귄이 산다」).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액정에 맺힌 펭귄을 쓰다듬고 "엣-취"하는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화면이 바뀐다. 그리고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다시 어디선가 들리는 기침 소리에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고개가 동시에 휙 움직인다. 화면 바깥에서는 기침 소리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전시장에서 홀로 마토토의 집을 보고 있다면 얼굴을 가린 사람들 중에 소리를 낸 사람이 있다고 짐작해 본다. 우리는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아도 눈앞에 무언가의 존재가 어른거림을 느낀다. 바닥으로 치닫거나 수직으로 솟구치는 그래프의 곡선 하나에도 요동치는 마음이 그렇고, 기댈 곳이 간절함 밖에 남지 않은 이는 미신이라 해도 그 속에서 자신을 붙잡아 줄 수 있다고 느낀다면 그에게 그것은 더이상 미신이 아니다. 사실과 거짓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객관성의 유무보다 무엇이 자신에게 사실과 같이 혹은 그 반대를 느끼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가 반지하 바닥에서 천장을 향해 솟은 두 개의 기둥을 바라본다. 당신의 눈에는 높이 솟은 흰색 기둥 위에 무엇이 보이는가? 골목을 배회하는 무언가를 닮았지만 제이콥 Jacob 이란 이름을 가진 이것은 부르는 이름에 따라서 온 힘을 다해 신에게 매달렸던 야곱이 되고 원래의 제이콥이 되기도 한다(엄지은, 「제이콥」).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한다는 초자연의 힘을 줄곧 기적이라 일컬어 왔으나 은은한 램프 불빛을 받으며 공중을 떠다니는 고양이도 둥근 궤적을 그리며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길 바라며 기억 속에서 가장 따듯한 것들로 만든 기적의 형태는(강나영, 「Like a miracle」)은 전체를 부분으로 조각내어 다시 하나로 모았다. 믿음의 주요한 맥락들은 무언가를 믿는 이 마음을 순종적이고 완벽한 수단으로 표상해왔지만, 모두를 위한 장소를 지탱했던 네 개의 모서리는 채워지지 못한 빈자리들을 남기는 대신 그 결핍이 채워지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완전하지 않은 것들을 모아 조용히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강나영과 양윤화 그리고 엄지은, 세 작가에 의해 시각화된 믿음의 형태는 어떤 곧은 심지라던가 집착적인 몰입 또는 성스러운 어떤 힘에 깊게 의지하는 등의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고 하는 모습과는 다른 결을 가졌다. 작가들은 믿음의 일반적 외피보다는 그 이면으로 접근한다. 가령 신념으로 불리는 그 이름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길고 긴 내적인 상태를 압축시켜서 시각화한다면, 세 사람이 표상하는 것은 그런 압축과 완전함을 거부하는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통의 간절함을 고정축으로 삼아 서로 다른 보폭과 호흡을 한 발씩 맞추며 나아가던 세 사람의 모습이 그랬고 (강나영, 「네 사람이 함께 걷는 법」), 어느 노인의 기억에만 의지한 채 허깨비일지도 모를 장소를 찾아 바쁘게 움직였던 발걸음과 (엄지은, 「해일의 노래」),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를 밝히는 일련의 과정들(양윤화, 「마토토의 집에는 펭귄이 산다」) 또한 정돈된 상태보다 계속해서 움직임-소망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의 밀고 당기는 혼란-이 지속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여기 세 명의 작가들을 통해 시각화된 믿음의 이미지들은 전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믿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들은 단지 각자의 일상 가까이에서 이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일 뿐 어떠한 강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믿음이라는 단단한 확신의 언어보다는 유동적인 형태로서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각자의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상상해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해 보는 것이다. 이제 두 손가락을 겹쳐서 전시장을 찾아와 준 분들을 위해 소망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를 받아도 괜찮다. 믿어준다면 고맙고 오늘 하루도 그대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란다. ■ 이연지
Vol.20210705f | Fingers crossed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