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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1부 / 2021_0503 ▶ 2021_0522 2부/ 2021_0524 ▶ 2021_0612
기획 / SPACE mm × 허유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윈도우 갤러리_11:00am~10:00pm 토,일요일_예약제
스페이스 mm SPACE MM 서울 중구 을지로 12(을지로1가 50-1번지) 시청지하상가 시티스타몰 새특 4-1호 Tel. +82.(0)10.7107.2244 facebook.com/spacemm1 @space_mm www.spacemm.net
공감을 유도하는 직관력 ● 징울 작가는 직관력이 남다르다. 직관이라 하면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그 사물을 바로 파악하고 정의 내리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접하면 그 사물의 기호적 가치와 연결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문'이라고 하면 '열고', '닫는다', '가로막힌다' 등을 떠올리고 그 기호 안에 갇히기 일쑤이다. 그러나 징울 작가의 빗자루, 문, 항아리, 도마 등을 이용한 조형 작품은 어떤 작품의 기호적 의미를 만들어 내기 전에 사물과 당시의 경험, 경험 후 느꼈던 감정으로 정리된다. 「향수병」, 「실없음병」, 「엉킴병」 등의 표현 방법이 그러하다. 소재는 병(Bottle)과 실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향수, 엉킴, 실없음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언어적 표현 또한, 의미상으로 병(질병)(Sickness)임을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이 연결 지점이 기호적으로 매우 탁월하다. 작가의 이러한 사물과 의미의 직관적 연결은 보는 사람을 감상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즉흥적인 공감을 우선 유도한다. 보통 그 반응은 공감에서 비롯된 '미소'일 것이다.
사물의 상처를 읽는 마음과 시간의 무대인 사물 ●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수산시장과 가까운 지역에 살아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 시장에서 뛰는 생선, 호객행위 소리, 비린내 속에 활기찬 풍경으로 내 고향을 기억한다. ● 징울 작가의 도마들을 보는 순간 한편 묵혀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칼이 박힌 도마' 의 이미지이다. 보통 시장 아주머니들은 손님을 바삐 응대하고, 일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한숨과 함께 칼을 던지듯 도마에 내리 꽂는다. 아주머니의 한숨이 깊어지는 만큼 도마는 그 많은 생선 칼과 회칼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버려진 나무도마는 시장 뒤에 생선부산물들과 함께 쌓여있었다. 누가 그 도마의 상처를 이토록 알아주었을까? 누군가는 도마소리를 저녁 짓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도마가 내는 비명으로 기억 할 수도 있다. ● 징울 작가는 이러한 도마의 상처에 먹과 물감을 주입한다. 「보따리 여인」의 경우 버려진 나무 판 위에 중세 성화가 연상되는 울트라마린과 골드 색상의 여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버려진 나무가 환경에서 그토록 받아내던 상처 틈 하나하나에 색상과 형태가 스며들어 화려한 작품으로 살아난다. ● 반면 작가의 시어머니가 쓰던 도마 위에 그려낸 「황금 똥의 비밀」,「우리」와 같은 작품은 다른 결의 표현을 보여준다. 여기서 도마는 시간성을 나타내주는 소재로 작용한다. ● 일종의 집안 내력, 세월을 낡은 도마가 시간의무대를 만들고 있다. 그 무대 위에 고부(姑婦)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고부의 갈등 그리고 생기는 골짜기(사이 멀어짐) 그러나 같은 시대를 비슷한 역할로 살아가는 엄마라는 배우로서의 공감과 이해가 잘 보인다. 골짜기에 흐르는 계곡은 시간에 따라 곪을 대로 곪은 감정과 그런데도 보듬고 살아가는 관계를 보여준다. 징울 작가에게 소재란 관찰을 통한 재탄생의 존재로 혹은 시간의 무대로 작용하고 있다.
응어리, 외침, 울림 ● '징울'이라는 작가의 활동명은 처음 듣기엔 '징의 울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징은 그 울림이 가장 깊고 진한 악기이다. 무속에서도 무당의 접신을 돕는 악기로 징을 사용하는 이유도 이러한 울림들이 존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작가의 작품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항아리 속에 소리치는 작품, 가슴 가운데가 뻥 뚫린 솜 인형들 , 명상할 때 사용하는 타악기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등장 한다. 일종의 관객 참여형작품인 인터렉티브아트인데, 구멍은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고 무언가를 투척 할 수 있고 , 악기는 주어진 사물로 마음껏 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내 마음속 응어리를 들여다보게 하고, 그 응어리를 외침을 통해 꺼내고, 비워 낸 헛헛한 속을 악기의 묵직한 울림으로 채우 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보통 굿판에서 무당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과도 많이 닮아있다. 복잡한 마음을 사물에 옮겨 붙게 해서 내려놓게 하고, 신나는 춤과 음악을 통해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작가의 작품은 이처럼 치유를 통해 나아감을 경험하게 한다.
결 ● 모두가 투쟁을 하라고 하는 시대이다. 삶에 투쟁하라, 현실에 투쟁하라, 경쟁하듯 투쟁하라. 이러한 슬로건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여러 역할에 맡는 모습으로 성장을 해야 한다. 데미안의 알은 하나만 깨면 그만이었지만, 사실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알만 깨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야 인정받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징울 작가의 작품은 결과론적 성장보다, 성장 이전에 거꾸로 쌓여가는 내면의 깊이와 관계 맺기의 과정을 복잡한 패턴으로 표현한다. 또한 작가의 직관력은 사물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를 연결하고, 단순히 버려진 사물의 되살림이 아닌 그걸 사용했던, 사용하는, 사용할 사람들을 위로하고 살리고 있다. ■ 김정래
1부 : 나의 귀한 방, 쓰레記 ● 코로나시대를 맞이하여 집에 머물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쉼터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일터가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무엇을 하는가?
쓸고 쓸다 버려진 빗자루, 누군가의 땀방울 맺힌 노동력이 서려있다. 오늘도 나는 밑바닥을 쓸고 쓸며, 몸과 마음을 쓸고 쓸어내린다. 뒤죽박죽 뒤엉킨 일상의 혼란함 속에서도 의식을 모아 청소를 하는 일은 매일매일 먼지가 쌓이는 몸과 마음의 묵은 기운을 털어내고 새로운 한줄기 빛을 비추는 명상적인 행위이다.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매일의 일상 속에서 실타래가 엉키듯, 수많은 행위 안에서 과연 나는 온전히 나로 여기 지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따라잡을 수 없는 문명사회의 빠른 속도와 편의, 과부하 상태로 쫓기듯 달려가는 이 시대 삶 속에서 원래 자연인 우리의 몸은 본연의 감각능력을 상실해가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할 자아성찰의 에너지들은 밖으로만 휘발된다. 나의 몸은 바로 일상 속 "여기 지금"에 뿌리를 내려야함을 말해준다. 요즘은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밖을 향했던 수많은 행위들이 자연의 속도와 어긋난 우리들의 일상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 각자의 몸은 일상의 지금을 벗어날 수 없다. 각자의 고유한 뿌리내림이 일상에서 잘 이루어진다면 우리 공동체의 뿌리들은 깊은 연결 속에서 서로 함께 어려운 시대를 잘 겪어낼 수 있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관계와 행위 속에서 지쳐있다면 이제는 스스로 자신과 관계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 각자의 내면 안으로 향하는 시간들을 일상에서 재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2부 : 구구절절, 도마傳 ● 어린애기를 등에 업고 한숨을 실은 칼을 도마 위에 내리쳤다. 썰고 썰며, 씻고 씻어내며, 쓸고 쓸어내렸을 마음들. 수없이 상처 난 몸뚱이의 칼자국, 아련한 얼룩들, 곰팡이마저 꽃피운 도마 위의 묵은 상처들을 아련한 붓질로 어루만진다. 구구절절 쓰던 도마, 낡은 도마, 버려진 도마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 징울
코로나 19로 맞이한 비대면 시대에 우리는 그간 익숙했던 공간의 개념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사회적으로는 주거 취약계층으로 대변되는 복지시설에 관한 사회안전망 문제가 대두 되었고, 개인은 평범한 일상에 제약이 생기며 삶의 축소를 경험했다. 역으로, 집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우리는 내가 있는 공간에서 나를 마주하며 '나'의 뿌리와 관계, 확장 가능성 그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동안 미처 보지 못하고, 혹은 봤더라도 외면했던 것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새롭게 재정립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 전시 제목 '나의 귀한 방, 쓰레記'는 전 세계가 경험한 전염병 시대에 자신만의 공간이 주는 귀함과 그 공간을 더럽힐 권리, 혹은 자신만의 의미로 채울 수 있는 권리 모두를 포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 물건의 쓸모,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재료로 부터 영감을 얻어 시작된 제목이다. ● 징울 작가의 작업은 주변 버려진 것들의 존재에서 부터 시작된다. 버려진 문짝, 더 이상 활용가치가 없는 도마, 명주 천 등 수명을 다해, 혹은 더 이상 쓸모없어진 ● 것들을 불러 모아 그리고 이으며 여성,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역할, 순환되어짐에 대해 말한다. 동시에 작가는 '당신은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지, 그 공간은 어떤 의미로 당신에게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가'라며 역으로 질문한다. 우리 사회는 예술 작품에 대해 예쁜 쓰레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상생의 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시는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평범한 한 개인의 모습을 비추며 우리에게 어떤 삶의 태도와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묻는다. 동시에 그 태도와 자세가 나올 수 있는 자신 만의 공간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며 당신만의 귀한 방에는 무엇이 순환하고 있는지 혹은 고여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 허유림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삶은 부질없는 쳇바퀴로 여겨질 때, 내면의 산산조각 난 폐허들이 복구되지 못하고 바닥에서 헤맬 때, 말 못하는 무더기들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릴 때. ● 나는 우연히 징울의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징울은 마르고 닳도록 쓰여진 뒤 버려진 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쓸모없는 것들의 비탄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눈물을 닦고 어루만지고 보듬는다. 징울의 손길로 고단했던 몸뚱이는 씻겨지고, 벗겨지고, 다듬어지고, 풀어지며 정화의 희열을 맛본다. 비탄의 탄식들은 재생의 에너지로 변하고 온기가 스며든 쓰레기들은 새롭게 변형되어 익살스럽거나 깃털처럼 가볍게 띄워지거나, 세밀한 붓질로 아름답게 재생된다. 수많은 칼질로 상처뿐인 도마, 생활의 때들이 누더기처럼 붙어있던 시름뿐인 쓰레기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질량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그녀의 텅 비어 가득한 작품에 기대어 위로받고 함께 삶의 아름다운 소멸을 꿈꿔본다. ■ 무나
코로나19로 일상의 많은 영역들이 멈추고, 최소화되고 기능들이 상실되고 있다. ● 몇 년 전 내 자신 같다. 그 당시 나는 그러한 나를 되살리기 위해 자발적인 고립을 위한 '홀로만의 방'이 필요했다. 그 방으로 들어가 나의 그림자들을 마주하며 드로잉과 매닮 조형작업을 하였다. 이는 '또다시 함께' 를 위한 홀로의 시간들이였다. ●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자가 격리, 비대면, 거리두기, 집합금지, 외출자제등 현시대에서는 '함께'를 위해 혼자의 시간들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다. ● 이번 전시의 큰 주제는 쓸모없던 것들, 기능이 무기력해진 것들이 재해석되면서 변형되고, 재탄생 되는 사물들을 펼쳐 보이는 방이다. 온전히 내가 나를 되찾고자 했던 공간, 내 몸 하나를 일으켜 세워야 함을 알아차렸던 방바닥, 일상 속에서 나다운 나로 살아가기 위해 들어간 방 , 몸과 정신을 연결하고, 나와 나를 연결하고 그리고 나와 타인을 연결하고자 하는 바램의 진동은 내 작업의 세필 드로잉과 상실된 부분을 수용하며 실로 바느질을 하며 그 자체에서 새롭게 이어나가는 작업의 방식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비대면, 그래서 온라인으로 많은 행위들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시대.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닿아지길 바래본다. [ 쓰 레 記] : 비로 쓸어 낸 먼지나 티끌, 또는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이나 내다 버린 물건들의 기록 [ 도 마 傳 ] : 쓰던 도마, 낡은 도마, 버려진 도마들의 이야기를 전하다. ■ 징울
Vol.20210503g | 징울展 / ZINGWOOL / 澄鬱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