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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B1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가벼운 하강을 위한 육중한 날갯짓 ● 쾌락을 통한 강한 쾌감은 대개 배덕을 유발한다. 유흥을 갖기 위해서는 생산적인 행위가 필요하지만 소모하는 즐거움은 빠르고 간편하다. 쾌를 탐하는 행동은 어떠한 형태이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시작 단계에서는 약간의 주저와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는 걸음을 느리게 하는 족쇄가 아닌 달콤한 추진력으로 사람의 마음에 연료를 채운다. 그 다음 단계를 향해 박차고 나가려면 확신 가득한 사랑처럼 대단한 힘이 필요할 수 있지만 작은 기대감이나 눈먼 용기로 충분하다. 고아빈은 지역과 문화를 막론하고 주류 종교 교리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관계에 대한 애착과 공존하는 성적 쾌락에 대한 억압에서 지배의 논리와 작은 개인의 충돌을 바라본다. ● 성욕과 생식기능은 선택의 여지없이 모든 존재에게 부여된 힘이다. 하지만 그 자체를 일생의 목표로 살아가며 자연을 채우는 다른 생물과 다르게 인간은 스스로 능력을 억압하는 규칙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보상을 기대한다. 고아빈의 작품 역시 기존에 존재하는 종교화에 등장하는 양식이라는 시각적 규칙을 치밀하게 지키며 그 세계 안에 등장하는 사물의 상황과 행위를 변형하여 일탈을 보여준다. 연꽃잎을 포함하여 작품 중앙부에 거대하게 등장하는 짐승의 피부를 이루고 있는 비늘처럼 복잡하게 얽힌 그물형상은 틈이 많음에도 헤어 나오기 힘든 짙은 욕망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듯 그려져 있다. 대지의 피부처럼 들판을 뒤덮고 있는 꽃잎은 끝이 구부러진 형상으로 끌 수 없는 화염의 모습인 동시에 거세게 굽이치는 파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람에 세차게 흘러가는 구름의 형상은 생물들이 뒹굴고 있는 지상은 물론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다. 새하얀 물방울과 공기는 티 없이 깨끗한 느낌을 주기보다는 절정에 달해 뿜어져 나온 인간의 체액을 연상케 한다. 그 굴곡 사이에서 나체로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선악과를 먹고 수치를 깨우친 현자의 표정인 동시에 계산이 관여 할 수 없는 원초적인 쾌감에 젖은 눅진한 만족이 새겨져 있다. ● 삼면화의 양식을 빌린 작품의 중앙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모습에서는 불화의 모습도 떠오른다. 구름이 지니고 있는 복잡한 굴곡의 형태는 쾌락의 마찰이 만들어낸 하얀 거품처럼 증식하며 인물에 불꽃처럼 엉겨붙어있다. 핏빛으로 물든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가스를 뿜어내고 있는 화산은 성서에 등장하는 재앙의 모습인 동시에 분출이라는 키워드로 작품 전반에 걸친 욕망이라는 이야기를 더욱 치밀하게 뒷받침한다. 들판을 구르고 내달리는 변형된 신체들의 기괴한 행위는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되는 지옥의 모습인 동시에 업보에 짓이겨지고 있는 염라의 세계이다. ● 고아빈이 그려낸 쾌락의 정원에서는 규칙과 계급에 묶이지 않은 순진무구한 존재들이 거리낌 없이 서로를 탐하며 입 맞추고 있다. 악의 없이 베푼 본능적인 애착에는 의도와 관계없이 생겨나는 상처로 인해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쾌감과 고통이 공존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된 각기 다른 두 가지 색을 지닌 액체가 뒤섞이며 동굴에 흐르는 습기처럼 웅덩이와 종유석을 형성한다. 생명의 힘이 넘쳐흐르는 무아지경의 광경이지만 피비린내 자욱한 전쟁터의 모습이기도 하다. ■ 김치현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순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성과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이러한 성과 사랑의 관계성을 고전의 차용과 재해석을 통해 상징적 서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억압되지 않은 성과 억압받지 않는 사랑의 세계를 탐구하려 한다.
성과 사랑의 작동방식 : 즐거운 나의 정원 ● "지금 사랑하고 있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던가. 사랑을 했던, 사랑받지 못했던, 우리는 사랑이라는 촌스럽고도 유치한 골칫덩이와 운명을 함께 한다. 나는 언제나 사랑이 궁금했고, 고팠다. 이성에 눈을 뜬 시점부터 사랑을 알고 싶은 그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한 사람을 궁금해하고 함께 하고 싶은 그 마음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쳐 송두리째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성적 욕망이었다. 모태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사춘기가 올 무렵 순결서약을 했다. 내가 경험한 작은 세계 안에서 사랑은 성적 욕망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열망이 그 서약을 깨는 순간 나에게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 '성은 죄악일까? 과연, 성과 사랑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 성은 때로 육체적이며 저속한 배설의 욕망으로 치부되곤 한다. 반면, 사랑은 종교적 의미 안에서의 사랑을 제외하고서도 언제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성과 사랑에 대한 이중적인 대치구조 속에서 성이 타락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랑의 의미는 격상 되곤 했다. 사랑은 플라톤의 이데아 만큼이나 단단하고 고결해졌다. 이렇듯 성과 사랑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는 사랑의 차지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저속한 성이라며 한껏 숨기고 감추려 하면서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성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했을까? 과연 성은 더러운 것이며, 사랑은 깨끗한 것일까? 성과 사랑의 이분법적 잣대는 누가, 왜 만들어낸 것일까? 왜 우리는 성과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하려 할까? ●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위해 동서양의 고전을 새로운 상징과 해석으로 드러내고, 이를 제단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고전으로부터 성과 사랑의 관계와 단서를 찾아내려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마치 인간사를 탐구하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숨겨진 역사의 수수께끼를 찾아내려 하는 고고학자와 같이 말이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 발생을 근거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성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은 전략적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성의 의미와 가치는 역사 안에서 담론을 따라 이동하거나 변형되는 것일 뿐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언제나 골칫덩이로만 치부되어왔던 성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푸고 덕분에 성은, 성이 가지고 있던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작화 태도는 이러한 푸코적 연구방법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전의 신화 속에서 성과 사랑은 자유분방하다. 신과 동물과 인간은 성과 사랑 안에서 교류하고 내통한다. 본디 성과 사랑은 경계가 없다. 그런데 종교는 어떠한가? 사랑을 교리로 삼는 종교에서는 오히려 성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고, 다스리려 했다. 고귀한 사랑은 하늘로 올라가고,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었다. 종교화는 천국과 지옥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비로소 우리에게 성과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했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가 가장 극명하게 펼쳐지는 종교화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경계없는 자유를 지닌 고전의 신화나 설화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대치적인 가치체계의 혼란이 때로는 종교화로 때로는 신화의 형식으로 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대표작품 'The gate of love'는 성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고전의 신화적 상상을 바탕으로 제단화의 공간구성을 차용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성과 사랑은 어디든 담길 수 이고, 흐를 수 있는 물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따라 흐른다. 천국과 지옥의 양상을 띄는 것은 곧, 신 중심의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안에서 구별된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일련의 이야기들은 이 세계 안에서 무한히 돌고 돈다. 단지 사랑의 감정이 상승되고 하강하는 것처럼, 마치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에서 증발한 물이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쏟아지는 것과 같다. ● 'The gate of love'가 사랑의 겉면, 즉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밝은 면이라면, '서서히 드러나는 꿈'과 'Spelunkers'는 여전히 어둡고 감춰진 성의 세계 속에서 쾌락의 즐거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담겨있다. 특히, '서서히 드러나는 꿈'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오마주한 것인데, '쾌락의 정원'은 초기에는 종교적 교훈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잃어버린 낙원의 전경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제단화의 형식을 띈 이 작품은 종교적 사유 안에서 성의 쾌락과 사랑의 오묘하고 복잡한 경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나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쾌락의 정원'에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지만, 나의 작품 '서서히 드러나는 꿈'이나 'The gate of love'에서는 세계의 주재자가 등장한다.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고, 용의 몸통인 이 주재자는 고전 설화 속 영물들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마치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처럼 세계를 통치하고 지켜본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처럼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 만들어낸 제어 장치와 같다. 혹은,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것은 마치, 성과 사랑의 관념적 경계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스스로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반면, 'Spelunkers'에서는 주재자는 사라지고 '버섯처럼 피어난 눈(eyes)'만이 남았다. 감시하고 관망하는 듯한 이 눈들은 주재자만큼의 힘은 없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동굴 속 세계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아마추어 동굴탐험가(spelunkers)들은 '눈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다. 그들은 성의 유희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과 거리낌도 없어보인다. 그저 이들은 동굴을 탐험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마치 애초에 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과 성의 경계를 보기 좋게 허물어버린다. ● '십이지色' 시리즈는 순수한 욕망에 관한 것이다. 십이지신으로 대변되는 열 두 마리의 동물들은 누군가를 유혹하려 하거나 스스로의 욕망에 심취해 있다. 본디 십이지신은 호국적인 성격을 띄는 것이었으나, 이 시리즈에서는 열 두 가지 빛깔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욕망을 성과 사랑에 구분없이 인간의 본능 안에서 일어나는 순수성 그 자체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 역시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다. 그런데, 이들은 혼자일 때는 갇혀진 것이지만, 여럿이 모이면, 마치 책거리도와 같이 외부에 당당히 공개되고 자랑하듯 드러내지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작품 안에서 욕망은 감추려 하는 의지와 드러내려고 하는 의지가 상충되고 교차되며 동시에 이루어진다. ● 이처럼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궁금증을 시작으로 성과 사랑의 정의와 관계성을 고전의 신화나 종교화를 차용하여 그 의미를 답습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옛 이야기와 그림들을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면 같은 고민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성과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 인류를 통틀어 사랑과 성만큼 인간의 삶과 긴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과 사랑의 정의는 확고한 한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과 사랑의 작동방식은 결국, 불연속적인 관계들로 연속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아래 같은 성과 사랑의 정의가 있을 수는 없다. 성과 사랑에 관한 프로토콜은 각각의 세계 안에서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방식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각각의 세계 안에는 각각의 주재자와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 나는 결국, 성과 사랑을 탐구하고 정의하려 했다기 보다는 그동안 나의 정원을 깊이 들여다보고 즐겨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성과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의 정원을 가꾸는 일은 성의 죄의식에서 해방됨을 의미했고, 고결한 사랑을 일상으로 맞이하는 일이었다. ■ 고아빈
Vol.20210421b | 고아빈展 / KOHABIN / 高雅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