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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기획 / 아마도예술공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공간지원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한남동 683-31번지) Tel. +82.(0)2.790.1178 amadoart.org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 밤 ● 최병석은 이번 개인전에서 밤에 작업하는 모습을 전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작가는 생업을 위해 하는 낮의 일과 달리 오롯이 작품에 매달리는 시간을 주름이라 표현한다. 즉 밤은 제한된 시간이지만 펼치면 보이는 것보다 넓어지고 확장하는 주름처럼 압축되고 응축되어 있다. 이처럼 물리적 시간을 표면화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작업이 나아왔던 방향을 돌아보고,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전시에서 풀어낸다. 그간 작업했던 방식 안에서, 혹은 또 다른 조각을 시도해보기도 하면서 여러 재료와 방법으로 복합적인 입체미를 아마도예술공간의 분절된 공간 안에 구현한다.
도구나 기계, 전자 기기 등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금속이나 나무 등 여러 재료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아는 작가에게 '만들기'는 그 어떤 이야기나 주제보다 본질적인 토대를 이룬다. 물론 작품을 잘 만든다는 것에는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가 표현되기 마련이다. 작가의 길에 들어서며 했던 두 개인전 『숲속 생활연구소』(2015)와 『더 큰물과 배』(2017)는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입체와 설치로 풀어낸 것이다. 전자에서 '숲 속'은 '미술계'에 대한 은유였고 캠핑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상황으로 치환한 것이다. 캠핑에 필요한 도구들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공상에 따라 제작되어 초현실주의 오브제와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었지만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기능을 가진 작품이다. 후자에서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암호화하고 신호를 발생하게 하는 설치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작가가 보낸 신호는 반대편에서 물거품으로 나타나며 예술(가)에 대한 쓸쓸한 자화상을 만들었다.
세 번째 개인전 『바쁜 손, 느린 마음, 비워지는 선반』(2018)에서는 기능을 가진 것, 생략한 것, 남은 재료를 이용하는 것, 기능을 지우고 형태만 남긴 것 등 만들기의 방식을 세분화하여 50여 개의 작품을 제작했다. 기능과 재료, 형태를 집요하게 연구하고 탐구하여 자기화시킨 전시였다. 이 개인전은 네 번째 개인전 『피곤한 사각형』(2020)의 교각이 되었다. 이제 작가는 작품에 내재했던 기능을 유보하고 합판이라는 재료의 물성과 형태에 집중하게 된다. 문지르고 갈고 닦아 한없이 얇아진 사각형 하나를 얻게 되고, 그것은 이어진 '사각형' 연작을 합목적적으로 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도구나 기계와 같이 기능을 가진 작품과 멀어지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은 아무 내용도, 아무 기능도 가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이야기이든 형태든 뚜렷한 완결성을 추구했던 이전 개인전과 달리 《밤의 주름》에서는 작가가 그간 체화한 입체의 언어들이 총체적으로 공존하며, 현실과 이상적 자아에 대한 고민을 직관적으로 펼친다. 생활을 위한 일과 작품 제작을 위한 일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혹은 그 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문제를 붙잡고 자신의 만들기 방법을 곱씹고 되뇌어 여러 형태의 자각상(自刻像)과 자소상(自塑像)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대립, 균형과 통일에 대한 소망이 한 방향이 아니기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직접적이며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상징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도형에 빗대거나 기계 장치의 운동성을 끌어내는 등 복합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즉 하나의 방법 대신 분산된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작업하는 모습을 언어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의 일과와도 같은 「일과 날」은 육중하게 세워진 두 기둥과는 대조적으로 하단에 깔린 철막대가 울퉁불퉁한 바닥을 회전하는 작품이고,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주어진 여러 일을 처리하는 생활은 반복이겠지만 그럼에도 힘을 조절하며 열심히 생을 이어나가는 의지를 표현한다. 이는 자신이 만든 균형대 위에서 한 발로만 균형을 잡기 위해 애를 쓰는 사진 작업 「Live」와도 보조를 이룬다.(사진 속 균형대는 「양팔저울」이라는 작품이 되어 관객이 「Wooden Bottle」을 볼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준다.) 그리고 작업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고민은 「수다스러운 밤」의 기포로 형상화되고 읽을 수 없는 작가의 일기를 남겼다.
「열 한 번의 기회」와 「Wooden Bottle」도 쌍을 이루는 작업으로 키와 보트는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나무와 합판을 깎고 조립하여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설치된 키들은 사실적 만들기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 키들은 어떤 기회를 맞더라도 준비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Wooden Bottle」은 그 키들만 있다면 어디로든 향해 갈 수 있는 작가의 꿈을 담고 있다. 정박하거나 항해하기보다 부유하는 상태로 보이지만 키와 보트가 가진 상징성으로 인해 작가의 소망을 함께 나누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불안은 해소되지 못하기에 「부러진 손가락」에서처럼 손가락 하나가 완전히 꺾인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마흔 하나」의 네 손가락과 한 손가락의 나무 조각은 흔들림 없는 균형을 이루지만 서로 다른 모습이기에 불완전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이지만 도형과 동력을 이용하여 현실 자아와 이상적 자아를 추상화시킨 키네틱 조각 「△」, 「O」는 독립된 공간에 배치되어 대조를 이루는 작업이다. 「△」에서 삼각기둥은 현실을 살아내는 작가의 모습과 같다. 작가는 반대로 돌아가는 동력 장치를 두어 삼각기둥이 회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모가 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반대로 힘을 가하지만 그들이 맞물려 나는 소리를 막지는 못한다. 이와 달리 「O」의 원기둥은 작가가 가장 이상적이라 상정한 도형이다. 동력의 작용으로 원기둥은 계속해서 돌지만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 외부적 힘이 가해지더라도 스스로의 모습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대한 흠모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 「밤 시간」, 「두 개의 선」은 보론 같은 작업이다. 어떤 의미화보다는 만드는 행위에 이끌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펼쳐진 입체 작업들은 작가가 그간 해왔던 모든 방법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 전시는 형식이든 내용이든 자신에게 내재해 있던 것을 꺼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동어반복처럼 보일지라도 좀 더 성숙한 단계를 향하기 위한 작가의 솔직한 고백일지 모른다. 결국 지나온 밤과 앞으로도 이어질 밤은 좋은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고 또 그것을 만드는 시간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자 다짐과 다르지 않다. ■ 신양희
독백: 나를 위한 조각 ● 한 방향으로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삼각형의 기둥과 그 움직임을 지탱시켜주는 다리 네 개 달린 사각형 기둥의 결합은, 방 한가운데 홀로 서서 무언가 독백 같은 소리를 몸 안에서 뱉어내고 있는 어떤 형상 같다. 속이 비어 있는 이 두 개의 덩어리는 공존하는 제 형태 안에서 각각의 움직임을 수행하고 있는데, 사실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동력의 반목이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단지 하나의 느린 동작처럼 보일 뿐이다. 그 반목의 힘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결과가 바로 저 소리, 천천히 움직이는 형상의 독백처럼 들리는 기계 장치의 삐걱거림이다. ● 「△」(2021)는, 작은 마당까지 딸린 오래된 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전시 공간에서 열두 개의 방 중 중앙의 큰 방 한가운데 놓여있다. 밖으로 난 큰 창문이 있어 자연광이 고르게 들어오고, 공간의 동선 상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최병석은 그렇게 바로 눈에 띄는 장소에 다소 비장하게 보이는 「△」를 가져다 놓고, 그 추상적인 형태가 수직으로 서서 느리게 움직이며 독백 같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어쩌면, (공간배치도의 순서와는 반대지만) 동선의 흐름 상 먼저 봤을 수도 있는 「○」(2021)는, 동굴처럼 깊이 묻어 놓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잘 조율된 조명 아래서 형태의 모난 결핍 없이 순조롭게 제 생김에 맞춰 원운동을 그려내고 있다. 이 둘은 정황 상 아주 밀접한 임의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으며, 밤과 낮, 안과 밖, 수직과 수평, 하나와 둘, 세모와 원 같은 서로 다른 범주의 세계를 연이어 가늠케 한다. ● 최병석의 다섯 번째 개인전 『밤의 주름』은 생업과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독백 같은 내밀한 읊조림이 그가 만들어 놓은 형상들에 깊이 배어 있어 자전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굳이 독백 같은 조각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병석이 손으로 만든 이 형태들과 이들이 이루는 일련의 무대 같은 시공간의 단막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항상 물리적인 형태와 그것의 움직임 혹은 기능을 강조하면서 무언가를 만들곤 했는데, 대개 무언가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기계 장치들이 제 몸집을 갖춘 의인화된 형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최병석은 그 무대를 지휘하는 자로서 자기 서사의 각본을 만들어, "삶"과 "창작의 여정"과 그 사이를 오가는 "노동"과 그것을 "사유"하는 "공간"과 그것을 지탱해 주는 "동력"과 그에 대한 "위로"를 작업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이는 그의 개인전 제목 『The Idea Factory for living in the forest』(2015), 『더 큰 물과 배』(2017), 『바쁜 손, 느린 마음, 비워지는 선반』(2018), 『피곤한 사각형』(2020)에서도 명확하게 보이는 정황이다.]
그는 이번에 "밤"이라는 시간을 끌어와 또 다른 독백을 들려주는데, 사실 최병석의 밤은 시간이기 보다는 공간에 가깝다. 열두 개로 나뉘어 있는 전시 공간의 구조적 특징과 겹쳐, 그가 사유하는 밤의 영역은 창작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일종의 모순과 고립을 자처하는 주름을 보유한다. 그것은, 그가 '아워레이보(ourlabour)'의 구성원으로 생업 활동을 하는 것과 작가 최병석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것 사이의 물리적 역학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삶 속에서 자기 자신과 반목하며 보다 원천적인 카오스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본성에 근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와 「○」은 단지 낮과 밤, 생업과 창작, 반목과 질서의 단순한 이분법적 상황의 재연을 보여주기 보다는 모든 순간 속에서 "밤"의 카오스적 상태로 회귀하려는 창작자의 자기 독백적 망상을 그려낸다. ● 사뭇 재료 기법 연구의 현장일지 모른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최병석은 『밤의 주름』에서 나무, 금속, 기계장치를 중심으로 쇳가루, 오브제, 사진 등을 사용해 어떤 구체적인 형태나 상태를 깔끔하게 완성시켜 놓았다. 나무랄 데 없는 형태의 마감 실력을 과시하며, 일련의 재료를 다루는 숙련된 기술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 최병석은 (은근슬쩍) 자신과 닮은 형상들을 각각의 무대 위 단막에 세웠는데, 이는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 각각의 형태와 장치들이 스스로 독백의 대사를 쏟아내는 인간 형상으로 현전하게 되는 "밤"의 마술적인 힘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두 개의 선」(2021) 같은 경우 황동과 합판이라는 재료를 써서 마치 판재와 선재로서 각각의 물성과 상태를 고려해 그럴듯한 조형적 구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 가능한 지지체 위에 합판을 깎아 황동선의 유연한 형태를 성실하게 쫓듯 끝내 구부러진 나무 막대로 만들어 놓은, 최병석의 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새벽 4시의 궁전 The Palace at 4 a.m.」(1932)이 환기시키는 작가의 초현실적 시공간의 환상처럼, 최병석은 "어떤 형태"를 쫓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그려냈다. ● 「부러진 손가락」(2021)과 「마흔 하나」(2021)는 재료의 물성과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낸 조각적 형태를 통해 조형적 감각을 한껏 연출해내고 있다. 예컨대, (최병석의 모든 작업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정교하게 잘 만든 받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형태들이 재료의 물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양감과 질감과 중력에 대한 무게와 크기를 지닌 조각적 형태들이 물리적인 질서 안에 균형 있게 세워져 있다는 인상을 크게 풍긴다. 사실 작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각각의 형태들은 삶의 진부함에서 파생된 시시콜콜한 정서를 함의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완성된 작업들은 비장할 정도로 공간 속에 완전한 균형을 이루면서 받침대 위에서 자립할 수 있는 조각적 수행을 감수하고 있다. (심지어 형태들을 지탱해 주고 있는 받침대마저 이 밤의 수행성을 성실히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밤 시간」(2015/2021)은 쇳가루로 어떤 덩어리를 가진 형상을 빚을 수 있을 만큼 무모하고 불확실하다. 주름 잡힌 시간들은 한없이 길고 또 속수무책으로 눈꺼풀을 내렸다 올린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눈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칠흑 같은 어둠에 존재하지만,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체감할 수 있는 감각의 현전을 불러오기도 한다. 밤에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최병석은 토끼 머리 모양의 오브제를 구해 그 표면에 작은 자석들을 빈틈없이 붙여놓고 다시 쇳가루로 모든 내막을 숨겨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눈은 소용없다. 어둠을 향해 손을 휘젓듯, 최병석이 야무지게 만들어 놓은 저 토끼 얼굴의 형상은 손의 감각을 통해 가늠해야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형태의 물성이든, 진부한 윤곽이든, 저 속에 숨겨 놓은 강력한 힘의 역학이든 말이다. ● 지상과 지하로 구분되는 전시 공간에서, 최병석은 전시의 공간배치도를 지하에서 시작하는 순서로 만들었다. 그의 속내를 가늠해 보자면, 밤의 시간들이 함의하고 있는 어둠의 스펙트럼을 공간 구조로 가시화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초저녁에서부터 미명의 새벽에 이르는 밤의 밀도감이라 해야 할까.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지만, 그가 전시의 시작점에 가져다 놓은 작업은 「일과 날」(2021)로, 말 그대로 일(works)과 날(days)의 반복적인 루틴을 보여주는 기계 장치로 키네틱한 조형 요소를 십분 드러낸다. 생업과 창작 사이에서, 최병석의 장인적인 손기술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러한 작업은 그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주무기를 손에 쥐고, 그는 되레 독백 같은 자기 고백을 쏟아 놓는데, 성실하게 원운동을 그려내고 있는 두 개의 장치가 무언가 어긋난 상태를 부득이하게 감수하고 작동해야 한다는, 즉 불균형을 안고 그래도 이 전체의 움직임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자기 성찰의 속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주보고 있는 두 장의 사진 「Live」(2021)와 공간상의 대구를 이루면서, 그 독백의 실체가 "나를 위한 조각(작업)"이라는 목표를 미리 말해준다. 그가 몸의 균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발 딛고 있는 저 추상적인 임의의 원형 나무 조각처럼 말이다. 「양팔저울」(2021)은 독백을 위해, 최병석이 밤의 수행을 일부러 감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카오스적 공간으로 밀어 넣기 위해 만든 조각이다. 「수다스러운 밤」(2021)과 「Wooden Bottle」(2021)과 「열 한 번의 기회」(2020)가 나란히 연속해서 만들어낸 밤의 서사는, 어쩌면 「일과 날」에서 시작한 동력이 「○」에서 그려내는 묵직한 원운동으로 이어지도록 그 모호한 경계를 매개하는 동료들(our)과의 노동(labour)에 또 다른 기원을 두고 있다. ■ 안소연
Vol.20210416g | 최병석展 / CHOIBYEONGSEOK / 崔炳碩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