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프로젝트 기획 / 안종현 협력 큐레이터, 글 / 김진혁 디자이너 / 서가온
관람시간 / 12:00pm~07:00pm
스페이스 55 SPACE 55 서울 은평구 증산로19길 9-1 Tel. +82.(0)10.6304.4565 www.space55.co.kr www.facebook.com/space55
스페이스 55는 2021년 4월 1일부터 27일까지 프로젝트 「시차적응」의 두 번째 전시 황규태, 김규식 작가의 2인전 「시차적응: 카메라」을 개최한다. 두 작가는 사진 매체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본 전시에서 소개되는 황규태 작가의 「픽셀」과 김규식 작가의 「진자운동실험」, 「원근법 실험」은 촬영, 편집, 실험 등 사진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가의 실천을 중심으로 사진과 카메라의 의미를 탐구한다. 사진기 탄생 이후 오랜 시간 고착된 피사체-렌즈-카메라-사진가의 선형적인 이미지 재현 방식에서 벗어난 작업은 사진을 구성하는 입자(빛, 픽셀)의 물질성,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진 ● 온라인 마켓에서 물건을 최저가로 구매하고 주식, 금융, 감시, 광고, 구직 등 일상의 많은 부분들이 작은 기기를 통해 이뤄진다. 이는 1999년 빌 게이츠가 그의 저서 「생각의 속도」에서 미래 기술 발전에 대해 예측한 내용이다. 이제 스마트폰 없이 집을 나서는 것이 불안한 것을 보면, 인간도 기술이 그려낸 세상의 한 부품이 된 듯하다. 그 와중에도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사진 매체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간의 독창성과 예술가의 역할을 확인하는 두 명의 사진가가 있다. 전시 「시차적응: 카메라」의 황규태, 김규식 두 작가는 사진 매체의 쉼 없는 발전과 변화에 편승하는 대신 '빛의 흔적'이라는 사진의 본질에 천착했다.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이나 아날로그 암실에서의 편집과 조작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작업은 작품의 이미지를 보고 현실 속 어떤 장면이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없어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진부한 논쟁을 마주하지만, 이들은 되려 이를 자신의 방으로 삼아 판을 벌린다. 우리는 「시차적응: 카메라」을 문지방으로 삼아 두 예술가의 방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방 하나, 카메라 ● '사진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논의에 황규태 작가의 「픽셀」 시리즈는 유쾌하고 명료한 답을 제시한다. 다채로운 색상이 픽셀들이 패턴이나 조형을 이룬다. 어떤 장면, 이야기를 지표하지 않는 사진들은 '이는 사진일까?', '무엇을 찍은 것일까?'와 같은 질문을 필연처럼 마주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픽셀」이 대형카메라, 접사렌즈로 TV, 모니터 화면을 촬영하는 지극히 사진적인 맥락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더 가까이, 더 선명하게', 오로지 사진만이 가능한 실천을 통해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에 도달한다. 이야기는 사라지고, 빛의 흔적만이 남는다. 오랜 시간 사진의 전통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의 서사를 벗어난 사진은 되려 빛의 물리적 흔적이라는 자신의 독립적인 특성과 지위를 분명히 한다. 한편, 디지털 스크린을 표류하고 사진으로 복제되는 「픽셀」은 그 이미지만으로는 애초에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맞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작품의 제한된 정보는 역설적으로 한 가지 사실만은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바로 '누군가'가 현실의 빛 혹은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입자를 자신의 매체로 삼아 그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덕에 픽셀은 필름에서 컴퓨터로, 컴퓨터에서 인화지로, 인화지에서 스마트폰으로 유연하고 가볍게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고, 변화하며 확장한다. 「픽셀」의 픽셀들은 어쩌면 이런 과정을 아주 오랜 시간동안, 수 천 번 거쳤을 수도 있다. 그 기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픽셀은 현재, 끝을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황규태 작가의 「픽셀」로서 실존한다. ● 카메라는 태초부터 특정 장면이나 이야기를 있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촬영기기를 지칭하는 카메라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줄임말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에 구멍을 뚫으면 외부의 빛이 들어와 반대편 벽면에 외부의 풍경이나 사물의 상이 맺히는 원리를 활용한 기계장치로, 단어 자체는 라틴어로 어둠(obsucra)의 방(camera)를 뜻한다. 1826년 조제프 니엡스가 촬영한 「그라의 창문에서 바라본 조망」은 카메라를 사용해 현실 세계의 장면을 기록한 최초의 사진으로 여겨진다. 니엡스의 사진이 현실의 빛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열악한 화질과 오랜 촬영시간으로 인해 해(실제로는 지구)의 움직임이 그대로 담겨 있어 오늘날 사전지식 없이 니엡스의 사진 이미지를 보고 현실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오늘날 기술발전으로 인해 렌즈는 밝고 선명해졌다. 카메라의 촬영 시간 역시 1/32000초 이하로 빨라지는 등 많은 부분들이 현실에 가깝게 보이도록 '보완'됐지만, 애초에 카메라는 현실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유령 그림자극이나 선사시대 주술에 활용됐다는 기록과 추측을 마주할 뿐이다.
김규식 작가의 「진자운동실험」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은 카메라와 사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진자운동실험」은 줄에 달린 추가 지구의 중력에 의해 움직인 진자운동의 동선을 담고 있다. 일정한 방향과 간격으로 반복되는 나선형, 원형 이미지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지구의 역사 이래로 계속되어온 자연과 현실의 가장 직관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움직임을 인화지에 담아내기 위해 레이저가 설치된 진자운동 기구를 제작하여 암실에 설치하고, 바닥면에 빛에 반응하는 인화지를 고정하여 레이저의 움직임을 인화지에 담았다. 레이저 추는 중력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며 움직임은 잦아들며 레이저 빛의 움직임이 담긴 인화지는 암실에서 현상, 정착 과정을 거쳐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진이 된다. 이 과정에는 카메라가 없으며, 그에 따른 원본 이미지 파일이나 필름도 없다. 수 년이 소요된 셀 수 없이 많은 실험이 필요했지만 보는 이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이미지와 도상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진은 좁지만 곧고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그 길 위의 표지판은 오직 빛의 흔적이라는 사진의 원초적 속성과 진자의 움직임을 시작하고 이를 사진으로 만들어 낸 '누군가'의 정신과 실천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을 겨냥한다.
방 둘, 사진 ● 사진 작품에 관하여 가장 흥미롭고 어려운 지점 중 하나는 작업의 제작 과정이나 실험, 놀이와 같이 작가의 미학적 실천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분리된 사진 한 장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오랜 사투 끝에 히말라야 고지에 올라 찍은 사진, 빅데이터가 수집한 수 만 개의 이미지를 합성한 사진, 노출 시간이 며칠이 넘어가는 사진 모두 결국은 낱장의 사진으로 우리 앞에 놓여진다. 작품은 작가의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액자에 담기거나 사진이미지로 복제되어 다양한 공간을 표류하고 평가 받는다. 얇은 인화지 한 장, 스크린 위의 픽셀 공간은 사진을 매체로 하는 작가들에겐 무대이고 전쟁터이며 재판장이다. 미학적 평가뿐 아니라 누군가에겐 생업이 달린 만큼, 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들이 취하고 있는 전술과 논리, 가치관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 황규태, 김규식 작가에게 있어 사진 공간은 연구의 결과 전시장이자 풍자와 설전이 오가는 대화 공간이다. 김규식 작가의 「추상사진」 시리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도형과 패턴의 이미지를 띄고 있으며, 이들은 매우 '추상적'으로 보인다. 특히 흰 배경에 검은 사각형이 자리한 작품 「Black on White」은 그 작품이 무엇을 지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대표적인 추상회화 작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 「검은 사각형」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추상사진」이 '사진'작업이라는 데 모순이 있다. 그 이미지가 아무리 추상적으로 비춰져도 작가는 보편적 사각형 형상을 촬영했거나 암실 기법을 통해 재현했으며, 실제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이 사진이 「검은 사각형」이나 그 일부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추상사진」은 "추상 사진은 존재하는가?"라는 역설적인 질문을 낳는다. 추상미술의 성공과 함께 '추상'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형용사가 됐다. 흔들렸거나 대상의 일부가 가려지지고 잘려진 사진에는 '추상', '심상' 같은 미사여구가 붙는다. 이러한 현실에 「추상사진」은 답한다. "사진은 추상이 아니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사진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김규식 작가의 실험적 태도와 신랄한 풍자는 「논픽쳐(Nonpicture)」 시리즈에서 더욱 도발적으로 드러난다. 형태와 음영이 분명한 구체, 실선으로 그려진 삼각뿔과 정육면체, 크고 작은 점이 나열된 이미지까지.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현실의 대상이나 어떤 이미지를 촬영한 것인지, 애초에 컴퓨터 혹은 인화지에 그림을 그린 것인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이들은 앞서 소개한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암실을 카메라로 삼아 현실의 빛의 흔적을 현상, 정착시킨 지극히 전통적인 아날로그 '사진'으로, 작가가 인화과정에서 인화지에 닿는 빛을 조절하는 여러 개의 가림판을 섬세히 조작하여 인화지를 속여낸 결과물이다. 그나마 필름 사진임을 유추할 수 있는 입자 마저도 필름이 아닌 유리판에 아크릴 스프레이를 뿌려 만들어낸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는 알 바도 아니지만, 작가의 조작에 속아버린 인화지처럼 알 바가 없다. 그저 그림과 사진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 '픽쳐(Picture)'가 아니라는(non) 시리즈의 제목 앞에서 '아?'와 '아!'를 반복할 뿐이다.
김규식 작가에게 사진이 실험과 풍자의 공간이라면, 황규태 작가에게 사진은 실험과 탐험, 동시에 섬세한 전술을 펼치는 공간이다. 작가의 실험적 태도는 1960년대부터 여러 사진을 조합하고 합성하는 포토 몽타주, 필름태우기, 다중노출 등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특정한 속성이나 단일한 이미지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발전한 다양한 매체 실험을 봤을 때, 황규태 작가는 일찍이 사진이 현실의 물리적인 흔적인 동시에 그 자체로 물리적 대상(필름, 인화된 사진)이고, 행위-몸짓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작가의 경제적 상황이나 입장문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현저히 좁았던 당대 미술계 내 사진 매체의 입지와 잡지나 신문, 광고에서 서사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사진의 유통 환경을 생각해보면 작가에게 사진은 현실 이미지의 기록을 넘어,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실험과 탐험의 공간이었다. 「픽셀」이 시작된 199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사진이 국내 미술계에 등장했다. 이 시점에서 사진은 작가의 미학적 탐구는 유희적 태도와 맞물려 매체의 독립적인 특성을 분명히 하는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한다. 예술작품은 유일성과 현장성, '아우라'라는 무기와 엘리트 중심의 매개자, 대형 미디어를 기반으로 거대한 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이 전략은 언제, 어디서나 조작, 복제되고 전달될 수 있는 현대 디지털 이미지 앞에서 모순을 겪는다. 심지어 픽셀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찍었고 조작 했는지 어느 하나 알 수 없는 대상이다. 빛의 입자가 필름으로, 인화지에서 픽셀로, 픽셀에서 다시 인화지로 복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픽셀」은 제조사 조차도 알 수 없는 극단적인 레디메이드 작품에 가깝다. 시대 차이로 인해 100여 년 전 누군가가 소변기를 「샘」이라 명칭하고 싸인한 뒤 전시회의 출품하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 사건과 비교하긴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 큐레이터 할 것 없이 사진의 복제성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오늘, 20여 년 전 시작된 「픽셀」은 현대 사진 예술과 미술계의 의표를 찌른다.
방 셋, 여기 ● 이제 작품은 전시장에서 관객 앞에 놓여졌다. 접객실과 같은 이 방은 작가의 손길이 묻어 있지만, 주인공은 관객이다. 이런 저런 사연과 두 작가의 수 십 년 매체 연구, 실험이 있었지만 과연 이들은 어떻게 읽힐까? 감명 깊게 보고 가슴에 새기거나 작품을 살 수도 있다. 주변 사람에게 추천, 비판 하는 것도, 악플을 다는 것도 모두 개인의 몫이다. 서사가 배제된 이들의 사진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현실을 감각한 이와 그 흔적을 남긴 행위가 있었음뿐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며 유튜브에서 바다소리를 찾아 듣고, 나무를 올라 노을을 바라보기는 커녕 길가에 늘어선 나무의 껍질을 만져볼 생각도 없다. 슬라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영상에 달린 "물컹물컹한 느낌이 좋아요"라는 아이들의 댓글처럼 감각 의미와 가치, 정의 모두 바뀔 수도 있다. 두 작가의 감각을 향유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좋겠지만, 수 만 명의 고고학자도 발견된 지 한 참이 지난 나스카 문양의 의미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은 없다. 예술적 가치나 미학은 한 쪽으로 밀어두고, #이쁜사진 #흑백감성 #은평구데이트 헤쉬태그를 달아 공유해도 좋은 일이다. 사진은 만들어질 때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언제나 과거가 되는 지나간 미래다1). 작품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고, 어떻게 기억될 지 모른다. 그저 잠시 여기 머물렀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이 결론이 다소 진부하고 연약할 수도 있지만,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바램이며 모두가 원하는 바 아닌가? 암실에서 만들어 낸 빛의 흔적처럼, 세상을 떠돌다 액자 안에 자리잡은 픽셀처럼 이들은 그저 지금 여기 함께 있을 뿐이다. 어쩌면 당신의 시차적응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 김진혁
* 각주 1) 안종현 작가, 2018년 작가와의 대화에서
프로젝트 『시차적응』에 대하여 ● 전염병이 창궐하자 미술관은 문을 닫았다. 문을 연 미술관은 입장객 수를 제한했다. 이제 전 시장 나들이는 영 쉽지 않다. 삶은 무거워졌고 갈 곳은 없으며 발은 멈췄다. 반면, 흥미롭게도 물리적인 단절 속에서 디지털 공간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띤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구겐하임 미술관 의 유튜브 영상 업로드 양은 3배로 늘었고, 뉴욕현대미술관은 2.5배,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은 2배 많은 영상 콘텐츠를 업로드했다. 다양한 콘텐츠가 홍수와 같이 쏟아지고 스마트폰 알 림과 뉴스피드를 채웠다. 멈춰버린 신체 리듬과 홍수와 같이 빠르게 변하는 현실은 조금씩 어긋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시차적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 프로젝트 『시차적응』은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 시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인식을 구축해 온 작가 16인을 2명씩 매칭하여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사진 전시 프로젝트다. 동시대 예술에서 '사진 작업'은 작품의 내용이나 조형적 아름다움만을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시각적, 조형적 매력은 기본이고 모든 사진작가는 자의 반-타의 반 앙리 베르그송이 되어 물질과 기억, 운동 과 기억에 대한 자신만의 도식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 까다롭다. 이번 '시차적응'이 사진 작업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유이다. ● 본 프로젝트의 첫 전시 『시차적응 - Medium』은 #구본창, #이갑철 작가의 2인전으로 개인이 사진을 통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다시 사진이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 매체적 특성을 탐구한다. ● 두 번째 전시 『시차적응 - 카메라』는 #황규태 작가와 #김규식 작가의 2인전이다. 두 작가는 '사진'작업은은 촬영, 편집, 실험 등 사진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가의 실천을 중심으로 사진과 카메라의 의미를 탐구한다. 사진기 탄생 이후 오랜 시간 고착된 피사체-렌즈-카메라-사진가의 선형적인 이미지 재현 방식에서 벗어난 작업은 사진을 구성하는 입자(빛, 픽셀)의 물질성,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 세 번째 전시 『시차적응 - 공간』에서 #이나현 작가는 3D 렌더링을 통해 현실과 같은 공간을 구성한다. 반면 #박형근 작가는 현실 공간을 역사나 장소적 특징으로부터 분리하고 설치, 채색 등 직접 개입함으로써 공간에 잠재된 가능성을 드러낸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간의 사진이미지를 만들어 내지만, 사진을 매개로 주어진 현실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포 착하는 데 주목한다. ● 네 번째 전시 『시차적응 - 기억』에서는 #권도연 작가와 #오석근 작가가 과거의 기억을 사진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은 일련의 시도를 통해 기억이 현실을, 혹은 현실이 기억을 구성하는 데 있어 사진이 어떻게,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는 지를 실험하고 기록한다. ● 다섯 번째 전시 『시차적응 - 자연「-」인간「-」기계』에선 #박형렬 작가와 #조춘만 작가가 합을 맞춘다. 박형렬 작가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 자연의 새로운 조형성과 잠재 적인 양태를 드러낸다. 반면, 조춘만 작가는 산업 현장, 인공물을 자연 그대로 포착한다. 이들 의 대비를 통해 중립적인 기계적 특성을 지닌 사진을 기점으로 편향적인 인간, 주체의 사유가 어떻게 풍경을 포착하고 새로운 네러티브와 메시지를 창조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여섯 번째 전시 『시차적응 - 사랑』에서 #안옥현, #윤정미 두 작가는 사진을 통해 사랑과 욕망 을 유형적 이미지로 포착한다.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시도는 이상, 이념, 관념의 폭력과 현실의 모순을 사진의 표면 위로 드러낸다. ● 일곱 번째 전시 『시차적응 - 이데올로기』는 한국전쟁, 남북분단을 기점으로 탄생한 풍경을 주제로 한 #강용석, #최원준 작가의 작업을 소개한다. 강용석 작가는 1984년 외국인 전용 술집에서 촬영한 작업 「동두천 기념사진」에서 미군과 미군의 접대부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통해 분단의 문제를 지적한다. 최원준 작가는 이라크전 이후 파주에 방치된 미군부대를 촬영한 작업 「타운하우스」와 한국 전쟁 기념비 부조를 촬영한 작업 「전쟁부조」를 이데올로기의 동시대적 의미와 관계, 시간에 따른 상대성 등 시각적으로 발현된 이념의 특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 시차적응의 마지막 전시는 #김옥선, #변순철 작가의 2인전 『시차적응 - 그리고 사람』이다. 두 작가는 일련의 인물을 유형적으로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인물 저변, 즉 우리의 주변을 이 루고 있는 사회, 환경 조건과 인식을 드러낸다. 김옥선 작가의 「해피투게더」에서 인물들이 주 어진 환경 조건과 차이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면, 변순철 작가의 「짝-패」 속 인물들은 그에 저항하듯 서로에게 밀착하고,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취한다. 사진가와 사진 속 대상은 사진을 기점으로 암묵해왔던 '현실의 현실'을 마주하고 반응한다. 타인을 찍은 사진이지만, 모든 사진 이 그렇듯 이들은 결국 우리를 향하고, 우리의 현실 이야기를 그려낸다. ● 프로젝트 『시차적응』은 사진 작업을 중심으로 동시대 예술의 의미를 돌아본다. 비록 8개의 전시를 통해 다양한 주제와 담론을 다루지만, 가장 진보적인 미학이나 시의성 있는 화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들로부터 단절을 겪고 있는 대다수 우리 스스로를 사진의 힘을 빌려 돌 아보고,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프로젝트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 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통해 사진을 접 하고, 소통하며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창작한다. 바로 그 가능성이 프로젝트 『시차적응』 이 역사와 기억의 한 축으로서, 또 다른 사진 한 장으로서 주장하고 증명하는 유일한 사실이 다. 그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그랬듯 지금, 우리 손 안에 있다. ■ 스페이스 55
□ 부대행사 토탈미술관x스페이스 55 토탈뮤지엄 전시기간 중 매주 월요일 3시, 사전예약 필수 문의 / 토탈미술관 02-372-3994
Vol.20210402g | 시차적응: 카메라-황규태_김규식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