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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요일_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초이 GALLERY CHOI 서울 마포구 토정로 17-7 Tel. +82.(0)2.323.4900 www.gallerychoi.com
작가 임현희 평론: 근작을 중심으로-흔적, 경계 와해된 시공의 앗상블라주 ● 「Mother earth Spring rain」(2010)을 비롯한 임현희 작가의 작품 「Mother earth There」(2010), 「시간이 멈춘 숲」(2011), 「Eclipse」(2012) 등은 개인의 소소한 감정과 일상적 경험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대체적으로 자연성과 생명력이 담긴 몽환적 노동집약적 작업이라 해도 무방하다. 특히 다섯 마리의 새가 등장하는 「Eclipse」는 의식 밖의 영역을 열람하도록 한다는 게 특징이다. ● 표면적으로 볼 때 근작은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어렴풋이나마 삶과 죽음, 존재의 여정과 소실점을 읽게 하나, 맥락은 할지라도 더 이상 구상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흐름'이 놓였다. 감성적 인식에 의해 포착된 현상으로서의 미가 망막을 위주로 한 판단으로서의 인지(認知)를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 '감정의 흐름'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는 조형언어의 절제에 있다. 외면이 아닌 내면에 다가서기 위해 그동안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형상, 색깔 등의 주석(직관되고 구상화하는)들을 제거했다. 눈에 맺히는 상(像)에서 이야기로 전환시키되 그 스토리조차 내부로 옮겼다. 따라서 표면에 부유하는 건 숱하게 선을 긋는 행위의 '흔적'뿐이다. 그건 흡사 수양하듯 혹은 무언가를 공들여 닦듯 안으로 침잠하는 미적 감정 작용에 준한다.
어쨌든 이제 '그리기'는 멈췄다. 화면 위 여백을 가리고 안료를 덮은 후 떼어내 재 덧대는 방식의 반복과 누적이 들어섰다. 이를 토대로 할 때 그의 작품은 '감정의 흐름'과 '감정의 절제'의 상호작용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하지만 과거의 작업이나 현재의 작업 모두 근본적으론 미적 주체를 지각 감관· 감정의 동력이 통일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게슈탈트(Gestalt) 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형태주의적 접근(Gestalt approach)을 허락하는 옛 작업이나, 구체적 경험이 논리적 분석에 선행하는 오늘날의 작업 등이 그렇다. ● 다만 현재 작업의 경우 감정의 '내적 환기'에 훨씬 무게를 둔다. 실제로 「천 번의 숨_A thousand Breaths」(2018~) 연작을 포함한 「깊은 숨_Deep Breath」(2018~), 「천 개의 물소리_A thousand Waterfalls」(2018~), 「천 번의 숨_화가의 얼굴」(2020~)과 같은 일련의 시리즈는 철저히 작가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 '감정의 절제'를 바탕으로 한다. '감정의 절제'는 우연성을 동반한 조형의 원인이자 함축과 생략을 통한 긴장된 밀도를 갖추게 된 배경이요, 환기를 증폭시키는 요소이다. ● 여기서 중요한 건 경험이다. 문제는 그의 작업의 발원격인 경험이란 무엇일까에 있다. 감정이입의 산물로서의 작업은 그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론 '삶과 죽음, 그 흐릿한 경계'로 규정되는 것들이다. 경계는 집적과 자유로움, 그 사이 어딘가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적확히 알 수 없다. 사실상 작품자체는 어떤 설명도 내놓지 않는다. 그래도 힌트는 있다. 작가는 "예전부터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흐릿했던 것 같다."며 "나에게 죽음과 삶의 의미는 성글어진 씨실과 날실 사이로 이리저리 통과하는 공기 몇 그램, 혹은 코끝으로 느껴지는 반복된 들숨과 날숨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 흥미롭게도 '삶과 죽음, 그 흐릿한 경계'를 촉발하는 건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나 어떤 사건을 원인으로 한 삶에 관한 경이롭고 새로운 그 무언가는 아닌 듯싶다. 과거 어느 날 한밤중 숲에서 마주한 요란한 물소리가 이튿날 다시 찾았을 땐 전날과 다른 고요(사라져버린 물소리)로 자리했고, 그 상이한 장면은 존재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 전부가 지닌 의미, 즉 존재에 관한 자각은 그에게 예술시원의 모든 것이다. ● 진정한 존재는 무형이다. 독립적으로 어떤 능력과 실체를 갖는 영원한 본질이다. 우린 범속한 존재와 위대한 실재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유효함을 믿음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층위의 실재에 포함되는 완전무결한 존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오랜 시간 예술로써 다가서려한 진실 과도 연결된다.
이렇듯 임현희의 근작은 진실의 범주에 도달하기 위한 경주에 있음을 고지한다. 개념적 사고로는 존재와 비존재의 한계를 구획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경계 와해된 시공의 앗상블라주(assemblage)로서 위치한다. 그리하여 나타난 표상은 무수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신체와 정신 내에 누적되고 쌓여 흩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흔적이다. 이성적 삶과 미적 가치를 농밀하게 만드는 무의식과의 교집합, 그 아래 둥지 튼 심리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끝자락엔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되짚는, 존재에 관한 사유가 배어 있다. ● 물론 사유가 확장되면 끝내 '없음(nothing)'으로부터 출발하는 단 하나의 길을 새롭게 연다. 근작들은 그 길이 어디로 뻗어가고 있는지를 목도하게 한다. 이는 임현희의 작업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매력적인 명분이다. ● 사실 작가에게 있어 예술이란 타자의 시선에 멈춰진 이미지들의 향연이 아닌, 어디까지나 마음속 어딘가에 감춰져 있는 화두를 전달하기 위한 창의적 조어이다. 예술의 가치란 다양한 회화적 요소들을 포함한 부수적 가치로 정의되기 보단, 그것이 본질을 이끄는 통로와 교체되어야 하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실존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다행히 작가도 이에 대한 응답을 내부로부터 하달 받고 있음을 본다. ■ 홍경한
* 본 평론은 아트허브의 평론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작품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작품이 더욱 단순해지기를 바란다. 움직임이 최소화 된 선, 최소한의 색, 그리고 최소한의 의지. 그 안에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나에게 맞는 움직임과 호흡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어쩌면, 나에게 그림은 그린다는 것이 아닌, 행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 이십 대 즈음, Mark Rothko 작품 앞에서 숨이 멎을 듯 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삼십 대가 끝나갈 무렵, 윤형근 작가의 작품 앞에서 다시금 그때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 작품 안, 삶을 초월해 죽음을 평온히 품으려는 작가의 모습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삶과 죽음 사이 어디 즈음, 그 희미한 경계일지 모르겠다. 있음을 넘어선 어떤 것, 무슨 말로도 채워지기 힘든, 작품 앞에 섰을 때 비로서 그 존재가 보이기를 바라는. 그것이 코끝을 오가는 들숨과 날숨의 형태로, 혹은 성글어진 씨실과 날실 사이 이리저리 통과하는 공기 몇 그램의 무게로 다가오기 바란다. ■ 임현희
Vol.20201217e | 임현희展 / IMHYUNHEE / 任賢希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