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바람)·鏡(거울): 풍경(風景)으로 나를 만나다

『그룹'P'』 2020 정기展   2020_1215 ▶ 2021_0106 / 월,공휴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리윤_양지희_조혜정_주랑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김세중미술관 KIMSECHOONG MUSEUM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70길 35 Tel. +82.(0)2.717.5129 www.kimsechoong.com

세계는 이미지(image)를 통해 자신의 감각적 모양새를 다듬는다. 바람의 의지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구름, 뒷산 나무의 어스러짐, 현미경 속의 세포들과 천체망원경 속의 은하수, 동네 꼬마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왠지 심란해 보이는 산책자, 번들거리는 자동차와 가판대 위의 빨간 사과..., 이미지는 존재에 사건을 만들어 주고 우리의 삶을 풍만한 이야기로 채워준다. 어디 유형적인 것들뿐이겠는가. 무형적인 것들도 마찬가지다. 슬픔과 절망, 기쁨과 희망, 사랑과 설렘, 향기와 악취, 부드러움과 거칢..., 이 모든 비물질적인 것들도 각각의 색감과 그것에 어울리는 추상적 형태를 잉태한다. 가히, 세계의 모든 표현은 이미지의 힘을 빌린다. 이미지로 사유하는 미술은 그래서 세계의 표현을 좇는 고귀한 작업이다. 4人의 개성 있는 작가들, 김리윤, 양지희, 조혜정, 주 랑으로 구성된 『그룹 'P'』의 예술적 지향성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이들에게 경험된 이미지는 존재의 집이자, 존재가 끝없이 성장하는 무한의 공간이다.

김리윤_Pin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2×91cm_2020

『그룹 'P'』의 명칭은 이미지의 여러 출현 형태, 예컨대 picture(그림), painting(회화), phi(황금비 ϕ), people(사람), picturesque(그림 같은), paysage(풍경; 프랑스어)의 앞 철자를 따온 데서 유래했다. 명칭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이, 『그룹 'P'』는 "자연-삶-인간"의 긴밀한 상호관계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의 모임이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를 맞이한 『풍 · 경 風 鏡』展은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 가운데에 있는 어느 곳의 모습"이라는 일반적 뜻의 풍경(風景)에서 '볕 경'을 '거울 경'으로 바꿔 "풍 · 경(風 鏡)"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내세웠다. 말하자면 "풍 · 경(風 鏡)"은 자신을 반영하는 일종의 "내면(內面) 이미지"인 것이다. 4人의 작가들은 풍경이라는 세계의 표현과 '나'를 동일화하는데, 이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나무, 달빛이나 호수 등의 이미지는 '나'라는 추상적 본질을 세계에 건립하기 위한 심리적 매개체로 작동한다. 결국 『그룹 'P'』가 펼치는 풍경은 '나'의 감각적 투사가 일어나는 장소이자, 특별한 "자기반영의 공간"인 것이다. 이 존재의 픽처레스크(picturesque; 그림 같은 풍경) 안에서 삶의 기억과 향수는 점, 선, 면, 색, 형태의 힘을 빌려 아름다움의 또 다른 버전으로 되살아난다. 특히 이번 전시는 4人의 작가들이 평소에 작품의 주제로 주목해 왔던 '관계'(relation)를 주요 키워드로 내세운다. 이들이 말하는 '관계'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 일상과 여행 등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건의 구성체이다. 삶의 경험으로부터 회상과 인식으로 이어지는 감성적 매개로서의 '관계'는 그래서 존재의 복잡성을 키워내는 양분과도 같은 것이다.

양지희_암묵의 풍경:관계 NO.1_ 유채, 산수화_가변설치(유채 90×170cm×2, 산수화90×110cm), 90×450cm_2020

먼저, 김리윤의 회화에서 '관계'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애착을 불러오는 심리적 도구로 작동한다. 작가는 주로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일상과 여행의 이미지에 심리적인 색과 형태를 중첩하면서 기억의 노스텔지어를 창안하고, 그 안에 자신의 현재를 투영한다. 그래서 김리윤의 회화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들로부터 인간성의 특별한 측면을 발견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 양지희의 작품에서 '관계'는 자연의 숭고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작은 인간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자기 삶의 순례자이자 방랑자이기도 한 이 작은 인간은 억겁의 시공간 안에 홀로 서 있는 인류의 '우주적 고독'(Cosmic solitude)을 메타포하며, 삶의 무대를 광활한 영혼의 장(場)으로 인도한다. ● 조혜정의 최근작은 무엇보다도 아들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이 소중한 관계는 작가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작가는 자유보다는 숙명으로 다가온 이 관계로부터 또 다른 자신인 아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과 전적인 동화(同化)를 배우고, 관계 맺음의 숭고한 표현을 캔버스로 옮긴다. ● 마지막으로, 주 랑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잡한 기호적 '관계'를 세계의 내적 풍경으로 묘사한다. 이 생경한 풍경 안에서 화면의 부분은 해체적이거나 파편적으로, 전체는 마치 감정의 거대한 뒤엉킴 혹은 비정형의 의미 덩어리로 등장한다. 작가가 구현한 크고 작은 이미지들은 의미의 바다 위를 부유(浮游)하면서 오히려 해방을 쟁취하는 존재의 실체들일 것이다.

조혜정_대나무숲 앰버_캔버스에 유채_112.1×112.1cm_2020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관계'의 유형을 작품 교류의 장으로까지 확대하였다. 참여작가들은 동료의 대표작 1점을 릴레이 형식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작업과 연결하고, 이를 각자의 스타일대로 해석하여 신작을 완성했다. 상호영향 안에서 새로운 창작 동기와 미적 가치를 발견하는 이들의 예술적 연대는 『풍 · 경 風 鏡』 展을 하나의 거대한 감성적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가속한 비접촉 시대의 냉정한 현실 안에서, 『그룹 'P'』의 이와 같은 행보는 우리에게 따뜻한 울림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 그래서인지 이들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물론, 이 아름다움은 환영적이거나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영혼의 생생한 스펙터클로서의 아름다움이다. 그곳이 낯설고 모호한 무의식적 공간일지언정, 그곳이 광활한 자연 속에 홀로 남겨진 고독감을 강렬한 방식으로 소환할지언정, 이들이 제안하는 풍경은 생명성의 또 다른 혁신이다. 감상자인 우리의 삶도 작품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동감하고, 결국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생명의 권리를 회복하게 된다.

주랑_밤바다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0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생명의 환희를 느끼면서도 그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통스럽게 갈구하고, 사랑을 원하면서 동시에 미움도 싹 틔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삶과 죽음의 거대한 서사 속에서 실존의 날갯짓을 펼치는 것뿐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풍경 앞에서 우리의 삶이 그저 세상을 잠시 스쳐 간 잊힌 사건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 이재걸

Vol.20201213a | 風(바람)·鏡(거울): 풍경(風景)으로 나를 만나다-『그룹'P'』 2020 정기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