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at

전윤나展 / JEONYUNNA / 全윤나 / photography   2020_1211 ▶ 2020_1218

전윤나_#01_디지털 C 프린트_46.5×63.6c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실시간 아카이브 SILSIGAN ARCHIVE 경남 사천시 건어시장길 28 silsiganarchive.modoo.at

"우주는 그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의식을 가진 생명체를 필요로 한다." (유진 위그너) ● 전윤나 작가의 작업에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고양이 작업을 주로 했다. 그녀가 선택한 대상은 자신의 고양이와 그 공간인데, 그녀는 반려묘와의 일상을 다양한 느낌의 사진으로 전달하려 한다. 평소 대면했던 낯선 느낌의 상황을 간결한 톤의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유심히 보다보면 일반적인 반려동물을 기록한 사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레임이나 초점 대상이 피사체에서 벗어나 있거나 불명확하다. 고양이가 정확하게 찍혀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양이가 주인공이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윌리엄 웨그먼의 사진처럼 동물이 작업의 중심에도 있지 않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가감이 없이 촬영된 아이들 스냅 사진 같이 고양이는 우연히 찍힌 듯하다. 그녀의 사진에는 고양이와 작가가 동시에 등장하는 사진이 많다. 일방적인 시점보다 3자의 시점을 택한 사진이 주다. 아마도 작가는 고양이와의 동등한 관계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진프레임 속 서열이 고양이와 집사 관계쯤 되리라 본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거주 공간을 고양이에게 내어주고 사진에 그 공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집 공간 여러 곳을 유유히 거닐며 장난치고 노는 고양이와 더불어 작가의 공간과 고양이의 공간은 모호해져버렸다. 어쩐지 그 공간과 고양이는 작가와 닮아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독립적이고 개성 있고 겉으로 까칠하며 속으로 따뜻한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지향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과 닮은 고양이를 키우며 자신의 모습을 고양이에게 투영하였는지 모른다. 그녀의 작업 방식이 보여주는 지점은 무엇일까?

전윤나_#02_디지털 C 프린트_46.5×63.6cm
전윤나_#03_디지털 C 프린트_46.5×63.6cm
전윤나_#05_디지털 C 프린트_46.5×63.6cm

아마도 그녀가 사진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애착과 상호작용이 아닐까 한다. 사실 애완동물하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파블로프의 개가 떠오른다. 과학계의 동물이 등장하는 2가지 실험인데, 파블로프의 개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확인한 조건반사행동에 관한 실험이었다. 이것은 동물을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라 볼 수 있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에 관한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기 위한 상상 속 사고실험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반박할 때 주로 등장하는 사고 실험인데 현대과학에서 원자가 파동이냐 입자냐에 대한 논란의 시발점이 된다. 알려져 있다시피 어떤 물질이 파동이라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다 차원의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사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양자역학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고 분명하게 판단하는 이 세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준다.

전윤나_#07_디지털 C 프린트_23×23cm
전윤나_#08_디지털 C 프린트_23×23cm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지점은 관측이라는 활동이다. 이후 과학자들이 증명했다시피 미시세계의 존재와 의미들이 타자의 관측이라는 상호작용에서 결정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평소 파동 혹은 입자였던 원자가 관측이라는 에너지의 개입 때문에 입자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어떤 물질을 설명할 때 관측하기 이전에는 그 존재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완벽한 공간이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없기에 모든 대상은 무엇으로부터 관측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완벽한 관측이 없는 공간에 존재할 수 없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시시각각의 에너지의 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우리가 살면서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결정지어 줄 관측자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이게 할 수 있게 하는 관측자이다.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당신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듯이.

전윤나_디지털 C 프린트_23×23cm

전윤나 작가의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관측이라는 활동과 상호작용이 있다. 고양이는 작가를, 작가는 고양이를 서로 확인한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애착관계를 통해 현존재를 확인한다. 여기에는 파블로프의 개 같은 조건반사 활동도 있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이 간섭이라는 상호작용 또한 있다. 현대인들이 반려동물과 애정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여러 가지 상호관계를 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이것을 일종의 존재 확인 과정이라 부르고 싶다. 철저하게 아무런 힘이 작용하지 않는 혼자일 때 그 존재는 특정지어지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조금만 확장해보면 생명체와의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비약하자면 항상 파동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내 존재를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옆의 관찰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대로 나라는 관찰자로 인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과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나는 또 다른 세계의 관찰자가 되므로. 우주 또한 나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함께하는 옆에 무엇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 실시간 아카이브

Vol.20201211e | 전윤나展 / JEONYUNNA / 全윤나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