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309h | 이해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원도_강원문화재단 작품제작지원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12(옥인동 62번지) Tel. +82.(0)2.720.8488 www.gallerylux.net
꿀렁이는 경계에서 ● 이해반은 경계의 풍경을 담아낸다. 이번 전시의 시작점이 되는 장소는 금강산이 내다보이는 군사지역 707OP. 전시장 한쪽 벽에 넓게 펼쳐진 화려한 금강산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본 풍경을 담고 있다. 풍경에 앞서, 거기에는 팻말이 하나 붙어있었다. "이곳은 전방지역 접근 및 사진촬영이 금지된 지역으로 위반 시 군사시설 보호 제 17조에 의거 의법조치되오니 상기사항을 준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반은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그곳의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풍경을 몸에 잠시 담았다가 손으로 꺼내었다. 그곳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은 불법이지만, 이해반의 그림들은 법을 피해간다. 너무도 간단한 이유. 그림이기 때문에. 왜 사진은 안되고, 그림은 되는가? 사진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사실을 담아내는 기계, 다시 말해 '자연의 연필'이고, 연필을 든 인간은 사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주관적인 판단의 동물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담아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미 진실 이후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오늘날 사진은 빛이 필름에 새긴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다. 사진 이미지의 조작과 변형은 완전히 보편화되어 이제 누구도 이미지가 진실을 담아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히토 슈타이얼은 『진실의 색』에서 차라리 신빙성의 아우라는 식별할 수 없는 이미지에 담긴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선명하고 날카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구 흔들려 상황을 분별할 수 없는 이미지를 오히려 진짜 상황이라고 받아들인다. 흐릿한 현장의 모습만 겨우 전달하는 전쟁 보도의 이미지는, 그 자체의 흥분 이외에는 어떤 사실도 담아내지 않지만, 그런 이미지의 표면에서 진실은 슬쩍 고개를 들어 보인다. 재현이 아닌 표현의 이미지, 그 정동의 표면에서 진실은 가능성을 되찾는다. 이제 다큐멘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실존했던 지옥, 나치가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캠프에서 찍힌 사진들에서 흘러나온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유태인들이 목숨을 걸고 찍어 남긴 그 네 장의 사진 중에서, 가장 망친 한 장. 너무 흔들려 어디를 찍었는지 분간이 안 되는 이미지가 머금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미술사학자는 망해버린 사진이 당시의 상황을 그 어떤 것보다 잘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위급함 자체가 그 이미지에 담겨있었다. 여기에서 이해반의 풍경들이 추상적인 화면으로 쪼개지는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금강산 풍경 양옆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캔버스들은 추상적이고 물질적인 표면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해반이 보았던 것을 담아낸 이미지이다. 군사 지역의 관계자는 방문자들에게 망원경으로 금강산의 풍경을 확대하여 보여주었고, 그곳에는 이상하게도 기하학적인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관계자는 그것을 북한군의 벙커라고 설명했다. 자연의 풍광에 박혀 있는 네모 칸들. 그러니까, 가장 자연적이면서 가장 정치적인 풍경. 이해반의 추상에서 솟아오르는 구체성과 그것의 정치를 생각한다. ● 또한 풍경 자체가 세계 바깥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발견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문학에서의 근대성과 풍경의 탄생을 연결하여 논하는 가라타니 고진은, 풍경은 주체가 자연을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가능해진 근대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자연을 그대로 담아내는 방법은 애초에 없다.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 주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풍경에서는 당연히 자의적인 투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풍경을 담은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기 때문에 진실에 가닿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진실은 이제 사실을 담아낸 화면이 아니라, 정동이 들뛰는 표면에 있다.
다시, 이해반은 경계의 풍경을 담아낸다. 경계 위에 서서, 혹은 경계 너머에서, 무엇보다 경계 안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캔버스에 압록강 위에서 느낀 것을 쏟아낸 작업을 보자. 이해반이 그려낸 압록강은 강이면서 동시에 국경이다. 그 경계의 풍경에는 액체 상태로 꿀렁이는 물질이 가득 담겨 있다. 거기에서 경계는 순간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선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의 두께를 가진다는 점이 포착된다. 선이 아닌 면으로서의 경계, 날카롭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액체가 되어 흐르는 경계가 그곳에 있다. 경계 안쪽에서의 풍경은, 세계 전체가 꿀렁이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을 담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해반이 딛고 있는 경계는 물리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에는 자연과 인공, 주관과 객관, 내용과 형식, 사실과 진실, 추상과 구상 사이의 경계가 모두 뒤섞인다. 그 이미지의 표면에는 다중의 경계들이 입체적으로 겹쳐진다. 나아가 그는 이미지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시도한다. 다만, 경계 자체가 꿀렁이고 있기에 그곳에는 경계를 넘어가려는 움직임만 담길 뿐이다. 범람하는 경계 속을 헤엄치는. 다중의 경계 속에서 흔들리는. 풍경의 이미지. ■ 권태현
Vol.20201209f | 이해반展 / LEEHAEVAN / 李諧盼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