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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1205_토요일_05:00pm
기획 / e.renaissance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통의동 보안여관 ARTSPACE BOAN 1942 서울 종로구 효자로 33 신관 B1 아트스페이스 보안 2 Tel. +82.(0)2.720.8409 www.boan1942.com
경계에 관한 소고(小考) ● 1. 장애(disorder)는 언제나 타자다. 공동체의 삶은 생각 외로 견고하기 때문에, 객체는 경계를 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장애가 우리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자신의 영역에 서 있을 때만 우리는 이를 존중한다. 이는 호혜(互惠)로 포장된 명백한 멸시다. 이 기울어진 관계를 우리는 차별이라고 한다. ● 일반적으로 장애를 설명하는 단어들을 떠올린다. 불편함, 결여, 부족함, 방해. 그 어떤 단어도 동등한 의미가 없다.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제한다. 정상과는 다른 불편함, 정상에 비해 부족한, 정상적인 삶을 살기에는 방해되는 등 독립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의미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정상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어리숙하게 합의된 무의미한 기표다. ● 이 명확하지도 않은 언어들이 우리의 인식구조를 형성한다. 알량한 도덕감은 매사에 우리를 침묵하게 한다. 장애와 관련한 논의들을 입에 올리거나 비판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배려로 시작한 행위들이 더 명백한 경멸이라는 것을, 모두 알지만 아는 체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는 그것을 주제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주제로 다룰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장애를 말하는 일은 당사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락된다기보다 미루는 것에 가깝다. 이상한 눈치게임이다.
2. 나에게 장애는 좀 더 경험적인 것이다. 불편이나 결여 정도의 단어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구체적 삶이며 동시에 그 주변인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실천을 요구한다. 장애인의 생활은 오롯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 주변의 인생이 모두 덧붙여진 커다란 덩어리에 가깝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도전이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조차 버겁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디다. 장애를 돕겠다는 제도들이 오히려 장애인을 옥죄기도 하고, 배려하는 시선들이 못 견디게 괴롭기도 하다. 봉사자와의 만남의 기저에서 간혹 작은 동정심이라도 발견하는 날에는 밤새 잠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장애인 개인의 잘못으로 돌아온다. 마치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말이다. ● 나에게 장애는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체장애 때문에 혀를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생이 뜨거운 국물을 먹다 혀를 데는 일, 따뜻한 설렁탕이 먹고 싶어 음식을 주문한 자신을 자책하는 이모, 소리를 지르는 동생을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황급히 주변에 사과를 하는 나, 식사를 채 마치지 못하고 식당에서 나와 계속 보이지 않는 허공에 욕을 하는 동생을 달래며 어정쩡하게 길에 서 있는 우리 셋이 바로 장애의 정의다. 복지관에 보내기 위한 장애등급을 받기 위해 주기마다 탄원서를 쓰는 일, 종종 사라지는 아이를 수소문하는 일,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데려가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는 일들이 장애를 설명한다. 무수한 경험들 속에서 정당한 근거 없이 우리는 각자 자신을 원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대상에는 우리가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배려아닌 배려들은 빠져있다. ● 유화수의 작업에서 장애물 놀이터는 장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조차 시도할 수 없는 장애가 일상에 놓여있다. 나는 길을 걷는 장애인들의 유쾌한 발걸음에서 동생과 함께 서있던 황망한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응시하는 화면 밖의 내가 오만한 목격자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3. 예술은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발언에는 무수한 윤리적 잣대가 가해진다. 선의를 의심하고 문제의식을 그 자체로 다시금 도마에 올린다. 작가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자기당사자성이 발목을 잡는다. 마치 장애와 관련된 모든 활동의 권리와 책임은 장애인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와 관련한 활동들은 너무 오랜 시간 그저 그런 방식으로 지속되어 왔기에 때로는 식상한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공익의 그림자가 너무 오래된 탓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은 한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한 것이다. 잠긴 문제를 열 수 있도록 눈앞에 가져다두고 사람들의 인식구조를 변화시키는 것, 타자로써 대상화되었던 장애를 경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추상적인 장애의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그 모든 것이 예술만의 역할이자 영역이다. 그리고 이 때 예술에 주어진 발언의 자격은 그 누구에게라도 충분하다. ● 『예외상태』라는 전시명에서 알 수 있듯, 장애와 관련된 주제는 언제나 외(外)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시도는 이 주제를 다시금 사회구조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원래 있었던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구조의 한 켠을 새로이 만들어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구조 안에 있었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들의 작업은 우리의 편견에 근거한 감정들을 촉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유쾌하고 흥미롭다. 그러나 작업들을 보면 마냥 즐거울 수는 없다. 분명하게 마주해야 할 불편함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우리가 그냥 지나친 것들에 대하여 다시금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든다.
4. 과학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명백하게 해명하는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설명이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기술은 인간 증강을 위한 통로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장애인들이 기술을 통해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신체를 획득하길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양의 작업은 마치 옳은 가치로 여겨지는 정상의 의미를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중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을 이상(異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단지 개별적인 나름의 경험들로써 우리의 곁에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장애를 결여가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자는 문장은 옳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웅크린 뒷모습의 이미지들을 등진 채로 계단을 튀어 내려오는 장난감들의 연속된 움직임들의 리듬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들 삶의 다양한 면면이 존재함을 느낀다. ● 신체적 불편함이란 어떤 기준으로부터의 결여일까. 불편하다는 것은 단지 좀 더 많은 인내심과 행위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배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끔 차별하지 않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그들이 일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도움은 그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장애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책임은 특별하지만 차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지 않고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어쩌면 이조차도 시시한 자만심일 수도 있겠다.
5. 장애를 다루는 예술은 대체로 몇몇 형식들이 정해져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장애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부당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예술이 언제나 자신의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이는 이상할 것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장애를 다루는 예술의 범주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장애예술은 마치 경계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된 예술장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타자화는 배려를 가장한 구획짓기다. 예술은 장애에 관해 더 많은 문제의식과 공감을 드러내야 한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우리가 가진 부당한 우월의식에 일침을 가한다. 과거 신체 이형의 사람들을 눈요깃거리로 여기던 우생학적 태도를 솔직하게 비판한다. 아무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이 신체의 불편함을 극복하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오만함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 이번 전시에서 나는 장애를 설명하는 문장들을 읽어낸다. 장애는 경계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고,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 공동의 책임이다. 내 삶에서 장애는 그 어떤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늘 타인의 삶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전시는 그 어떤 감정적인 호소 없이 나를 위로했다. 위로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 천미림
장애에 대해서 말하는 것 ● 장애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몇 년 전부터 부쩍 장애인에 대한 발언들이 많아지면서 그 의도와 상관없이 구설수에 오르기 일쑤다. 대부분 선의의 감정을 바탕으로 해온 말일터. 하지만 이조차도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는 지긋지긋한 상처의 연속일 일테다. 차라리 말을 말지. "차별은 공기와 같아 기득권에게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 (김승섭) ● 장애에 대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떨까. 얼마나 많은 자기 검열과 오해를 감수해야 할까. 그리고 굳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를 일을 왜 해야 할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주제로 한 이 전시는 장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장애인 당사자만이 아닌 사회구성원이 같이 다뤄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장애 관련 포럼 및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작가로서 장애에 대한 접근은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장애를 손상 및 질환으로 여기고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서만 벗어난다면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전시도 더 이상 기존의 장애예술의 루트와는 다르게 장애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유화수
Vol.20201205c | 예외상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