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Go La Ni

백인태展 / BECKINTAE / 白仁泰 / painting.drawing   2020_1203 ▶ 2020_1217 / 월요일 휴관

백인태_고슴도치_드로잉 형태를 취한 디지털이미지글_가변크기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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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인천광역시_인천문화재단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부연 婦椽 Buyeon 인천시 중구 개항로106번길 8 www.instagram.com/buyeon.site

삶이 우스운가? 백인태의 '작품'을 보라.-그의 두 번째 『고라니』에 부쳐1. 웃기지도 않은 '작품'들을 본다. 아무렇게나 찍찍 그리거나 대충 그어댄 글씨로 이루어진,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엄청난 양의 어떤 흔적 같은 조각들은 우스운데 웃기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백인태가 창조해낸 세계인 『고라니』 속 '작품'들을 보라. ● 스스로 "변두리의 작가"라고 칭하면서 "어제도 오늘도 art에 허탕 치다가" 마침내 뱉어내는 자조 섞인 한 마디, "나도 알아, 엉터리인 거." 늘 이런 식이다. 진지하게 "나는 예술에 대한 신앙과 실력이 부족합니다."라고 의뭉스럽게 써 갈겨놓고는 이내 "비웃고 무시하는 자네는 잘나서 참 좋겠네."라는 말로 세상에 송곳니를 드러내는 듯 제법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꼭, 일등 해서 부모님 호강시켜 드릴 거야 기대 환영"과 같은 언사에 이르면 헉, 하는 헛웃음이 난다. 헛웃음은 '아직은 무명인' 청년예술가라는 그의 현재 상황(무명이므로 그는 늘 돈이 궁하다. 따라서 돈에 대한 언급은 그의 '조각'들에 빈번하게 등장한다.)에 대한 공감과 그런 그의 상황을 스스로 너무 솔직하게 드러낸 나머지 비어 있는 뒤통수를 때리듯 역설적인 통쾌함이 뒤섞인 심리 반응이다. 그의 『고라니』 속 작품 혹은 조각들이 우습지만 웃기지는 않은 이유다.

백인태_무제_종이에 아크릴채색_105×90cm_2016

2. 역시 웃기지만 진지한 이야기. 웃음은 웬만해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어느 날 '거북이와 두루미'를 찾아 백인태 작가에게 물었다, 왜 『고라니』냐고.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오호라. 그중에서도 그의 시집 『사슴』을 좋아한단다. 언젠가는 『사슴』과 같은 불멸의 작품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의 '작품집'에 사슴을 닮은 '고라니'를 갖다 붙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어감도 나쁘지 않다. 고라니, 고라니, 고라니. 때로 지나친 진지함은 무방비의 상대를 당황케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이 땅에 사는 청년예술가로서 어찌 꽃미남 시인 백석을 좋아하지 않을 재간이 있을 거며, 불멸의 시집 『사슴』을 어찌 흠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알다시피 『사슴』에 실린 「여우난곬족」과 같은 시들은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의 사투리를 쓴다. 그곳의 말을 알 리가 없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시의 온전한 내용을 해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어려운 말로 '시적 긴장력의 이완'이라고나 할까. 한편 백인태의 『고라니』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의 들쑥날쑥한 의식·무의식의 세계가 어떠한 맥락이나 연결고리도 없이 땅바닥에 팥알을 던져놓듯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났다가 빗자루로 쓰윽 쓸어버린 양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기교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쯤 되면 아무런 개연성 없이 등장과 퇴장이 반복되는 하이퍼텍스트의 매트릭스가 연상된다. '시각적 정연함의 와해'라고나 할까. 무슨 소리냐고?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정신세계의 향연이라는 말이다.

백인태_무제_종이에 아크릴채색_100×90cm_2016

3. 『고라니』는 백인태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자 무던히도 자맥질한 궤적으로 읽힌다. 그 속에는 이른바 '고급예술'에 대한 선천적 저항이라는 전략과 회화의 속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몇몇 시도가 잠재되어 있다. ● 일단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의 속성은 '그려진 이미지'가 아닌 '쓰인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이는 제스퍼 존스(Jasper Jones, 1930~)가 「알파벳 시리즈」에서 시도했듯 문자(text)라는 기호가 과연 이미지로 변환될 수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논의의 문제가 아니다. 백인태는 그저 그림일기를 쓰듯 그날그날의 사유를 작은 종이에 옮겼을 뿐인데, 본디 작가인 그의 '쓰는' 행위는 단순한 텍스트의 내용과 호응한 이미지로 뜻밖에도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즉, 그의 텍스트는 이미지와 상보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테면 「사람인걸요」(399)에서 초록, 연두, 하늘색, 흰색의 바탕 위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걸요."라는 텍스트가 사뭇 '정직한' 서체로 놓인다든지, 그럴듯한(사실 조악한 필치다) 난초 그림 밑에 세로로 "난 어쩌죠"라고 수줍은 듯 적고 그 밑에는 백문방인의 전각까지 찍힌 모습(68 「난 어쩌죠」)이 그렇다. 그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그림과 텍스트가 주고받는 게임과 같이 동시에 등장한다는 점은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백인태_무제_종이에 아크릴채색_100×90cm_2016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하나의 특징을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보적 관계라고 표현하였지만, 쉽게 말하자면 삽화와 글이 어우러지는 화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라니2』에 등장하는 「차디찬 밤」, 「하루살이」가 그런데, 「고슴도치」와 같은 작품에 이르면 글 자체가 시각 이미지를 확보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더 강력한 논거는 텍스트 자체가 갖는 힘이 아닐까. 위의 작품처럼 이중의 함의가 담긴 말장난(난 어쩌죠/蘭 어쩌죠), 즉 언어유희를 즐기는 태도라든지(100 「나 요즘 좆나 행복한걸」), 붉은색으로 굵게 그림으로써 근거 없는 비난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뜻을 보이는 「혹평 반사」(84), 국가 권력에 대한 은근한 야유가 담긴 「물부족 국가라던데」(108) 등은 사적·공적 삶에 대한 발언으로 읽힌다. 거기에 최근의 코로나19 상황에 대한 언급(「역병효과」)은 은근한 풍자로 촌철살인의 매력을 더한다. ● 그런가 하면 불평등한 게임의 시대를 사는 청년예술가가 "내가 복권에 당첨된다면 아껴 쓸 자신 있습니다."(113 「당첨된다면」)라고 호소하는 글귀나 "뭐라도 해, 병신아. 시간 흘러가잖아."(122 「뭐라도 해」)라며 누군가(자신일 가능성이 크다)를 다그치는 장면에 이르면 이제 더는 그의 흔적 혹은 조각들이 우습거나 시시하게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백인태는 날 것의 텍스트라는 전략으로 불평등한 사회제도와 권위에 끝없이 잽을 날리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예술가 본연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태_무제_종이에 아크릴채색_103×90cm_2016

첫 번째 『고라니』 출간 이후의 최근작은 점차 텍스트 중심의 경향에서 초현실적 경향을 띠는 회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하는 듯하다. 종이에 아크릴 물감으로 덕지덕지 바른 그의 「무제」 시리즈에서 우선 느껴지는 건 불안과 공포다. 초현실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어두컴컴한 화면은 그대로 그의 불안한 심리와 그에 대한 방어기제를 드러내는 동시에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모호한 감정선을 미묘하게 건드린다. 낯설고 불안한 꿈의 세계와 만난 한 예술가는 엉뚱하게 그 속에서 (나뭇가지가 아닌 먹는) 가지가 되기도 하고, 이파리 없이 휙휙 휘어지는 나무가 되기도 하며, 덩그라니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형상들은 비언어적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그의 회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거대한 나무가 자라는 숲」 시리즈는 색채를 제거한 드로잉으로, 일찍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언급한 고흐의 낡은 구두가 등장하기도 하고,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녀의 음울한 뒷모습이 눈길을 끌다가 모든 나무가 잘린 등걸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이미지에 이르면 보는 이조차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환상의 차원으로 낙하하는 듯하다. 최근작 「먼지」 시리즈는 또 어떤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지극히 단순한 화면은 점·선·면이라는 역시 거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명료성을 특징으로 하는 바, 폭발, 속도, 낙하, 극적 대비와 관조 등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단말마적인 감각의 환기를 유도한다. 말하자면 화면은 명료하나 내용은 모호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이미지의 반복과 과잉을 통해 백인태는 비언어적 이미지의 형식 실험을 시작했다고 보인다. 그는 모두 세 차례의 『고라니』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그가 제시할 세 번째의 『고라니』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백인태_무제_종이에 아크릴채색_103×90cm_2016

하나 더. 그가 제시하는 화면은 독특함과 조악함 그 어디쯤 존재하므로 기존의 예술 문법으로는 평가하기 불가능한 속성을 지닌다. 이런 점은 예술이라는 정형화된 제도 자체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B급 감성일 수도, 의도적으로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전략일 수도 있으나, 결국 그의 이러한 경향은 어떤 지점에서는 예술 제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권위와 명예를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데 무척이나 유효한 전략으로 읽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백인태_가난뱅이 복원기술원_종이에 유성펜, 마스킹테이프_51×15cm_2019

4. 이처럼 백인태의 『고라니』는 견고한 제도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좌절, 만만치 않은 젊은 예술가의 삶이라는 내용과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텍스트라는 형식이 결합, 흉내 낼 수 없는 고라니의 울음소리처럼 이 시대를 날카롭게 증언하는 강력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 강력함은 강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의 『고라니』에 공감을 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증언하는 세계와의 조우와 행복한 연대가 가능해지리라. ● 반복하지만 작가 백인태는 스스로 "변두리의 작가"라고 말한다. 만약 이른바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곳이 변두리라면, 혹은 자본과 학연으로 만들어진 이너써클로부터 호출받지 못한 처지를 일컬어 변두리라고 명명한다면,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도 좋다. 다만 이곳 변두리에는 '중앙'과 '이너써클'에서는 엄두조차 못 낼 생생한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명징하니까. 이제 고개를 들어 누구도 밟지 않은 길을 당당히 걸어가도 좋을 일이다. 어딘가에서 툭툭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야생의 고라니처럼 이제 수많은 변두리의 고라니들의 시대를 깨우는 건강한 몸짓이 기대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테니 말이다. ■ 박석태

Vol.20201203a | 백인태展 / BECKINTAE / 白仁泰 / painting.draw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