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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혜 홈페이지_www.artcelsi.com/yoonyounghy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갤러리 아트셀시 예비전속작가제지원展
후원 / 예술경영지원센터_문화체육관광부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셀시 Gallery Artcelsi 서울 강남구 학동로38길 47 EISO빌딩 B1 Tel. +82.(0)2.3442.5613 artcelsi.com/gallery
'아무 것'도 '어떤 것'도 '아닌 것' - ANYTHING, SOMETHING, NOTHING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작품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파이프를 그림 속에 그려 넣고 그 밑에 이 문장을 넣어 인식체계를 흔들만한 장치로 활용한다. '모순된 어법'으로 관습적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그는 그것을 꼬집어 내기보다는 보이는 것 너머의 사고를 제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윤영혜는 그 것을 차용한 'THIS IS NOT ANYTHING' 이라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의 의견에 열렬히 동조하다 못해 더 나아가 명확한 지시 대상의 부정을 넘어 더욱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한 대상의 부정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대상 조차도 의심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채 말이다. 'ANYTHING'은 '무엇', 혹은 '아무거나'처럼 어떤 대상도 담을 수 있는 존재로서 때에 따라 'SOMETHING' 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NOT'으로 부정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 '어떠한 것도 아닌 것'으로 풀이된다. 즉 어떤 대상을 담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간주되는 'NOTHING'의 의미로 바뀌는 것처럼.
윤영혜의 작품 '유화물감으로 드로잉한 글'은 흰 모노크롬 회화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는 'THIS IS NOT ANYTHING' 이라는 문장이 숨겨져 있다. 실상은 작업 순서로 보자면 숨긴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점선으로 드로잉 하듯 한가지 색의 재료로 문장을 써 넣었고, 단지 배경을 같은 방식으로 메꿨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흰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발린 '단색화'처럼 보일 뿐이다. 일어났던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면 분명히 일어났던 사실인데, 비슷한 주변상황 때문에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의도와 달리 은폐되어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심지어 문장의 '오독(?)'의 여지 마저 내어주지 않는다.
'THIS IS NOT ANYTHING'은 연이어 나오는 작품들의 '키'가 된다. 한마디로 모든 작품들은 이 그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파생된 작품을 통해 원본의 작품을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거나 편집된 이미지들은 원본의 숨은 그림 찾기를 더욱 부추긴다. 미시적 공간이 거시적 풍경으로 재현되기도 하고, 물감이 아닌 재료로 물감처럼 페이크(fake)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무언가를 그린 어떤 것 같기도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미지로써 설명하기 힘든 풍경이 펼쳐진다. 일견 햇빛이 부서지는 한낮의 강물이나 파도처럼 광활한 자연을 닮거나 대지를 연상시키는 불연속적 이미지가 마치 이어지듯 나타난다. 이는 모두 세개의 캔버스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거나 반복하는 것들로 나타난다. 때로는 날카롭기도 유연하기도 한 기이한 이미지들이 배치 되어있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앞서 언급한 'THIS IS NOT ANYTHING' 이 숨겨진 흰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기인한다. 윤영혜는 이 문장이 쓰인 그림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작품을 통해 '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굳이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로 비쳐낸다. 요컨대 이 의미를 가리는 페인팅을 다양하게 양산 하는듯 보이나 사실상 '이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역설 방식은 회화어법에서도 드러난다. 물감이 캔버스에 두껍게 발리고 얹어진 장면은 마치 '이것이 페인팅이다.'라고 스스로 발화하는 듯 하나 윤영혜는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다. 그 말을 낚아채 틀어 버리기라도 하듯 다른 방식의 화법(클레이, 일루전 등)으로 그린 회화를 제시하고는 다시 질문한다. '이렇게 해도 이것은 페인팅입니까?' 라고 반문하며 관람객 스스로 정의 내리고 판단하는 것을 방해라도 하듯 다시 또 비틀어 놓는다.
그렇다면 윤영혜는 왜 지속적으로 이처럼 경계 짓기 모호한 것, 혹은 정의 내리기 모호한 것들에 천착하며 일종의 '비트는 회화'로 재차 역설하는 것일까. 3이라는 숫자가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수론에서는 완전수로 불리며, 3차원 공간 상의 세 점은 곧 평면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대립의 구조보다 상대적으로 모자람이나 흠이 없이 완벽히 견제되는 구조의 수라고 할 수 있다. 윤영혜의 회화는 삼련제단화 (triptych : 성당의 제단 위나 뒤에 안치하는 제단가리개로 만든 회화- 중앙 패널을 중심으로 양측에 날개 패널을 나란히 놓고 문처럼 개폐할 수 있다.)를 연상시킨다. 이 제단화의 역할은 제단 가리개와 동시에 성서의 주제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윤영혜의 '비트는 회화'는 주제를 가리는 '가리개'와 동시에 주제를 드러내는 '이미지'로서, 그녀가 건설한 완전한(?) 체계에 침투하는 존재에 대한 변증법적 방어 기제인 것이다.
회화, 삶, 목적성 ● 이 세가지는 윤영혜와 한 몸처럼 엉겨 붙은 물감덩어리처럼 존재한다. 그 어떤 것도 분절하여 구분 지을 수 없고 이유를 떼어낼 수 없으며 타당성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회화를 위해 자신을 녹여내고 섞어낸 수단으로만 존재 했던 물감이 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과 동시에 목적을 쟁취한다. 삶을 위해 작가, 가족,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녹여낸다. 그렇다면 목적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합일할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그에 상응하는 목표인가? 윤영혜는 인터뷰 중 이 지점을 '지도'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것도 담길 수 있는 '지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어있다. 땅도 바다도 그 어떤 것도 실물로 담고 있지 않는 지도는 그저 '지표'로써 작용한다. 어디론가 가야할 방향이나 목적을 제시하는 기준 따위를 나타내는 '일루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지도를 차지하는 주체 즉, '지도'가 제시하는 곳을 향하는 이들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지도가 지목하는 장소에 다다를 때 마주하는 장면은 어쩌면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주함의 완성은 그 앞에 펼쳐진 공간(空間)에 서있는 '자신'으로 귀결된다. 윤영혜의 목적성은 각기 다른 삶의 주체와 마주하기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순간, 이미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된다. ■ 황윤역
Vol.20201202e | 윤영혜展 / YOONYOUNGHYE / 尹英慧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