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의 배터리를 갈아주기(Replacing the vase battry)

홍세진展 / HONGSEJIN / 洪世辰 / painting.installation   2020_1127 ▶ 2020_1213 / 월요일 휴관

홍세진_구와 동그라미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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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원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월요일 휴관

미술관가는길 WAY TO MUSEUM 강원도 강릉시 수리골길17번길 15-5 Tel. +82.(0)33.651.4500 www.way2museum.co.kr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경계에서 ● "우리 시대,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chimera)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 도나 헤러웨이, 「사이보그 선언문」 중에서 ● 1. 홍세진은 가시적 세계 내부에 청각적 체험을 접목하여 익숙한 경관과 낯선 형상이 절합된 세계를 제시한다. 가시적 세계는 대개 작가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그렇다면 낯선 형상이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홍세진은 어릴 적 고열에 의해 청력의 이상이 생겼고, 이후 인공와우 보철을 장착하여 어느 정도 청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공와우 시스템이란 소리를 신경계로 이어주는 달팽이관에 장착하여 손상된 내이에 전기 신호를 전달하여 청력을 회복하는 진보한 기술이다. 하지만 이 역시 청각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기 신호로 전환된 소리 정보는 신경을 자극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당사자가 곧바로 실제 소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소리에 대한 경험과도 관련이 깊은데, 연령 및 언어적 경험치에 따라 일정 기간 훈련이 요구된다고 한다. 교정 과정도 그리 단순하지 않은데, 유사한 청각장애라고 해도 각자의 사례에 따라 개인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차는 기술의 발달 속도에 따라서 간극이 좁혀지고 있다. 그의 회화 세계에 나타나는 낯선 형상은 인공와우에 의해 인지하는 소리의 경험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홍세진의 작업이 가시성과 가청성이 공존하는 변증법적 풍경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적 해석은 그가 작업을 통하여 어떤 신체적/감각적 결여를 채우거나 대리보충하는 행위로 제한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적어도 예술의 세계 안에서 그의 청력 장애는 약점이나 한계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감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상 범위의 감각이란 지점과 자신이 감각하는 상태 사이에서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주어진 정상 범위의 감각과 자신의 감각 사이의 오차는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인간의 지각은 기능만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지속하는 삶의 시간을 통하여 함께 성장하는 감각의 영역이다. 그래서 인공와우의 장착은 청력의 환원이라기보다 다양한 소리의 경험을 통해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큰 구와 작은 구"(회화, 2020)는 금천 레지던시 주변의 풍경을 그린 회화로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화면 가운데 인공물과 자연물이 혼합된 기이한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근작에서는 유독 구 모양이 자주 나타나는데, 작가에 따르면 이는 인공와우의 형상을 비유하는 메타포라고 한다. "큰 구와 작은 구"(설치, 2020)는 자신이 인지하는 소리의 증폭과 유기체 및 자연을 재현한 인공물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인식하는 가청의 세계를 구조화한다. 잠시 전작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작업들은 일상적이거나 사무적인 실내 공간 안에 마치 유기체처럼 보이는 형체들이 불쑥 솟아오르거나 ("눈앞에 있는 것들", 2017) 다양한 모양의 입방체들이 마치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공간을 점유하는 장면("반복된 도형", 2018) 으로 나타나곤 했다. 언뜻 실재와 가상이 혼재한 상태처럼 보이지만, 비재현적 형체들은 청각의 가림막이거나 보편적인 경험에서 어긋난 낯선 소리의 경험과 이어져 있는 듯하다. 요컨대 홍세진의 회화에서는 보이는 세계 너머의 들리는 차원의 세계가 공존한다. 이는 마치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작업을 두고 하나의 차원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하면 훨씬 흥미로운 상태가 될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뒤샹은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 바퀴를 통하여 키네틱 아트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투명한 유리를 사용하여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홍세진_큰 구와 작은 구_캔버스에 유채_182×228cm_2020
홍세진_풍경_캔버스에 유채_61×73cm_2020

2. 그는 인공와우를 장착한 뒤 다시금 새로운 세계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가 듣는 소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석 불가능하거나 난해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근작의 경우엔 인공와우 기술 발전과의 연관성이 이전보다 두드러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실제의 소리에 보다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은 향상되었지만, 이 역시 적응 기간을 거쳐야만 인식 가능한 소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은 언어라는 개념에 의하여 완성되는 실재의 영역이란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즉 작가는 소리를 인식하지만 여전히 언어가 되지 못 한 비가역적인 소음일 뿐, 의미를 갖는 소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포스트휴먼이란 개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기술은 인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삶의 일부로 진화하고 있다. 도나 헤러웨이(Donna J. Haraway)와 같은 전위적인 철학가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포스트휴먼의 현시를 인류가 나아갈 미래로 제시한다. 그는 사이보그라는 존재가 남성주의, 인종주의와 같은 인류의 오랜 관습과 전통으로 세워진 가치를 허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사이보그란 유기체와 기계를 모두 아우르는 존재로 다뤄진다. 헤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에 대하여, "이 글은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 그리고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을 논한다. 이 글은 사회주의-페미니즘 이론과 문화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한 갈래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자연주의의 방식으로, 어쩌면 태초도 종말도 없을, 젠더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유토피아적 전통을 따른" 1) 다고 말한다. 포스트휴먼이란 존재는 단순히 기계와 인간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젠더 없는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홍세진의 작업과 연결해 본다면, 이는 "장애 없는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다.

홍세진_잎과 도려낸 조각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20
홍세진_도려낸 도형과 병풍_캔버스에 유채_73×73cm_2020
홍세진_꽃병의 배터리를 갈아주기展_미술관가는길_2020
홍세진_꽃병의 배터리를 갈아주기展_미술관가는길_2020

3. 홍세진은 장애로 인식되는 청력의 결함 또는 결핍을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가시적 세계와 가청적 세계 사이에서 일종의 어긋남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장애의 유무와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장애인 작가들을 두고 장애를 극복한 신화 서사 또는 천재라는 틀을 씌우곤 한다. 이러한 전형적 서사는 정상이란 기준점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많은 작가가 이러한 편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비록 홍세진이 장애와 인식의 문제를 건드리는 작업을 명시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지만, 인공기술의 개입이 정상 범위의 기능이 아닌 이에 따른 사이드이펙트(side effects)에 집중한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 사이에서 나타나는 '어긋남의 감치기'는 존재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서 청각장애는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신체가 아니라 '차이를 가진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홍세진은 감각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하는 소수의 감각들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두고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실재라는 영역이 얼마나 추상적일 수 있는지를 새삼 생각해 볼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세진의 작업은 정상적인 감각을 되찾으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가장 가까운 자신의 감각에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21세기의 "실재의 귀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정현

* 각주 1) 도나 헤러웨이, 『헤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19-20쪽

Vol.20201127e | 홍세진展 / HONGSEJIN / 洪世辰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