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광주회원 / 강남구_김강수_김선희_김영란 김재현_박해경_서강식_서현호_유태환_이경순 이순행_이인호_임경록_임종호_장복수_정난주 정미희_정성복_정한울_지연심_하대식_박해경 대구회원 / 장정희_김선영_김정기_김희경 김희라_김희열_박동조_신동호_우춘홍_이경숙 이우열_이운우_이종갑_정선희_조순옥_최선영 박영옥_권미경_이신혜_정희숙_이정란_허정순 이태경_김홍광_민경옥_박성희_박인주_장수경 모미화_피미경_이태현_김성희_김회원_옥지난_김휘
2020 DSAC 퍼블릭아트플랫폼4
주최 / (재)달서문화재단 웃는얼굴아트센터 주관 / (재)달서문화재단 웃는얼굴아트센터_대구예인회
관람시간 / 10:00am~12:00pm / 02:00pm~05:00pm / 일요일 휴관
웃는얼굴아트센터 갤러리 SMILING ART CENTER 대구시 달서구 문화회관길 160 별관 1층 Tel. +82.(0)53.584.8720 www.dscf.or.kr
80년대 이후 광주 현대미술의 변화와 확장 - 격변기현실주의 참여미술과 청년미술계의 변화 ● 남도미술은 오랜동안 호남남화와 인상파유형의 자연주의 서양화가 두 축을 이루어왔다. 자연과 더불어 피안의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호남남화와, 초기 유입시기인 일제시대부터 정형화된 서정적 향토주의와 전통적인 자연감흥 위주의 구상회화이다. 동·서양화의 유형은 다르지만 둘 다 '자연'을 전거로 삼는 심미적 태도였다. 따라서 남도미술은 사회 현실이나 일상의 삶과는 거리를 둔 예술적 흥취와 정서적 위무가 주가 되는 심미활동의 세계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들이 싹트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80년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예술의 대사회적 복무'라는 본질적 역할에 대한 의식과 활동의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시민공동체의 좌절과 상처가 사회·문화·제도 모든 구습과 모순된 역사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지가 결집되면서 시민사회운동으로 진행되어 간 것이다. 미술 쪽에서도 80년대 문화변혁운동이 확산되고 그 중심에 민족민중미술 또는 현실주의 참여미술이 예술의 대사회적 복무의 선봉역할을 실천하게 되었다. ● 80년 5·18광주항쟁 직후부터 독특한 콘테·수채화 기법으로 저항과 고발의식이나 민초들의 진솔한 삶의 서정을 담아낸 강연균, 시대변화에 대응하는 사실주의를 모색한 신경호·황재형·홍성담 등의 「2000년작가회」, 진경우·조진호·김경주·한희원 등의 목판화·수묵화운동, '시각매체연구회'의 만장·걸게그림·벽화제작, 「땅끝」(조선대) 「불나비」(전남대) 등의 대학 미술패들의 활동 등과 88년 결성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등이 그 예다. 이들은 90년대 중반, 특히 95년 망월동 오월묘지에서 안티비엔날레로서 '광주통일미술제'를 정점으로 변혁기 시대현실 속에서 시민사회운동과 연대하며 문화적 자주성과 민족적 미술형식, 민중정서의 대변 등 예술의 역할과 가치를 새롭게 정립시키고자 하였다. 이 현실주의 참여미술은 문민정부 이후 달라진 사회문화환경 속에서 집단의 활동방식이나 개개인의 창작세계에서 이전의 '이념'과 '사회현장'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미적 정서'와 '예술적 공감'으로 옮겨가면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펼쳐가고 있다.
이와 함께 한편에서는 급변하는 사회 문화환경에도 불구하고 답보상태에 있는 기성 미술계 풍토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자구책을 모색하려는 청년세대 활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는 부정하게 연장된 군부집권기의 사회 정치상황은 물론 지역 또는 미술계, 학내에 쌓여 온 집단적 불만과 저항의식이 87년을 전후로 재점화된 민주화운동의 열기와 외부세계 정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자극이 더해지면서 시대문화에 대한 욕구와 실행들로 터뜨려진 것이다. ● 과거 저항예술의 다른 표현수단이었던 비정형 추상형식(앵포르멜, 액션페인팅 등)이 부정과 파격, 행위의 흔적 위주 해체추상으로 차용되고, 회화성과 화면형식을 확대하려는 작업들이 일군의 시대양식을 이루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활발히 펼쳐진 '신형상성의 모색' '채묵의 변용'이 큰 축을 이루고, 돌파구로 외국 유학이 급증하는가 하면, 미술형식과 예술개념, 작가의식 면에서 전통의 틀이 무너지고 '회화'에 대한 인식자체부터가 다변화 된 것이다. 예술의 거리와 광주천에서 청년작가들이 펼쳐낸 광주미술제(1993, 1994)를 비롯, 90년대 중반 이후 점차 확대되어가는 현장중심 공공미술프로젝트(97광주비엔날레 특별전-공공미술프로젝트, 2003·2007 중흥3동프로젝트, 2007양동 통샘마을프로젝트, 2008광주비엔날레 대인시장 복덕방프로젝트)도 도시공간과 문화를 결합하는 공공개념의 청년세대 예술활동의 예들이라 하겠다.
도시변화를 이끌어낸 광주비엔날레와 파급효과 ● 예술이 시대문화와 사회를 어떻게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 오래된 명제인 이 질문에 광주비엔날레는 구체적인 사례로서 제시된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은 광주는 물론 한국 현대미술과 도시문화 변화에서 신개념 문화 해방구이자 발신지로 작동하면서 수많은 영향들을 만들어내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술개념과는 전혀 다른 파격과 실험정신으로 대중과는 별개의 전문영역인 것처럼 여기지만, 예술뿐 아니라 대 사회적 메시지를 자유로운 소재나 형식으로 펼쳐내면서 현실과 미래와 인류에 대한 다층적인 관점들을 제시해 왔다. 매회 기획자마다 광주와 인류사회와 현대미술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진단 조명하고 그 현상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미술행사만이 아닌 인문·사회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 창설 당시 문민정부 정책구호였던 '세계화 지방화'의 실천, 예향전통의 현대적 계발,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한 도시의 집단적 상처를 문화예술로 치유하며 미래로 나아간다는 취지에 따라 단지 미술전시회 이상의 사회문화적 복합의미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매회 사회문화 이슈들을 주제로 내걸고 무한형식의 설치와 첨단전자기기, 영상미디어매체들까지 통념을 깨트리는 시각예술작품들로 진보적 광주정신과 혁신의 비엔날레 정신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광주의 척박한 국제도시 인프라로 최첨단 국제예술행사를 이 정도의 위상으로 개최해가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광주비엔날레는 창설초기부터 개최지 광주의 도시배경과 특성을 반영한 차별화된 전시로 제3세계권 후발주자이면서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계의 전문기획자와 작가, 학자들이 비엔날레 전시와 학술, 출판 등에 참여하고 전문지와 유력매체에 수시로 소개됨으로써 세계 주요 비엔날레의 하나로 인정받아 왔었다. 이를 증명하듯 최근 150개 이상 운영되고 있는 세계의 비엔날레들 가운데 전문가대상 설문조사결과 5위(ARTNET, 2014. 5)로, 20세기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을 제치고 1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전문가 설문조사결과, 2015, 8)로 평가될 만큼 성장하였다. ● 이같은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인지도와 위상을 토대로 광주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지정하여 20년 국책프로젝트(2014∼2023)가 진행 중이며,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창설(2005∼), 광주국제아트페어인 '아트광주' 창설(2010∼), 도시 곳곳에 랜드마크이자 문화자산 만들기인 '광주폴리프로젝트'(2011∼) 등이 진행되고 있다. 2012년에는 세계 비엔날레 120여년 역사상 최초로 광주에서 '세계비엔날레대회'를 5일 동안 진행하고, 이 성공개최를 계기로 '세계비엔날레협회'가 창설(2013, 아랍에미리트)되기도 하였다. 또한 2014년에는 광주비엔날레와 광산업 등의 도시기반을 인정하여 유네스코가 '미디어아트창의도시'로 지정하였고, 그 사업의 하나로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미디어아트창의파크가 추진 중에 있다.
광주 청년미술의 다원화와 확장성 ● 광주비엔날레 20여 년 동안 진행된 직간접 관련 행사나 정책사업들과 함께 학습기에 비엔날레를 접하면서 성장한 세대들의 등단·활동들로 최근 광주 문화현장은 이전과는 말할 나위 없고, 타 도시에서도 부러워하는 청년문화 활동들로 활력이 넘쳐나고 있다. 지역화풍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호남남화나 자연주의 인상파 유형의 그림들 대신 현시대의 문화감각과 재료, 전자소재, 영상기기, 과학기술들을 결합하고, 화폭이나 실내 전시공간에 국한하지 않고 작업을 펼쳐내는 장소와 공간도 다양해졌다. 물론 회화의 기본은 지키면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기대 받는 청년화가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예술의 근본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 표현의 방법과 영역에서 과거와 같은 자연 중심이거나 감흥, 전통적인 개념 그대로를 따르는 경우는 드물다. ● 미디어아트는 빛고을 광주의 이미지와 도시 전략산업인 광산업, 실험적인 첨단시각예술의 국제무대인 광주비엔날레, 유네스코 창의도시 지정 등과 연계하여 최근 기대가 가장 큰 분야이다. 매체와 형식은 영상미디어와 디지털전자기술의 결합이 두드러지지만, 소재나 내용에서는 시각적인 영상과 사운드의 실험도 있고, 일반 3D·4D와는 다른 예술작업 속에서 시공간의 확장을 연출해내거나, 고전과 현대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현실감을 접목시키기도 하고, 특정 장소나 공간에 강렬한 전자빛과 색채효과로 현장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또한 회화·조각·공예 등의 기존 형식이면서도 과거 남도미술 지역양식과는 다른 시대감각과 개성 있는 표현으로 독자적인 조형예술세계를 다져가는 원로부터 청년작가까지 지역미술의 층위와 색깔들이 훨씬 풍부해져 있다. ● 작가들이 세상과 현실을 예술을 대하는 시각, 화폭이나 매체에 담아내는 방법과 감각, 활용하는 방편과 솜씨들에서 확장은 시대문화와 예술향유자들에게도 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청소년은 물론 기성세대도 실험적이거나 낯선 예술형식에 대한 반응과 문화예술의 창의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에서 훨씬 달라진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 같은 문화예술에 대한 보다 열려진 시각과 넓어지는 식견, 창의적 발상의 자극, 삶과 인류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대는 개인의 예술향유 차원을 넘어 도시문화의 자산이자 인적 자원으로 축적되어 가고 있다. 도시의 경제여건이나 국제적 문화인프라는 국내외 주변 대도시들에 비해 여전히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지역차원의 문화도시만이 아닌 급변하는 현대문화 속에서 창작활동과 교감·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그 가치를 꾸준히 키워가면서 세상에 공유 폭을 넓혀가는 문화예술 활동의 주체로서 창작자나 향유자가 함께 성장해 가기를 기대한다. ■ 조인호
마음으로 하나 되는 대구·광주의 풍류와 멋 ● 지난해 연말 중국 우한에서 원인불명의 감염병으로 인해 폐렴 환자가 집단으로 발생했다는 외신 뉴스가 전해졌다. 2009년 신종플루와 2015년 메르스 같은 감염병을 일찍이 경험했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던 정부와 우리는 이 또한 신종독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일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월 중순 중국에서 감염환자가 처음으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전 세계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 국내에도 코로나 19 환자들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방역정책이 발표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 2월 중순 국내 31번 환자가 대구에서 발생하면서 전 세계의 시선이 대구·경북으로 모여들었다. 하루 수백 명의 확진 환자가 발생한 대구는 한정된 병상과 의료진 부족으로 인해 모든 종합병원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그리고 치료시기를 놓쳐 사망자가 속출하자 도시 전체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대구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발생한 집단감염과 방역지침 위반 사태는 방역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 일수록 단결하는 저력을 보여주는 속성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파견된 의료진과 119 구조대원, 자원봉사자들이 대구로 속속들이 모여드는 기적이 나타냈다. 그 가운데서도 광주지역 의료진과 의료시설을 지원한다는 광주시청의 발표는 절망 속 새로운 희망으로 전해졌다. 당시 대구 확진자 2천5백여 명 가운데 1천여 명이 병상 부족으로 집에서 입원 순서를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 광주시의 제안은 과거 영·호남의 지역감정이라는 갈등과 담론을 일축시키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 '대구와 광주는 달빛동맹으로 맺은 형제 도시'라며 배려와 아픔을 안아준 광주시민들의 아름다운 선행은 진한 감동으로 전해졌다. '달빛동맹'은 민선 4기 말인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광태 광주시장과 김범일 대구시장이 두 지역 의료산업 공동 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된 협약이다. 광역지자체 간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공동 대응하자는 취지였으며 달빛동맹이란 이름이 처음 붙여졌다.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에서 '달'을, 광주의 또 다른 이름인 빛고을에서 '빛'을 따서 명명되었다. 일종의 현대판 나제(신라-백제) 동맹인 셈이다. 이러한 동맹은 지난여름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광주시에 대구시가 다양한 구호 물품을 전달하며 우정을 더욱 돈독히 갖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제 달빛동맹은 지자체 중심의 관 주도에서 벗어나 민간교류로 이어져 경제, 스포츠는 물론 미술,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중 '광주미술작가회'와 '대구예인회'의 교류는 의미 있는 행사로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 이다. 이들 단체는 2016년을 시작으로 올해 세 번째 교류전을 마련하고 있다. 각 지역 미술협회가 주관하는 행사 중심의 교류전 형식에서 벗어나 60여 명의 회원이 작품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열고 같은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운영방식은 지역과 지역의 협업, 사람과 사람의 화합으로 이어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인적 네트워크 확대를 통해 행사 중심에서 작가 중심으로 참여의 장을 확대하고 다각적인 소통을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를 수용한 결과인 셈이다. ● 21세기 디지털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미술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미술 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화풍이나 미의식을 함께 공유하는 작가들이 연대해 미술단체를 결성하고 자신들만의 표현양식으로 신미술운동을 주도했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온라인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사람 중심의 미술이 가상 공간속에서 체험하고 공유하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변화가 결국 사람 간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들고 스스로 소통의 장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3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 두 단체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미술의 본질을 찾기 위한 활동을 미술과 관객이 있는 전시장에서 체득해 나가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이버 공간이 아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현장에서 스스로 모색해 나가려는 고집스러운 의지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대구는 20세기 초반 서울, 평양과 함께 서양미술을 일찍이 받아들였으며, 영과회(零科會)와 향토회(鄕土會)를 통해 한국 근대미술의 초석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광복과 함께 대구화우회(1946), 황토회(1958), 앙그리(1963), 63미전(1963), 이상회(1969), 청목회(1971), 이집회(1971), 신조회(1972), 그룹 엑스포제(1973), 그룹35/128(1975), D.C.A.A(1975), 대구일요화가화회(1976), 심상전(1977), 한유회(1979) 등 미술 단체들이 결성되며 구상과 추상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활기찬 대구화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라는 대규모 미술축제를 국내에서 처음 개최하는 저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미술단체들의 활동과 작가들의 작품전은 전문성과 최첨단 시설을 갖춘 전문화랑들의 노력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공화화랑(1968), 대구백화점화랑(1971), 아루스화랑(1971), Y화랑(1973), 매일화랑(1974), 대구신세계백화점화랑(1974), 맥향화랑(1976), 이목화랑(1977), 동성화랑(1979), 고려백화점화랑(1979), 대보백화점화랑(1979), 리화랑(1979) 등은 대구의 다양한 장르 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준 덕분이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와 전시 인프라가 '한국 근대미술의 메카 대구'를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전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일상을 포기하고 병마로부터 자신과 가족들을 지켜내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인간이 갖는 감정은 디지털 영상과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 내는 차가운 기계적 이미지보다 사람 간 창의적 소통과 교류가 만들어내는 화합의 장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개인 방역과 철저한 위생관리로 마련하는 미술전시는 코로나블루 시대 인간의 따스한 마음과 감정을 위로받기에는 더없이 좋은 분야인 것 같다. 팬더믹으로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아름다운 그림 한 장으로 녹여낼 수 있다면 예술가들은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이번 달빛동맹으로 마련되는 '광주미술작가회'와 '대구예인회'의 교류가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히 다가온다. 지역 간 갈등이라는 해묵은 담론에서 벗어나 서로의 마음을 열어 예술의 풍류와 멋을 마음껏 발산하는 행사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 김태곤
Vol.20201124f | 세 번째 달빛교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