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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양조장(스페이스빔) Incheon Culture Brewery(Space beam) 인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15(창영동 7번지) Tel. +82.(0)32.422.8640 www.spacebeam.net
당신이, 내가, 이렇게 살고 있군요 ●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너무 멀리 있어서 막연히 그리운 이상향일 테고, 먹고 사는 일이 바쁜 누군가에게는 부질없는 짓으로 보일 테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삶이든 영혼이든 무엇이든 불사르겠다는 순진한 열정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당신은 예술의 힘에 대해 티끌만한 의심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예술이 삶에 진실의 빛을 던져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예술의 언저리에서 직업을 얻어 예술을 삶을 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살고 있는 내 경우를 말하자면 수시로 일어나는 인지부조화로 인해 종종 예술과 예술가의 신념과 믿음에 대해 냉담해지기도 한다. ● 이미 백년 남짓 전에 새로운 예술로써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공표했던 예술가들의 집단적인 시도가 있었고, 반백년 못 지나서 삶에서 멀어진 예술의 기만을 조롱하거나 세계의 일상을 잠식한 스펙타클을 고발하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자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서구 세계의 지난 세기, 그 중 상반기는 정치적 개편, 전후 세계 경제 기반 재건이라는 인류적 사명이 있었고, 이 땅의 현대미술의 선조격이 되어버린 서구의 예술가들은 흥분된 어조가 담긴 숱한 선언문들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분명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삶의 방식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지만 분명 예견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지구를 덮친 바이러스의 공격에 대해서도 적어도 국내에서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꽤 오랫동안 지속된 안정 속에서 오늘의 예술가들은 중립적이거나 유희적인 시선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스펙타클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이 사명의식을 갖고 현대의 삶 속 도처에서 발견되는 불평등, 부조리를 찾아 고발한다. 누군가는 도시의 산책자, 일상의 수집가가 되어 평범하고 소소한 삶을 담아낸다. ● 짧은 결론을 위해 꽤나 긴 서설을 풀었다. 앞서 예술, 예술가, 현실,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소 장황했지만 결론을 향해 가는 길에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결국 예술가들도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 '행성적 소시민'이라는 것이다. 아감벤이 명명한 행성적 소시민은 사실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얼핏 종교든, 민족주의든, 전체주의든 공동체를 구성하는 믿음의 기반이 무너진 이후 현재 세대는 더 이상 공동의 세계관을 갖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아감벤은 지금의 상태, 전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를 행성적 소시민이라 일컬었다. "세계사의 희비극을 특징지었던 그 다양성은 소시민 계급 안에서 한데 모아져 판타스마고리아적 공허함 속에 노정"될 뿐이다.1) ● 현재의 인류를 하나의 계급, 행성적 소시민이라 일컬을 수 있다면 늘 어느 정도는 일상에서 거리를 두는 듯이 보이는 예술가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전시는 행성적 소시민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계급이며 출구가 없어 보이는 지금의 상태가 위기라면 이 위기는 이제까지 없던 기회가 되리라는 아감벤의 사유에서 시작되었다. 견딜 수 없는 허무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술이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생각은 말할 것도 없다.
전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이제까지 감상이나 주장을 덧입히지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일상의 삶을 다뤄온 작가 고영택, 김홍수, 백정기 작가가 함께 참여하였다. 이들에게 사족일 수 있으나 한 가지 덧붙여 요청한 것은 예술의 자리에서 일상을 관찰할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 속 일상에서 예술을 바라봐주는 것이었다. 비장하거나 숭고하지는 않더라도, 비관적이거나 공분을 일으킬만한 주제를 날카롭게 다루지 않는 예술이라도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사회의 부조리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먼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나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너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할 수 있다면 예술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전시는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 서정민
소가 된 게으른 ○○○ ● 고영택 작가의 초기 작업들은 소리와 거울을 이용한 기계적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했다. 작가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초기 작업부터 명확히 드러났고 그 이후 싱글채널 무빙이미지를 통해 바라보고 생각하는 존재자와 세계를 시각화하며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을 텍스트로 풀어나갔다. 텍스트와 함께 그의 싱글채널 무빙이미지는 존재자와 세계의 관계와 거리에 대한 시각적 은유를 만드는 장치로서 작동해왔는데 이번 신작 「소가 된 게으른」에서는 그 거리가 무너졌다. 일단 한 눈에도 피사체와의 물리적 거리가 근접해졌으며, 이전처럼 문학적 특성을 띠는 텍스트는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작가 본인의 삶에 대한 우화이다. 공동체에 대한 작업에 있어서 바깥에서 공동체를 관찰하여 피사체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을 통해 작업의 형식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향후 그의 싱글채널 작업이 직접적인 관계를 탐구하려 했던 이전의 인터랙티브 작업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고립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리들이 대처하는 자세.'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고립된 우리들의 정신은 자유를 갈망하고 육체에서 벗어나려 끊임없는 시도하게 되지만, 현실은 쉽게 우릴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이유들을 늘어놓은 채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기에 급급하지만, 그중에서도 갈 길을 잃은 채 그저 부유하듯 떠돌아다니며 시간의 흐름에 의식을 맡겨버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동의는 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 남자의 회동 ● 오랜만에 만난 세 남자는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현재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세 남자는 그간 하지 못했던 진취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괴롭게만 느껴졌던 과거, 또는 현재를 털어버리고 찬란할 것만 같던 미래를 설계하며 은은한 불빛이 퍼지는 건물 숲과 함께 마시고 또 마신다. 오랜만에 울분을 토해내며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 남자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놓았지만, 점점 자신을 옥죄고 있는 문제이자 현실의 벽인 거주지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는 건물 숲 사이로 점점 잠식되어 다시금 현실에 고립되어버리고 만다.
월드파크 ● 월드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명확하다. 이곳을 사용하는 이들은 일주일 내지 한 달, 또는 더욱 길게 숙소로써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가끔 커플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이곳을 찾아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지만 월드파크는 최신 시설을 갖춘 모텔들과 비교하기엔 노후된 시설과 환경을 제공할 뿐이다. 그중 일정 기간을 계약하고 지내는 이들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숙소를 옮겨 다니며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 자신의 신체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돌아가야 할 집도 없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없이 그저 일정에 따라 정차 없이 떠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제외하곤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시간은 외부와 분리되어버려 어떠한 목적의식도 살아진 채 시간에 몸을 맡겨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 김홍수
「OK google」은 두 이국인의 대화를 구글로 자동 번역한 영상이다. 가볍게 보자면 번역오류 에서 오는 유희를 즐길만하고, 진지하게 보면 불완전한 소통으로 이어가는 두 개체의 관계를 성찰 할 수 있다. ● 한중 자막은 구글번역을 이용했다. 얼마나 엉뚱한 결과가 나올까했는데, 생각보다 정확한 번역에 놀랐다. 조금만 보정을 하면 단순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문장이 길어지면 오류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현대는 아직 역사화 되지 않았다(그러므로 현대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의 말을 "중국은 역사가 없다." 는 식으로 번역을 한다. ● 사실 작가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번역프로그램의 오류가 아니다. 자동번역은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더 강조하고 싶은 점은 역사에 대한 긴장감이다. 진진은 특히 근현대의 역사를 말할 때 다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그는 시진핑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앞서 "시" 자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처음 나에게 반문했다. "니상즈다우셤머 (알고 싶은 게 뭐예요)" 나는 앞으로 진진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자체 검열을 했다. 그냥 중국 지도자 순서만 알려주세요." 진진과 나는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관계는 서로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한편 「이편한 이야기」는 지나가는 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관계를 위한 작업이다. 두 세대의 관계는 "무플" 관계라고 생각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지나가는 세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악플도 없지만 선플도 없다. 그래서 "무플방지 운동"과 같은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지나가는 세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아서 새로운 세대에게 노출시키는 일로 출발을 해보고자 한다. 이후 작업은 효과와 영향을 보고 차차 보안해 나가기로 한다.
비단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평론가와 기획자, 아니면 나처럼 예술기관에 고용되어 주40시간 근무하는 근로자들조차 예술과 엉켜 있는 삶의 가닥들을 한 올 한 올 건져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술에 대한 믿음을 가슴 한 편에 묻어둔 채 때로는 예술 제도의 틀에 맞춰, 때로는 고용주나 의뢰인의 요청에 맞춰 지식과 재주를 팔아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래야만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이 점은 다른 여느 생활인과 다를 바 없다. 종종 관람자들에게 현대미술이 보여주었던 고급문화에 대한 저항의 태도와 형식주의를 향한 일격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내 기준에 아방가르드와 그 추종자들의 모험은 꽤나 흥미진진하고 교훈적인 것이어서 열심히 설을 풀 때면 관람자들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도 던지곤 한다. 하지만 뿌듯하게 차오르는 보람에는 늘 수치심이 스며있다. 내가 그들에게 전한 말들이 진실한가? 자문할 때면 모르겠다는 답 대신에 강한 확신과 강한 부정이 동시에 일어나곤 한다. 결국 오늘에 와서 현대미술이 다루는 거의 모든 일상은 타자의 일상이거나 자신의 삶에서 소재를 취해왔다고 하더라도 격식에 맞게 선별된 일상이지는 않은지, 창작을 위해 예술가는 자신의 현실을 배제하거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술가의 일상이라면 삶과 창작의 경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들은 오랜 시간 답도 없이 되풀이 되어 밀려왔다. 이 질문들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자 무모하지만 예술 행정을 하며 살아온 내가 전시장이 난입했다. 그리고 나의 노동의 형태를 재구성해 보았다. 「호명」은 나 역시 존경심을 품고 애정마저 느끼는 철학자 벤야민과 하이데거가 미술 창작과 비평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용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인용된 문장과 관련된 작업 이미지를 색인 카드로 만들면서 점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 직군의 전문화된 분화와 그에 따른 태도의 차이, 이로써 완성되는 전시의 형식주의였다. 전시에는 캡션이 붙은 작업 이미지와 전시글(서문, 평문, 작가노트)이 함께 있어야 아카이빙의 자료가 완성되고 도록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평론은 학술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자신을 감추고 철학, 사회학, 미술사의 지식으로 작품을 빛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위치와 편향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평론에서조차 평론은 사람의 냄새를 감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사물이 열어주는 존재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벤야민과 하이데거를 호명해야만 한다. 「남겨진 날들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에서는 전시장을 예술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여러 프레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함께 전시를 만들어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마치 작가가 된 양 내가 나의 직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입장으로부터 비롯되는 모순과 균열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고통스럽기보다 사뭇 즐거운 과정이었다. ■ 서정민
* 각주 1) 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p.89
Vol.20201115h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