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귀미로의 탈출조건

전혜림展 / JUNHYERIM / 田惠林 / painting   2020_1114 ▶ 2020_1129

전혜림_이어진산수xxl_250×150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622a | 전혜림展으로 갑니다.

전혜림 인스타그램[email protected]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탈영역우정국 POST TERRITORY UJEONGGUK 서울 마포구 독막로20길 42(구 창전동 우체국) Tel. +82.(0)2.336.8553 www.ujeongguk.com www.facebook.com/ujeongguk

오늘의 해법1. 전혜림의 패치워크-산수화(「이어진 산수」 연작에 별명을 붙여보았다)는 높은 채도의 색, 시원하고 선명한 선, 여백을 남기지 않는 화면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출처가 다른 구름, 산, 물 등 자연물의 도식적 표현은 적절하게 서로의 가장자리를 메꾸며 이어져 있다. 이 패치워크-산수는 몇 가지 점에서 재귀적 혹은 자기참조적 성격을 지닌다. 우선 연작의 소재인 낙원은 회화의 환영적 성격,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듯이 앞으로 가져오는 속성과 맞물려 서로를 가리킨다. 회화라면 주제, 특히 재현하는 바와 무관하게 하는 일을 굳이 주제로 삼은 셈이다. 또한, 연작은 동서양 회화사의 주요 도식을 불러와 배치하여 다시금 회화를 상기한다. 마지막으로, 유화에 매쉬천 등을 덧대는 등 여러 재료를 병합했던 근과거의 시도 – 대표적으로 2020년에 선보인 'Merge all' 연작 – 와 대조적으로 지금 걸려 있는 작품은 그저 캔버스 위 그림으로만 존재한다. 마치 '바깥'으로 쏟아져나오던 동력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듯.

전혜림_이어진산수xl_194×112cm_2020

2. 재귀 알고리즘은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기 위해 보다 좁은 하위 문제를 해결하고, 그 해법을 이용하여 본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다. 이는 일견 덜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만, 구간을 쪼개서 해법을 찾는 일이 궁극적으로 본래의 문제로 되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재귀'의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회화라는 거대한 문제에 도전할 때, 하위 문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그런데 잠깐, '회화의 문제'란 무엇인가?) 물론 회화의 부분집합을 그 하위문제로 가정하는 것에는 논리적 오류가 따른다. 가령, 산수화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그다음 수순으로 회화의 문제가 순순히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산수화에는 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점에서 회화는 원천적으로 재귀 알고리즘에 의해 풀어낼 수 없는 복합적인 회집체다. 패치워크-산수화의 경우에는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회화로서 회화로 돌아오는 재귀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탈출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도돌이표를 만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에서 재귀 알고리즘은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그 재귀적 속성에 대한 추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전혜림_이어진산수xl_162×130.2cm_2020

3. 재귀 알고리즘의 별미는 거대한 기계에 접속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나사를 발견 혹은 설정하는 것이다. 종료 조건(base case)에 도달해야, 즉 바닥을 쳐야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처리할 수 있다. 여기 제시된 산수화는 꽤 직관적인 바닥을 설계한다. 우선, 단일한 장면을 재현하거나 구현하는 대신 산수화의 전통에서 (어느 정도 훈련받은 눈을 지녔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요소가 추출, 배치되어 있다. 이는 구태여 의심할 이유가 없는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구름은 주로 이렇게 그린다. 깎아지르는 절벽은 이렇게 표현된다. 모두가 아는 유명한 바로 그 그림에서 파도는 이러했다. 나무는 이렇게 생겼다… 반면, 이때 회화 전통은 이질적인 도식이 동시에 회집하는 오픈소스로 치환된다. 당대의 시각성과 정신을 흔들어 놓았던 혁신은 편의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브러시로 집약된다. 데이터베이스에서 건져 올린 복수의 요소가 여백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호미 바바가 내세운 혼종성(hybridity), 즉 지배주체와 피지배주체의 위계가 와해된 전복의 공간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연원의 아이템 배치를 통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굴절된 시공간을 생산하는 회화의 효과이다. 이 대화는 결코 각 도상의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해명 혹은 환원되지 않는다. 회화는 빌려온 각 요소를 초과하는 저만의 시제를 획득한다.

전혜림_이어진산수l_145.7×112.3cm_2020

4. 이질적인 요소의 공존에도 불구하고 이 연작은 소실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 완결된 회화로 제시된다. 이것이 가능한 근거 중 하나는 낙원이라는 소재다. 낙원은 회화의 초과적 속성, 즉 구성요소의 단순 합으로 소진되지 않는 특성이 취하는 방향을 설정한다. 다시 말해, 앙상한 도식들이 위아래, 좌우 방향을 바꿔가며 배치된 회화는 계속 진동하며 낙원의 의미망을 건드린다. 그런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것, 즉 환영을 생산하는 회화의 효과 혹은 임무가 잘 집약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낙원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지만 사유를 통해 현시될 수 있는 것으로, '회화적'이다. 낙원을 환영으로 구현하는, 다시 말해 환영을 다시금 환영화하는 경로는 여럿 있을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설득력을 얻거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낯선 세계를 구축하여 현혹하거나. 이곳의 산수화는 이러한 접근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영을 굳이 다시 환영으로 제시하는 데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토피아 문학 전통의 여러 설정을 버무린 키치한 판타지물에 가깝다. 그 효과는 꽤 뚜렷하다. 대상에 매료되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도록 하게 되거나 –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의 조합인 것을 알면서도 몰입하거나 그 반대, 회화에 대하여 '잘 그린 그림'에 감탄하다가 갑작스레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는 – '테크닉은 정말 좋은데 느끼하다' – 변심을 조장하거나.

전혜림_맞닿은낙원 부분_145.7×112.3cm_2020

5. 한편, '펼쳐진 산수'는 평면이 아닌 표면의 차원을 회화의 하위 문제로 설정한다. 이러한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회화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이를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입체물에 천을 얹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후 펼친 이 연작은 평면과 표면이 어긋나는 지점을 드러낸다. 입체물과 그 피부가 결합한 상태에서 그린 그림은 말이 된다. 다시 말해, 환영이 생산된다. 하지만 그것을 펼쳐 평평하게 되는 순간부터 환영의 완결성은 소실된다. 그림을 그릴 때 발생하는 긴밀한 접촉점은 평면이 아니라 표면, 즉 캔버스의 피부 차원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처럼 친밀한 표면은 평면의 환영을 파기함으로써 회화를 (표면에서 일어나는) 제스처로 재배치한다. 표면-위-제스처로 재배치된 회화는 『보이는 것을 담는 그릇』에서 가볍게 비약한다. 흰 (캔버스가 아닌) 입체물의 (평면이 아닌) 표면에 (안료가 아닌) 빛이 발린다.

6. 재귀 알고리즘을 설명할 때, 교과서는 마트료시카 인형을 꺼내 든다. 인형 안에 더 작은 인형이, 그 안에는 더 작은 인형이, 그 안에는 더 작은 인형이, 그 안에는 더 작은 인형이. 가장 작은 인형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해결해간다면 결국 가장 큰 문제까지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인형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면? 큰 인형과 작은 인형이 전혀 닮지 않았다면? 겨우 발견한 가장 작은 인형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회화를 고유한 시제를 지니고 잠재울 수 없는 진동을 지속하는 구성체로 이해하고, 그 단위를 평면이 아닌 표면으로 설정함으로써 프레임을 이탈하는 잠재력을 시험하는 것. 일단 여기까지가 오늘 살펴본 해법이다. ■ 유지원

Vol.20201114d | 전혜림展 / JUNHYERIM / 田惠林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