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관찰 ; From bottom to bottom

곽요한展 / KWAKYOHAN / 郭耀翰 / painting   2020_1104 ▶ 2020_1110 / 일,월요일 휴관

곽요한_빛이 새어들어오는 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116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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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1106_금요일_05:30pm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 북구예술창작소_소금나루 작은미술관 후원 / 국민체육진흥공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일,월요일 휴관

소금나루 작은미술관 울산 북구 중리11길 2 북구예술창작소 Tel. +82.(0)52.289.8169 cafe.naver.com/bukguart

읽을 수 없는 장면을 위한 변론 ● 누구나 '그날'을 갖고/알고 있다. 다시는 전(前)의 무지나 무구함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의 모든 '나'는 사건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현재가 대신 보낸 목격자이다. 나는 짓밟아도 될 만큼 유약하고 무구한 존재로 그날 선별되었고, 편재하는 폭력의 구조가 설치한 무대의 목격자로 호출되었다. 당사자는 생존자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와 증언해야 한다. 특정한 이름/자리를 꿰찬 가해자를 고발하기 위해서일 수도, 모든 이름에 들어가 있는 폭력을 성찰하기 위해서일 수도, 폭력의 이면에 놓인 '나'의 욕망을 고백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피해자로서의 나의 경험을 말하면서 다시 전의 무지나 무구함을 회복할 수도 있고, 모든 폭력을 성찰하면서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단지 피해자에 불과하지 않았던 자신을 보는 용기를 통해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 결국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을 말하는 방식/스타일이 말하는 나를 정체화하거나 구성한다는 이야기일 텐 데, 만약 나의 무지나 무구함을 증언한다면 우리의 공감과 집단적 움직임에 기여할 것이고, 폭력의 편재를 성찰한다면 더 힘들고 어려운 실천이 기다리는 것이고, 나의 욕망의 기이한 구조를 발설한다면 청자의 비동일시는 당연하기에 나는 비로소 나로서 존립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자아의 해체를 지금 다시 겪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다른 방식/스타일/길이 과거의 경험과 그 경험을 말하는 현재의 '관계'를 통해 제시되었을 것이고 제시될 것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심지어 올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런 일은 일어나는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지지와 동의를 얻기 위할 때도 있을 것이지만 더 위험해지고 더 고립되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어디까지 나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의 말하기의 사회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나의 사회성을 위태롭게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말하기는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에 나를 옭아매는 소외일 수도, 나만큼 위태롭고 고독한 사람에게 보내는 최후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하기는 없는 자리를 더 지우는 부정성의 실천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어떤 자리도 보유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짓누르고 부정하지 않는, 그들이 내게 저지른 폭력을 이번에는 내가 나에게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 결단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연민으로 가득 찬 말하기를 통해 집단적 사회의 폭력적인 공동체성에 다시 또 짓밟힐 수도, 거의 대부분이 공감/동일시할 수 없는 말하기를 통해 어떤 폭력에서도 안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배덕자(背德者)일 수도 있다. 다름아닌 내가 이 사회의 잔인함, 폭력의 바깥은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당사자-목격자의 자리, 없는 자리를 독점한다. 자기자신을 경유해서 버젓한 사회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어떤 인정과 지지도 불가능한 자리가 바로 그런 잔인함의 구조를 관찰하는 외로운 사람의 자리임을 공표하는 것.

곽요한_빛이 새어나오는 계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0cm_2020
곽요한_Sewer_장지에 아크릴채색_112×160cm_2020

이번 전시에 대한 작가 곽요한의 글쓰기는 그렇게 자기자신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디나이널 게이의 커밍아웃'이란 너무 기이하고 낯선, 하지만 유일무이한 자의 자기-희생-제의를 성취한다. 그는 기존의 게이 커뮤니티를 인정하고 그곳에 소속되려는 회원의 자기표명에서 이탈한다. 남성에 대한 선망과 공포 사이에 사로잡힌 그의 신체의 사실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단단히 부착시키면서 누구도 동일시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개인"이라는 엄연한 자기진실을 공표한다. 그는 그렇게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을 글쓰기로 육화한다. 기존의 억압적인 사회도 해방적인 사회도 그를 위한 자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신체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자신을 잃고/잊고 이미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는 이미 항상 설치되어 있는 사회성의 무대로 올라갈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뿐, 자기 자신임의 피로나 고통을 양도할 공통성에 입회할 수가 없다. 그의 글은 감정과 온도인 신체로는 반응하기 어렵다. 그의 자기-분석은 신체에 대한 것이면서도 보호막이 제거된 신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내부의 디아스포라, 자기 신체에 갇힌 자, 알아봐줄 사람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자신에게도 낯선 자, 관찰자를 관찰하는 시선인 자, 도통 불쌍한 자로는 보이지 않는 자, 불운과 불행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자,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화해불가능한 채로 자신과 함께 견디는 것임을 결국 납득한 자, 결국 자신을 포함한 "실패자들을 위한 도피처"를 상상하는 쪽으로 움직이려는 자.

곽요한_Se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100cm_2020
곽요한_의자 두개가 있는 모서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0cm_2020

요한은 줄곧 자신을 관찰자라고 부르며 작업을 해왔다. 2014년 개인전 『관찰자 곽요한』을 위한 작가의 글에 등장했던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시선과 작업"과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그 공간을 기억"하는 작업이란 문장은 그가 자신에게 수여한 사회적인 이름인바 '관찰자',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관계 바깥의 자리,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확인할 수 없는 자리, 상징적인 은유로는 가시화/전유할 수 없는 자리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났다. 그의 '풍경'은 읽을 수 없는, 이해불가능한 구성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진실이다. 그래서 관객은 작가의 풍경을 오직 볼 수 있을 뿐이다. 견고한 구조물들이 있고 게이 신체의 비천함을 모호하게 번역한 더러운 하수구의 물이나 불길한 분홍색이 나타날 뿐이다. 작가의 신체, 혹은 욕망은 공동체적 합의로서의 은유 앞에서 머뭇거릴 뿐 기꺼이 그것으로 편입, 동화되지 못한다. 그는 그를 냉대하는 사회와 유혹하는 사회 사이에서 어정쩡한 채로 자신과 공존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계'에 출연하기 전(前)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인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가.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타인을 학대하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자는 자신의 사회성으로 넘어가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떤 '행위'를 선택한 자이다. ● 자신의 전시를 '관찰자 관찰: from bottom to bottom'이라고 지은 작가의 자기분석은 계속 실패하는 자들이 성공한 자들의 이면을 목격하는 자들이라는 윤리적 언명도, 실패하는 자들의 '성소'인 예술에 거주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도 확보하지 않은 자의 담담한 자기이해를 드러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작가의 고백, '커밍아웃'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립과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음에도 그의 작업을 분석할 '능력'이 없다. 작가는 자기자신을 이해가능한 사람, 알아볼만한 사람으로 풀어내는 작업과 타협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외부로 유출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직 그곳에 있기 때문이고, 그곳을 이해가능하게 폭로함으로써 그곳에 대한 현재의 개입이나 승리를 주장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좋은' 관찰자가/도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그는 충분히 냉대하는 사회나 매혹하는 사회에 속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실재'의 상징화를 거부하는, 외상의 은유화에서 도피하는 자이다. 그는 의식의 개입과 기억의 서사화 앞에서 아직도 머뭇거린다. 그것이 '바닥에서 바닥으로' 흐르는, 충분히 더럽지 않고 충분히 고발도 아니고 충분히 증언도 아닌, 신중하게 구성되었지만 숨은 의도는 읽을 수 없는 작가의 장면을 충분히 읽을 수 없는 내가 읽었다고 말하는 방법이다. ■ 양효실

곽요한_가로 막고 있는 의자_장지에 아크릴채색_200×50cm_2020
곽요한_쌓여있는 의자들_장지에 아크릴채색_200×50cm_2020

나는 꽤 오래 혼자였고 외로운 채로 지내왔다. 타인의 악의가 그 이유였던 경험도 있었고, 나의 잘못된 선택이 원인이었던 적도 있었다. 또는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의 성향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안과 밖의 문제들이 엉켜서 만들어진 덩어리가 내 안에서 굴러다니면서 나 자신을 모서리로 몰아넣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항하지도 못했었고, 불의에 대해 도전하지도 못했다. 나는 피해자이고 약자일지언정 선하거나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선택지들은 무력한 비겁자의 것들이었다. 도망갈 공간(심지어 도망을 가지도 않았지만)을 상상하는데 그치거나, 바닥에 있는 나 자신을 제 3자를 바라보듯이 한 발 뒤에서 쳐다보는 것 정도였다. ● 남고를 다녔었던 나는 이른바 교내 생태계에서 피라미드의 바닥이었다. 또래에서도 큰 덩치였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잇감 신세를 피할 수 없었는데, 어딘가 자신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캐치해내고 달려드는 아이들의 야성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초식동물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는데, 언제나 고개를 뾰족하게 들고 주변을 살피며 포식자들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포식자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까지 모두 초식동물의 그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경험들은 나에게 단순한 피해자로서의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내 피라미드 상층부에 자리잡고 있는 포식자-혹은 가해자인 그들은 보통 신체적인, 또는 외모적인 매력을 가진 경우가 왕왕 있었고, 그들을 대하는 나의 감정은 공포와 선망 사이를 오가곤 했다. ● 덕분에 학창시절 내내 어느 부분에서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나는 결국 한동안 디나이얼 게이로 스스로를 부정하며 지냈었고, 현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했지만 과거의 경험 때문에 남성에 대해 공포를 가지는 게이가 되어버렸다.

곽요한_의자로 막힌 구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50cm_2020
곽요한_시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72cm_2020

그렇게 과거에 겪은 일들이 현재의 나를 얽매고 있고, 미래의 변화조차 가로막는 양상이 되었는데, 마치 하나는 풀 수 있을 것 같은 매듭들이 두 개 세 개가 겹치기 시작하면서 손도 댈 수 없이 엉킨 실타래와 같이 된 상황이다. 이와 같이 꼬인 상태에서 나는 많은 틀과 경계 밖의 외부자가 되었다. 주류와 정상성의 세계에서는 게이로서 경계 밖의 존재가 되었고, 게이의 세계(라고 쓰니까 이상하긴 하다)에서는 남자가 두려워 도망가는 클로짓 게이가 된 것이다. ● 결과적으로 많은 실패들의 경험이 나를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 개인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서 반복된 실패 속에서 홀로 아무도 없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을 그리는 것은 나에게 소심한 도피이자 생존의 시도가 된다. 땅 밑의 하수구에서 흐르는 더러운 물이 가는 터널을 상상하고, 수상한 빛이 드리워진 텅 빈 공간들은 그렇게 나의 도피처로 존재한다. ● 소수자로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인 소수자성을 획득하는 것조차 실패했고 실패를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 안에 있게 되고, 심지어 실패를 보여주는 것조차 실패해 온 실패자가 숨을 그림자가 필요한 것이다. 혼자 읖조리는 실패담들이 메아리로 되돌아올 빈 공간 안에서 벽 뒤에 숨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클로짓 게이로서의 도피 역시 이 글로 인해 실패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실패하는 자의 실패담과 도피 시도에 대해 귀를 기울여주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실패로부터의 도망은 비겁함과 나약함의 증거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강하진 않기 때문에, 실패자들을 위한 도피처를 마련하려 한다. ■ 곽요한

Vol.20201106c | 곽요한展 / KWAKYOHAN / 郭耀翰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