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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요호 GALLERY YOHO 서울 마포구 동교로 125 3층 Tel. +82.(0)2.322.5954 www.galleryyoho.com
그리기 만들기 오리기 붙이기 – 세계의 모든 것을 손으로 4유하기 ● 아주 옛날부터 인류는 세계를 동서남북 네 개의 방위로 나누었다. 태극기의 네 개의 궤는 하늘, 땅, 물, 불을 의미하며 우주의 원리에 대한 고대 중국의 연구서 '주역'에서 태극과 더불어 세상을 설명해온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이렇듯 '4'라는 숫자로 완전해졌다면 그 안에 서는 인간의 일은 어떠할까? 예술은 사냥감을 잡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양에서 회화와 조각의 시원설화는 전쟁에 나가는 연인의 그림자를 본뜬 것에서 비롯한다. 또한 오리고 붙이는 실루엣 형상은 사진 이전에 대상을 그대로 남기는 오래된 수공적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들고 오리고 붙이는 네 가지 행위가 보이는 세계를 인간이 구성해 온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 여기 시작을 알리는 네 명의 예술가가 있다. 그들은 그리고(김희준, 박진희), 만들고(전혜원), 오리고 붙인다(박새들). 매체예술이 등장하고 미술의 장르적 구분이 무의미한 지금에 이들 예술가들의 예술을 그리고, 만들고, 오리고, 붙이는 인간 본연의 신체적 행위로 설명하는 이유는 이 네 가지로 구성되는 미술의 기본적 행위가 새삼 반가우면서 또한 원래 그러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희준은 그린다. 연잎으로 가득한 화면에서 작가가 계속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려서 남겨진 형상인 연잎이 아니라 계속해서 잔물결을 일렁이게 만드는 선들이다. 떠오른 형상이 아니라 그 배경인 물결이 그녀가 공들여 그리는 대상인 것이다. 「shallow wave_fountain」 역시 흐르는 물을 그린 줄은 알겠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녀가 그린 것이 물줄기가 아니라 그린 후 남겨진 부분이 물줄기를 이룬다. 일렁일렁, 콸콸 내지는 졸졸, 물의 작은 속삭임을 그녀는 각기 다른 선으로, 가끔은 선이 이루는 도형으로, 그러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작은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연잎을 그린 두 점의 회화는 겹쳐서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이 중첩은 속칭 너무 그려서 '태운 그림'과 덜 그러셔 '미완인 그림'을 겹쳐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그리고 있음'이라는 행위를 강조한다. 어째서 그리고 있다는 그 '과정'이 김희준에게 중요한 걸까? '-을 한다', '-을 열심히 한다', '쉬지 않는다'와 같이 살아가는 상태를 보여주는 동사들은 당연한 듯 여겨진다. 몇 년 전 '멍때리기 대회'가 개최되어 한 힙합 가수가 1위를 하기도 하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웃으며 기사를 보고 돌아서서 씁쓸하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삶을 끊임없이 채우고 그렇지 않으면 '패자'라고 생각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코로나라는 복병에 의해 강제로 멈춰진 삶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삼 사람들은 집에서 식물을 돌본다고 하지 않던가? 얼핏 반복되는 것으로 보일만한 선을 그리면서 김희준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선들이 결코 하나도 같지 않은 점이라고 한다. 여기 '태운 그림'과 '미완의 그림' 사이 공간에 작가는 우리를 초대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삶에 쓸려가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 물결, 귀여운 연잎, 그 사이 빼꼼 얼굴을 내미는 개구리 등등. 멈추고 보면,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다.
박진희는 아이 그림을 그린다. 아이처럼 그리고 또 아이의 그림을 베껴 그리기도 한다. 20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붓을 놓고 두 아이의 젖병과 기저귀를 들었던 그녀는 10년 후 다시 붓을 잡았다. 미국의 미술가 메리 켈리(1941-)는 아이를 키우며 대면하는 하루하루를, 그의 섭식과 배변을 기록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철저하고 차갑게 「산후기록」(1973-1978)이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아이의 먹는 양과 배변의 상태, 말을 할 수 있게 된 아들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이 기록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모성과 육아, 여성성의 문제를 개념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의 맥락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액자로 나란히 걸린 그녀의 기록물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정서적일 뿐 아니라 어렵고 복잡한 일임을 보여주었고 여성의 노동에 대한 다른 시선을 제시했으며, 정말 기저귀를 벽에 나란히 걸었기 때문에, 전시장에 걸리는 미술에 그 때까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를 부수어 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이 작품의 오브제를 제공하고 소재가 되어준 이는 그녀의 어린 아들이었음으로 협업의 다른 형태를 보여준 작업이기도 했다. 박진희는 그녀의 아이들을 작은 예술가들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협업을 자신의 작업으로 만들었다. 아이들과의 일상은 그녀의 삶을 채우고 캔버스를 채운다. 여기에는 아이들의 꿈도 있고 화가 난 엄마를 철자가 틀린 편지로 달래는 딸도 있다. 아이가 그린 아프리카의 자연을 그녀에게 야생(?)인 거실로 확장한 엄마의 마음이 보이는가 하면 붓을 든 왕비로서의 자화상에 똥모자 강아지로, 그녀의 녹록치 않은 삶에 강아지도 힘을 보태고 있다는 단서를 알려주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그 해, 1982년에 태어난 작가는 자아와 육아, 성장과 양육 사이에서 줄타기 중이다. '아이 그림'은 장 미쉘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 같은 미국 팝아트 예술가들,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한 장 뒤뷔페를 위시한 '아르브뤼' 예술가들에게서 형식적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박진희의 그림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지 아이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끈끈한 유대감이며 삶의 조각이다. 코로나 시대, 사회와 두는 거리는 가족 간의 물리적, 심리적 밀접도를 피곤할 정도로 높였다. 어디 삶이 이렇듯 예쁘기야 하겠냐마는 어쩌다 맛보는 값비싼 식후 디저트처럼 그녀의 그림은 한 조각 미소와 위안을 건낸다.
박새들은 요즘 만들고 오리고 붙인다. 작가는 일본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자개에 깊이 매료되었다. 평면에 자개를 입혀 작업한 「이중 도어락」은 자개를 암모나이트 형상으로 곱게 오려붙이고, 차가운 자취방 방번호를 달아주고선 '이중 도어락'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암모나이트 그림은 자화상인데, 자개로 만들어진 암모나이트는 이중으로 폐쇄적이다. 자개는 조개의 연약한 살을 단단히 감싸 안는 집이며, 지구의 태고적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암모나이트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고스란히 암흑처럼 감아 안고 침묵한다. 열쇠가 있지만 도무지 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계속해서 자개를 자신의 매체로 사용하고 있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 오브제와 자개를 결합시킨 작업들을 선보인다. 여성 마네킹의 토르소를 감싼 자개, 자개로 감싼 하회탈, 파운데이션을 바른 태권브이 가면의 동자승이 그것이다. 여성의 연약한 나체를 감싼 자개는 일견 매력적인 여전사를 연상시키지만 그녀의 입에는 은빛 재갈이 물려 있다. 「하이탈」이라 이름붙인 하회탈은 웃고 있지만 사실 그 안의 인물도 웃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탈의 이름 '하이탈'은 그의 자화상이 그랬듯 다시 중의적이 된다('하이'라는 인사말을 떠올리며 보아도 의미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태권브이 탈을 쓴 동자는 산 중 사찰에서 태권브이가 가지고 싶은 어린 동자승의 즐거운 정체성 혼란을 보여준다. 조금은 가벼운 웃음을 띠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지만 파운데이션을 바른 탈과 「파데」라는 제목은 우리의 즐거운 상상에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피부 잡티를 가려주는 기능성 화장품 파운데이션의 요즘 줄임말 '파데'라 이름붙이면서 우리가 사회와 대면할 때 쓰기 마련인 가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새들의 작업은 자개라는 전통의 공예적 작업이 주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연약한 속살을 보호하는 딱딱한 조개껍데기가 그렇듯 그의 작품세계 자체가 이원적이고 다층적이다. 「Nimoam[니몸]」, 「하이탈」, 「파데」라고 작품의 제목을 지어주는 언어유희 또한 작품의 시각적 요소와 의미의 층위 사이에 균열을 만든다. 이 미학적 외피와 언어인 제목이 만들어내는 균열은 자개라는 물성이 가지고 있는 단단함과 생명력, 나아가 다채로운 빛깔이 뿜어내는 영원성에 이르는 요소들을 자아와 욕망, 아름다움과 죽음, 탐닉과 노동집약적 작업 등등 다양한 층위로 연쇄시키면서 생산적인 파열을 만들어 낸다.
전혜원은 오브제를 만들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공간이다. 마치 평면의 캔버스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색과 선은 여기저기 펼쳐진 평면과 공간을 가로지른다. 그에 더해 그녀는 갤러리 바닥의 반영까지도 침범하고 끌어들인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와이어와 그림자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점유하는 공간 모두를 쥐고 있는 그녀의 미학적 충동은 2차원의 평면과 3차원의 공간, 즉 회화와 조각의 사이를 오간다. 1964년 미국의 미니멀리즘 미술가 리처드 모리스는 전시장에 입구를 가로지르는 들보, 모서리를 닫은 삼각형 판자, 천장에 매단 입방체, 중앙에 놓인 벤치와 같은 직육면체 등을 공간을 가로질러 설치하고 관객이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도록 했다. 관객은 변형된 공간을 지각하면서, 그 시간마저 작품이 되는 전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지만 무용수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던 모리스의 이력에서 탄생한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미술가로서 그는 공간의 안무가였던 것이다. 전혜원의 작업에서 공간에 대한 안무는 모리스의 현상학적 경험에 정서적 내러티브를 더한 듯 보인다. 굵직한 캔버스가 보여주는 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의 요소들, 반영상, 그림자는 기억, 이야기, 관계를 환기하는 정서까지도 자아내기 때문이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미학적 태도의 열정은 일견 차가운 머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그 문턱에서 울리는 색채와 가녀린 선,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노래가 조우하는 정서의 공간은 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 배혜정
Vol.20200930b | 4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