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재)세종문화회관_(사)한국메세나협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입장마감_06:30pm ▶ 전시관람예약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로 81-3번지) 1관 Tel. +82.(0)2.399.1000 www.sejongpac.or.kr
예술가는 한 명 한 명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정과 과정에 따라서 세계를 만드는 과정 중에 있거나 이미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예술가, 그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세계 전체, 또는 그 세계의 일부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예술가들이 모두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란 나와 다른 세계가 조우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근당 예술지상을 통해 우리는 회화의 세계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현재의 회화가 직면한 문제와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회화의 한계, 끝을 마주한다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만나기 위함이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도전의 고난과 그 성취를 떠올리며 우리의 상상력을 고취한다. 예술의 현실과 일상 속 예술이 교차하며 서로를 끌어당긴다. 세계의 동서남북과 위아래는 끝이 없다. 한계와 끝은 세계의 끝이 아니라 우리 인식과 상상의 끝을 말한다. 끝은 세계의 몫이 아니라 우리 사유의 몫이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한 회화의 세계가 이와 다르지 않다. 그 끝을 보고자하는 화가는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갈아 넣어야 한다. 그의 생과 동일한 무게와 시간, 깊이와 등가로 교환한 세계이다. 그것이 그의 회화 세계를 구성하고 결정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가상과 실상이 저절로 만나게 된다. ● 누구는 그림과 만나는 것을 작가와의 대화 또는 작품과의 대화로 비유하곤 한다. 또 누군가는 예술과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욕망과 결핍의 변증법적 또는 역동적 관계라고도 해석한다. 뭐가 되었든 회화작품을 보는 것은 만남이고 대화이고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고 교섭하고 융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새로운 이미지 또는 형상의 바다를 서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깊이 들어가 존재를 만나고 의식의 바다 위에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치의 잠수병에 걸린 다이버의 운명처럼 몸을 순환하는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의 강약과 반복이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한가하고 호사로운 취미의 경계를 넘어 멀리 날아간다. 모험이자 도약이다. 우리의 욕망과 결핍은 언제든 일상의 의식과 생활로 되돌아온다는 고민과 걱정을 동반한 채 조금씩 더 나아간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 이상의 되돌아오는 압력은 그 배수로 증가한다.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생각, 소신대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고결한 성직자도 쉽지 않은 일을 예술가라고 특별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예술의 세계에서 그리고 현실의 삶 한 가운데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회화나 예술을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망각하고 하나의 일상과 현실로 느끼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샘이 말라 물고기가 모두 땅 위에 드러나자 서로 물기를 뿜어 주고, 서로 거품을 내어 적셔 주지만,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은 채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장자의 이야기처럼. 예술이 현실을 망각하고 현실이 예술을 망각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창영 작가가 만드는 이미지는 부드럽게 채색된 모노크롬 연작이다. 작가는 처음 떠올린 단순하며 명징한 최초의 이미지를 수 회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모호하지만 거대한 색면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과 사건, 분명한 주제 모두를 색채의 안개 속에 용해시키는 모노크롬을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현실과 만난다. 작업은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모노크롬의 채색으로 은유하면서 평화와 전쟁, 갈등과 화해, 폭력과 대화가 혼재하는 세계와 일상을 견디는 과정이다. 작가의 명료하고 평평한 칼라는 수많은 실재의 역사와 현실과 상상과 관념이 혼융된 독특한 균형의 순간을 은유한다. 모순과 갈등을 평생 상상만 해온 사람과 실제로 그 한가운데에서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은 서로간의 건널 수 없는 이해의 간극을 느낀다.
작가는 자신의 모노크롬 속에서 남북분단의 현실을 사유한다고 말한다. 긴장과 갈등, 잠재된 폭력과 살인의 기억들이 일상의 평화와 평온을 떠받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깝게는 제국과 식민지의 현대사, 남북분단과 전쟁의 참혹을 떠올린다. 멀리는 생태계의 교란종인 인간이 살해한 수많은 순진무구한 야생의 생명들과 만나 대화를 하고 위로한다. 사죄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 우리의 현대사가 알려주는 잔혹한 사실들과 처연하고 깊은 우울,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어울리는 용기와 고군분투를 떠올린다. 화가의 길이 본래 그런 길인가? 폭력과 갈등이 거대하고 첨예할수록 평화와 평온, 대화와 포용이 더 절실해진다. 김창영의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토록 정갈하고 매끄럽고 잔잔한 모노크롬 색상 사이로 얼핏 보이는 세계의 진짜 얼굴이다.
색과 형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복잡하게 재현된 풀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분명한 모습을 감추듯 화면 전체가 율동한다. 마치 다른 존재가 있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듯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태도와 운동에 대해 반응 또는 조응하는 운동의 이미지이다. 작가에게 회화란 화가의 몸의 움직임과 호흡의 기록이다. 화가도 살아가는 존재이니 숨을 쉰다. 그가 흡입하고 내뱉는 호흡의 운동은 실존의 가장 간명한 증거이다. 죽은 사람의 가슴은 너무도 조용히 가만히 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은 오르락내리락 움직인다. 너무도 정적인 존재와 살아 숨 쉬며 떨림 또는 진동을 만드는 존재. 생과 사의 사이에서 관찰되고 기록되는 것들이 회화가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림도 없다. 적막한 어둠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사후의 문제는 상상의 영역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상상이 현재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다. 거기에서 모든 이미지는 현실 속에 동일한 무게와 질을 지닌 사물처럼 다뤄질 수 있다.
우리는 꿈을 꾸지만 현실도 꿈의 일부이며 꿈도 현실의 일부이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고 모든 현실이 상상이 된다. 실상과 허상은 그렇게 위치를 바꾸며 우리를 구성한다. 채우고 비우고 바꾸고 변화시키면서 말이다. 존재를 향해 다가갈수록 비존재가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비존재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수록 존재가 솟아오른다. 불안과 공포, 겁을 먹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가 준비되었다면 예술이 이러한 통찰을 준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마주하고 반걸음만 그 밖으로 나가도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관찰만 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야생의 밀림처럼 빽빽하게 앞을 가로막는 현실의 복잡한 관계와 사건들 사이로 몸을 움직여 나아간다.
검은 장막 연작은 어둡고 침울하다. 커튼을 장막으로 번역하면 한없이 무거운 중력과 깊은 구멍 같은 어둠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검은 장막의 이미지를 통해 마치 검은 구멍 속에서 깊이 잠겨있던 개인과 사회, 역사의 트라우마를 끄집어 올린다. 개인이건 사회건, 현재이건 과거건. 모든 인간의 역사는 상처와 치유의 반복이다. 대부분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존속하고 확대 심화된다. 더 아픈 상처가 된다. 이렇게 업그레이드 된 상처와 트라우마의 연속이 검은 커튼으로 은유된다. 검은 색은 질병과 죽음을 상징하니 말이다. 눈을 감는다고 검은 색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눈꺼풀을 이루는 세포와 혈관과 신경의 운동이 전기적 빛을 내며 은하계처럼 화려한 빛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오히려 검은 어둠은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볼 때 느끼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무수히 증명된다. 인간이 얼마나 더 악해질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눈을 감고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풍경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자신들의 전쟁 경험을 후배 세대들에게 목소리 높여 간증한다. 그러나 후배 세대들도 각자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고 있고 각자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더 후벼 파고는 한다.
가끔 상처를 건드리면 우리의 뇌에서 고통을 잊기 위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쾌감을 주기도 한다. 회화가 인류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기능성 약재는 아니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감동을 주기도 하고 따듯한 한마디의 격려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죽음과 상처와 고통을 주제로 우리의 일상과 현실을 비추고 가리는 검은 커튼을 떠올린다. 작가의 회화 이미지는 검은 커튼처럼 미술관의 실내를 어둡게 가리고 있다. 우리가 손을 뻗어 빛이 들어올 수 있게 장막을 걷어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장막은 평평하지 않은 현실의 깊은 심도(深度)를 은유한다. ● 환경오염과 생태위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를 시험하는 시절이다. 인류의 적은 과거 야생의 자연에서 문명의 인류 자신이 되었다. 회화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거꾸로 현실이 회화를 재현하기도 한다. 현실보다 아주 일찍이 우리에게 존재했던 예술도 있다. 또는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세계를 사는 예술도 있다. 아주 밝은 빛은 우리의 눈을 마비시킨다.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의 어둠이다. 태양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작가들은 빛과 칼라의 향연에 마비된 눈을 뜨게 하는 새로운 빛을 모색한다. 모든 예술가들이 정도와 과정의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빛을 모색하기 위해 더 깊고 무거운 어둠과 대결하는 것이다. 세계의 이면, 다양한 얼굴을 하고 등장하는 세계의 얼굴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선다는 점에서 화가의 정신과 그의 일상은 얼마나 단단하게 단련해야할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넘어선다. 예술과 세계, 회화와 현실은 다르지 않다. 예술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굴 이기려는 것도 아니다. 예술과 현실은 서로를 비추는 빛이고 어둠이다. 길거리의 흔한 돌멩이마저도 너무도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만히 있으려는 강렬한 욕망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정적이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게 약동하는 화가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는가? 이번 종근당 예술지상 작가들의 주제와 회화는 풍요로운 경제발전과 풍성한 문화적 향유를 즐기는 오늘의 세계를 한 꺼풀 벗겨보면 드러나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회화가 세계와 만나는 순간들을 경험하길 기대한다. ■ 김노암
Vol.20200924b | 제7회 종근당 예술지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