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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8:00pm
세종갤러리 SEJONG GALLERY 서울 중구 퇴계로 145 세종호텔 1층 Tel. +82.(0)2.3705.9021 www.sejonggallery.co.kr
전시가 다가올수록 스무살 무렵 앓던 통증이 불쑥 도져오곤 했다. 캠퍼스를 매캐하게 채우던 최루탄 개스에 눈과 볼이 따갑게 쓰라려 올때면 미대 건물로 가던 발걸음은 맥없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잡히는대로 책을 펼쳐 평생 그림을 그려야할 이유에대한 답을 찾아 헤맸다. 팬데믹 한복판에 예정대로 전시회를 진행하는 결정은 손톱 밑을 찔린 것 처럼 그 때의 성가신 아픔을 상기시켰다. 어수선한 불안 속에 잔인했던 세 번의 계절을 보내고 평상시에도 절로 숙연해지는 가을의 문턱에서 더 깊이 고개를 떨구게된다. 그림그릴 이유를 또 찾아내야만했다. 일시정지 상태로 멈춰선 비현실적인 낯선 도시 풍경을 애써 외면한 채 안에서 만큼은 더욱 부지런히 방과 방을 오가며 희망의 신호를 지어내고자 했다.
마스크를 끼고 숨죽여 복도를 지나 밖을 나서면 한꺼번에 덮쳐오는 싱그런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속에 눈물이 왈칵 고이곤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작정의 참회와 감사가 밀려오는 감격의 순간이다. 투명하게 살랑이며 웃음짓는 연보라, 자줏빛, 주황, 분홍의 작은 꽃잎들과 어림잡아도 열 가지가 넘는 셀 수 없는 초록빛의 향연! 생명의 에너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인적이 드물어 푹신해진 잔디에 누워 떠가는 흰 구름 끝자락을 따라간다. 어느덧 할머니와 엄마가 맞잡아 당기며 풀을 먹이던 이불 호청 위로 둥둥 떠다니던 뭉게구름에 가 닿는다. 언니와 나는 앞마당에 지천으로 핀 채송화 사이로 훌쩍 자라 씨앗을 터뜨리는 봉숭아 꽃밭을 좋아했다. 꽃으로 빨갛게 물들일 손톱 생각에 한껏 부풀어 긴 장대로 디딘 빨랫줄에 널어놓은 이불 호청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숨바꼭질을 했다. 쨍한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던 흰 천 사이로 유난히 푸른 하늘이 나란히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있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보면 시간과 공간의 값은 평준화가 된다고한다. 기억의 파편들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네모꼴로 수렴되어 각자의 소실점에서 다시금 한 자리로 모였다가 흩어지며 진동한다. 집 앞 공원에서는 매일 숨었던 보물이 하나씩 나타난다. 채집한 자연의 색과 형태를 놓칠세라 다급히 돌아와 네모난 천에 색색으로 물들여 기억에 저장한다. 자연이 조각조각 픽셀이되어 네모난 나의 방을 가득 채운다. 이 원소화된 픽셀들을 커다란 흰 네모 천에 탄성있는 투명 실로 느슨하게 엮어 서로간에 미세한 떨림을 유지하도록 이야기를 지어간다. ●한참 후 방 안엔 백년동안의 시간이 작은 방들이 되어 옆으로 나란히 선다. 할머니의 은은한 창호문 방, 엄마의 진분홍 화사한 이불이 있는 방, 나의 마른 꽃 붙인 한지문 방 ..옆으로 슬쩍 딸들의 방도 끼워 넣는다. 외가댁의 뒷산 대나무 숲에서 대청마루로 불어드는 산들바람은 집안을 한바퀴 휘돌며 맞은편 대문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시름 마저 데리고 날아갔다.
물들이거나 점을 찍은 삼베 픽셀들은 까슬한 올 사이에 숭숭 뚫린 구멍을 드나드는 공기를 머금어 몇겹씩 겹쳐도 무겁지 않다. 변덕이 들어 언제든 뜯어 다시 이야기를 쓴다해도 허락할 폼새라 넉넉한 물성이 한지같아 맘에 맞는다. 작은 주방에서 시작해 작업실이 되어버린 거실을 가로지르면 한 평 남짓 유리로 된 방이다. 부엌과 대청, 안방을 한걸음에 오가며 밥 짓고 이불 손질하던 할머니와 엄마의 일자구조 한옥과 똑같이 닮았다. 유리방에서는 해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상과 다채로운 색감의 변화로 인해 마침내 걸어두었던 천 작품이 완성된다. 유리방의 천정에서 늘어뜨린 삼베그림은 낮엔 햇빛, 밤엔 전등빛으로 반투명한 표면효과를 내며 스며든 자연스런 얼룩으로 양쪽 면에 조금씩 다른 이미지를 새긴다. 그것은 물감이 배어든다 하여 동양화라 할수도 콜라쥬를 했다고해서 서양화로 구분짓기도 애매한 '색칠하고 선을 그은' 회.화.이다.
벽에 걸려지던 한 면의 회화가 여러 조각으로 해체되거나, 빛과 함께 양면을 활용하거나, 실내 공간의 중앙에 세우고 창에 걸거나 눕히기도하는 다양한 설치방식은 공간과 함께 변화하는 할머니와 엄마의 그것과도 같은 일상 속의 확장이다. 그녀들의 일상에 예술행위가 더불어 존재해온 셈이다. 성근 올의 삼베픽셀은 겹치는 정도에 따라 경계면에 구간 교환이 일어나고 빛의 방향과 양에 따라 위에 그려진 이미지의 보이는 정도가 달라진다. 단순히 실과 안료의 집합체로 보이기도한다. 지난 전시에 사용한 린넨보다 삼베는 올이 느슨하고 가늘어 더 민감하게 빛에 반응한다. 빛이 적어지면 형상이 드러나 구상성이 높아지고 빛이 많아질수록 재료자체의 물성이 드러나 미니멀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응집과 발산의 대조적 에네르기가 파동치며 팽팽히 긴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밸런스를 향해 움직인다. 화면 위에 구사하는 자연의 모티브들은 주로 곡선으로 그려져 인위적인 직선을 중화시키고 직선은 일루젼을 안착시켜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견고한 틀 대신 자유롭지만 부드러운 천그림과 물을 쓴 재료 특성상 힘이 약해보일 때에는 코팅된 표면 위에 오일을 사용해 강한 터치나 마티에르를 얹은 견고한 캔버스화를 옆에 둔다. 이로써 대조적인 물성의 충돌과 타협으로 공간 내에 흐르는 기의 흐름은 서로 시너지효과를 내며 균형을 잡아간다.
수학자 버코프는 미의 척도를 질서와 복잡성의 함수관계로 규정했다. '시인이 똑같은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예술가라면, 수학자는 서로 다른 것들에 같은 이름을 붙이는 예술' 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기호화된 픽셀은 원소처럼 본질을 규명하는 최소단위를 대변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다채로운 형상들은 나의 에너지가 결합되며 다이내밐한 역학관계를 형성한다. 할머니로부터 4대에 걸친 딸들까지의 삶이 닮은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추상화해 보편성을 찾고 색과 면, 선으로 이루어진 조형언어로 변환시킨다. 시간에 실린 개별적 이야기들은 시나브로 추상그림에 가까와져간다. ●구원은 '넓게 보는 것' 이라고한다. 몸을 투과하며 관통하는 빛은 덮여진 이미지를 하나씩 벗기고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밝힌다. 작업도 나도 빛에따라 서서히 순수한 자유의 세계로 다가간다. 어두컴컴한 교회의 내부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넓은 영의 세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관한 본질의 깨달음에 인도되듯이 빛과 바람이 함께 작동되는 삼베그림의 투명한 울림이 보는 이의 내면으로부터 창 밖의 세상을 보는 하나의 필터가되길 바란다. 몸과 맛을 위한 요리를 하는 행위와 맘과 멋을 위한 창작을 하는 행위의 바탕은 천의 안과 밖 처럼 같다. 폭발적 에너지로 피어났다 때가되면 순순히 지는 생명의 자연법칙에 인간만이 부여하는 생명의 의지가 창작활동의 근거이기도하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성경 고린도후서 12장 10절) ●자연과 사람 그리고 창조주가 함께 만나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시대의 아픔은 치유될 것이다. 그녀들의 세 칸 방에서 이루어지던 일상은 내게로 와 딸들에게로 이어지며 새롭게 태어난다. '예술가란 고뇌의 세계에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 세계를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미세레레 연작을 그리게한 루오의 친구 쉬아레스의 격려에 말아놓은 두루마리 삼베를 펼친다. 세칸 방 이 켠 에서 파스타 소스의 농도를 맞추고 저 켠에서 붉은 물감을 섞다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린 손가락에 스스로 면죄부를 쥐어주며 햇살 비치는 쪽을 향해 2020 천리지행 모퉁이를 돈다. (2020년 9월 어느 날 밴쿠버에서.) ■ 함미애
Vol.20200915d | 함미애展 / HAMMIAE / 咸美愛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