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0_0905_토요일_03:00pm
참여작가 고형재_곽재필_김기로_김대희_김동숙 박병철_임승오_조동균_조보환_허진욱
주최,주관 / 사)한국예총경기도연합회_경기미술협회 후원 / 경기도_광릉숲예술인공동체_명산아트힐
관람시간 / 10:00am~06:00pm
포천 꽃배산2길 105 www.kggart.com
A회화표현의 기념비적 논리에서 일탈하고 몽상적 사유와 추상적 재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 이와 문명과의 상관관계를 느끼도록 하는 소통방식을 즐겨왔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대상의 구조적 특징이나 기념비적 재현보다는 인간경험의 다양한 편린들을 모티브로 사용하여 잊혀져가는 기억에 다시 생명성을 부여하고 이를 새로운 가치로 고양시킴으로써 예술의 진정한 속성을 되찾고자 하는 생산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고형재
1918년 3월, 20세기 가장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에곤 쉴러(1890-1918)는 사망했고,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독감을 극복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마스크 착용과 비대면 문화가 일상화가 된 요즘,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적 펜데믹 이후 제한된 일상들 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심리적 불안과 공포들이 공존하고 느끼며 살고 있다. 체세포 분열과 같은 나뉨과 이음 대칭되는 영상 이미지들, 체온을 측정하는 열감지 영상 같은 극대화 된 색감, 속도감 있는 영상들로 심리적 불안과 긴장 속 일상의 단면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2020년 사회적 상처는 치유될 것이다. 코로나19의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시 장기적인 펜데믹이 지속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위기 속 조각난 삶의 치료와 사회적 국란도 극복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
작업의 최종 목적은 즐거움의 공유이다. 즐거움을 시각적 아름다움을 접할 때도 깊은 만족을 느낀다. 더 나아가 현상, 상황, 스토리텔링이 동반된 시각적인 결과물의 총체적인 표현의 공감과 설득력을 지닌다면 "알레그리아(Alegria : 환희, 기쁨을 표현하는 몸짓, 행위)라 외치고 싶다. 이런 표현을 위해 동적 요소가 필요했고, 현실과 비현실(이상적 표현)을 연결해주는 기법으로 영상, 사진 등 멀티미디어를 통한 시네마그래프(Cinemagraph)를 표현기법으로 선택하고 최적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곽재필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물결, 즉 동심원은 내부로부터 외부로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수면의 표면장력과 물리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파문은 외부로 확산 될 수록 파장은 길어지고 파문의 높이는 낮아지게 된다. 그러다가 물리적인 힘이 미약해지면 마침내 파장은 수면의 표면장력으로 흡수되면서 소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물결은 부드럽고 온화한 자연의 손길을 상징한다. 나무가 물결이 되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소재로서의 물결의 이미지가 나무라는 재료를 통해 표현됨으로써 조형적인 상상의 공간이 현실화 되고 있다. 현실을 인위적인 공간으로 이동시켜 다시 현실처럼 보이도록 유도하는 조형의 묘미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고 따스한 자연의 손길과 그 감촉을 유발하는 시각적인 이미지 및 정서를 통해서 말이다. ■
요즈음 나의 관심은 작품을 통해 미리 정답을 알려주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작품이 아닌 답이 없는 모든 관람자들이 다양한 상상력으로 작품을 감상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사과가 있다고 생각하보자. 어떤 관람자는 이를 보고 사과의 신 맛을 생각하고 어떤이는 사과의 붉은 빛만 보고 또 어떤이는 공처럼 둥글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시각과 경험을 통해 보는 관점이 이처럼 다양하고 다른데 이사과는 형상으로는 기껏해야 몇가지 밖에 상상되지 않는다. ■ 김동숙
`초감각적인 것`과 교감하는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점은 다름 아닌 `순간``지금` 같은 시간적 계기이며, 발터 벤야민은 `순간적으로 빛남 혹은 스쳐 지나감` 같은 형상적 표현을 통해 그러한 시간적 계기를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유사성의 지각으로서의 작품은 다름 아닌 해석자가 서 있는 `지금` 이라는 현재의 시간 의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와 같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의 인식 가능성`이 작동될 때 모든 형상은 단순한 형상으로 머물지 않고 `읽혀지는 형상` 혹은 `변증법적 형상` 으로서의 작품의 특성을 갖게 된다. 박병철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 순간과 영원과 같은 상대적인 가치의 대비와 순환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거나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관조의 시각으로 조망함으로써 그 진폭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육안에 의한 객관의 눈` 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지극한 `지혜의 눈` 으로 읽어 내야 할 대상이다 ■ 박병철
'과거의 표현, 미래의 추측'의 측면을 넘어서, 과거를 복원해 미래를 예측하는 만큼, 미래에 현재 우리의 현대문명을 복원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대했던 무지함을 추측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왜 시간에 주목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조각가 임승오는 “작업초기 점토작업을 통해 흙의 쌓임에 관심을 갖게 됐고, 흙의 쌓임은 곧 시간의 쌓임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과거가 우리 발밑에 굳게 쌓여있는 흙에 새겨져 있다며,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가시화가 예술가로써 자신의 몫이라는 뜻을 전했다. 보이지 않는 과거에 대한 고고학적 상상력을 미래로까지 연장하는 가시적 예술품, 그것이 바로 임승오가 추구하는 조각이다. ■ 임승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몇 가지 규칙을 세운다. 규칙은 '선'을 매개로 해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가리키는데, 이는 '선'이 반복되는 간격, 같은 색이 사용되는 순서나 횟수, 선의 방향이 바뀌는 순서 등과 같은 것이다. 이를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사이클은 캔버스 위에서 일종의 '레이어'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각적 변화에 관심을 둔다. 마스킹 테이프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재적 이미지와 이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을 통해서 작업을 변화시킨다. 테이프는 캔버스의 영역을 일정부분 선의 모습으로 가리는데, 이 가림으로 가려지지 않은 남은 영역은 '색칠하다'를 통해서 '있음'으로, 테이프로 가려진 부분은 역으로 남겨지게 됨으로써 '없음'으로 된다. 이 과정이 캔바스의 전체 화면이 테이프로 덮일 때 까지 규칙에 따라 반복하게 된다. 이 반복을 통해서 마치 레이어의 층이 겹겹이 쌓이는 것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내며, 이를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를 일궈낸다. ■ 조동균
다비드의 이미지를 픽셀화하여 각각의 픽셀에 다양한 사람들의 전신사진을 불규칙하게 쌓아 접합한 것으로 하나의 시점에서는 온전히 다비드를 느낄 수 있으며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해체가 되도록 구성하였다. 반대 방향에서는 원본이미지를 볼 수 있으며 시점에 따라 해체의 느낌은 극대화된다. 서양미술의 역사와 서구문명이 그것들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신비화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체된 서양미술의 이미지와 우리의 것으로 재조합된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신비화는 진실을 파괴한다. 신비화는 우리의 의식을 흐리게 하며 신비화에 따른 인식은 가치판단의 붕괴를 가져온다. 그러한 붕괴는 존재의 이해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 조보환
물질이 정신을 앞서가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요구 되고 있고 정신은 각자의 안에서 상대적으로 과학과 물질에 대해 주체적인 입장을 잃게 된다. 소외된 정신은 다른 원천에서 활력을 가지길 원하고 정신이 선두에 있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고인돌을 통하여 차가워지는 인간의 생활 속에 존재하는 심성과 감성회복의 기회를 나누고자하며 이를 고인돌 형태로 형상화 해 보았다. 내 의자가 행복한 의자라고 믿으면 내 삶에 들어가는 그때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삶의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삶을 가꾸어가면서 인생의 목표나 의미가 달라진다. 나의 의자들은 그렇게 여러 의미로서 고인돌 형태의 조형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 조영일
크기가 다른 스테인리스판을 하나하나 붙여 형태를 만든 다음 갈고 광내는 작업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깊이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내부의 노란빛 LED로 크기가 다른 원과 원 사이에서 뿜어 나오는 빛의 아름다움을 작품화하여 살아 숨 쉬는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작품의 소재에 목말라하던 나에게 동그란 스테인리스판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재료의 탐닉으로 센딩과 광내기, 원의 조합으로 동그라미 속의 나의 창작열은 날개를 달고 우주를 유영한다. 혼을 다한 작품 속에는 아르누보적인 독특한 아우라가 느껴져 나만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안토니오 가우디를 좋아하는 난, 요즘 동그라미의 희열에 빠져 참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 허진욱
Vol.20200913g | 나뉨과 이음의 미학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