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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제 11회 일우사진상 전시부문 수상작가展
관람시간 화~금_10:00am~06:30pm / 토_01:00pm~06:30pm 일_01:30pm~06:30pm / 월,공휴일 휴관
일우 스페이스 ILWOO SPACE 서울 중구 서소문로 117 대한항공빌딩 1층 제 1,2 전시장 Tel. +82.(0)2.753.6502 www.ilwoo.org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은 대한항공 서소문 빌딩 1층 로비에 위치한 일우스페이스(一宇SPACE)에서 안종현(38) 개인전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를 개최한다. 안종현 작가는 2020년 2월, 제11회 일우사진상에서 전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2020년 8월 6일(목)부터 10월 20일(화)까지 일우스페이스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 속 경험이나 흔적만이 남겨진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개인과 공간의 심리적, 사회적 거리감을 담은 신작 「시작의 불」(2019), 「멀리 가까이 중간」(2020) 시리즈를 선보인다. ● 이번 전시는 토탈미술관 객원 편집장 고윤정이 협력 기획하였다. 고윤정은 안종현의 작업이 "낭만주의 시대 풍경화나 무한한 것을 동경하는 감정적인 태도에서처럼 바라보는 과정에서 오는 압도감과 숭고한 감정을 먼저 끌어들여 온다."고 평하며, 나아가 안종현 작가가 "관찰자와 행위자의 역할을 오고 가면서 구체적인 상황과 저 너머의 풍경에서 오작동과 균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며 작가의 사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친밀함과 거리감, 사회적인 관계망 등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지난 2월 일우사진상 심사위원단은 안종현의 작업이 사회 주변부 모습과 이들이 가진 과거와 현재, 미래 등의 복합적인 모습을 다양한 시점과 시각적 해석으로 광범위하게 담아내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 한편,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에서 주최, 주관하는 일우사진상은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지닌 유망한 사진가들을 발굴해 국제적 경쟁력을 지닌 세계적인 작가로 육성하고자 2009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2020년 제11회 일우사진상 공모에는 국내의 열정적인 사진작가들이 대거 응모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각 부문 수상자는 사진과 현대미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심사위원단이 1차 심사 합격자들을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통해 선정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참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들을 기회를 가졌고, 국제심사위원단에 한국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알릴 수 있었다. ■ 일우 스페이스
'동시대 미술'의 담론이 등장하면서 대두되는 이슈들은 대부분 미술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시 서문이나 기금신청서, 각종 리뷰에서 나오는 미술과 장소의 관계는 '장소 특정적'이라는 단어로 예술이 장소를 바라보는 데 있어 사회적인 의식이 있고, 정치적으로 참여한 미술 실천으로 이어지는 의미로 여겨졌다. '미술'과 '장소'는 건축, 디자인, 도시 이론과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삶이 묻어나는 과정이 곧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관계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1) 이것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안종현의 작업이 현상학적, 심리적으로 경험한 장소, 개인의 삶에서 묻어나온 감정이 어느 순간 사회의 거대담론과 접속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 안종현의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는 한 개인이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물리적인 장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이 반복되는 역사적인 현상과 연결되는 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종현은 「통로」(2015), 「미래의 땅」(2013) 시리즈에서 이미 작가가 일상에 서 경험하고 있는 곳, 혹은 흔적만 남겨진 곳을 다시 바라보는 작업을 하여 왔다. 「통로」(2015)는 매일 같이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하는 길을 다양한 시간대에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재인식하게 된 종로의 모습이다. 종로의 한 거리가 누군가에게는 출근길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돌보러 지나가야 하는 심리적인 공간이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더불어 신작 시리즈인 「시작의 불」(2019)에서 거대한 산불이 남기고 간 흔적은 모습은 시커멓기도 하면서 숱하게 많은 사연과 기억을 묻음과 동시에 앞으로의 삶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이 한 장면에 축적되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영역에 고스란히 집합되고 물리적으로 모든 것이 다 타버린 공간에서 다시 사회적인 관계망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
「멀리 가까이 중간」(2020)은 수년째 개인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심리적인 거리를 역사적인 잔상에 빗대어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무척 돈독한 것에 비해 작가의 삶에서 아버지는 왕래가 없는 낯선 존재였다. 얼굴도 닮지 않았고 언제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가족 관계에 대한 심리상태는 마치 미군이 남기고 간 흔적들, 시스템, 건물의 모습, 북한과 남한의 생태가 뒤엉켜 있는 모습이 어떤 때는 내 일인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거나 갑작스럽게 남일인 듯 바라보는 마음과도 닮아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몇몇 가지의 장면들은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떠내려온 강물 속 의자처럼 잘 닿지 않는다. 여기에서 보이는 DMZ, 미군기지, 미국이 지은 정신병원은 나의 삶과 남의 삶을 끊임없이 이어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는 장소들이다. ● 안종현의 작업은 낭만주의 시대 풍경화나 무한한 것을 동경하는 감정적인 태도에서처럼 바라보는 과정에서 오는 압도감과 숭고한 감정을 먼저 끌어들여온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무성하게 자란 숲과 덤불은 섬세한 초록의 힘으로 보여주고 경계가 지워진 듯 단단한 밧줄은 마음의 거리와 마주하는 풍경을 동일시한다. '심리적 거리'라 함은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뜻하는 시간적 거리, 공간이 떨어져 있음을 뜻하는 공간적 거리, 인간관계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사회적 거리,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발생확률적 거리로 나뉜다. 「멀리 가까이 중간」은 작가와 아버지의 지난 수년 간의 일들이 거짓말처럼 갑자기 찾아온 특정한 사건들, 과거의 일들이 지금의 사건으로 확장되는 연속적인 일들이 뒤섞여 시간과 공간, 관계,가능성이 한 순간에 집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렸을 적 있었던 일들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희미하지만 어느덧 작가의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있고, 체화된 지금의 상태는 미래의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준다. 안종현은 관찰자와 행위자의 역할을 오고 가면서 구체적인 상황과 저 너머의 풍경에서 오작동과 균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 고윤정
* 각주 1) 권미원 지금, 『장소 특정적 미술』, 현실문화연구, 2013, pp12-14.
죽음으로부터 면역까지 ● 죽음으로부터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유작 『On Late Style』에서 예술가들의 말기 작업을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했다. 하나는 기존 작업 전반에 대해 회고하고 사회·정치·역사 전면에서 조화와 화해를 지향하며 자신을 향한 비판과 논쟁을 해결하는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 마지막 작업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1) 전자가 예술가 자신의 인식과 현상학적 존재양식을 정리하고 도식화하는 안정적 작업이라면, 후자는 말 그대로 여력을 끌어모아 '죽자고' 달려들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평판이나 성칭에 먹칠을 할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작업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더 흥미롭다. 기존의 자신을 얽매던 권력이나 형식을 벗어난 '시대착오적' 창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가 마주한 죽음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있다. 최근에 조카가 태어났다거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저서 혹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취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갱신되는 생명력을 가진 대상에 흥미를 느낀다. 나에게는 작가 안종현이 그런 흥미로운 대상 중 하나다.
나는 작가의 정체나 가치를 판단할 때 현재 작업의 완성도 보다는 지난 작업의 일관성을 중점에 둔다. 안종현 작가는 흥미로웠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정 형식의 사진에서 실력으로 고점을 찍었다고 판단할 무렵이면 그는 자신의 작업에 죽음을 선고한 듯 전혀 다른 차원의 사진들을 발표했다. 「붉은 방」(2011)은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군부대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창촌을 기록한 작업이다. 욕망과 폭력의 역사가 응축된 극단적 내러티브의 전형인 공간을 중립적으로 다뤘고, 상징적인 오브제들을 균형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진 이미지로 재현하여 이와 모순되는 현실의 문제들을 환기시켰다. 그다음으로 발표한 「미래의 땅」(2013)은 고두암에 대한 과거의 예언과 역사, 현실을 사진으로 확장해 새로운 미래, 예언을 촉구하고 순환적인 시간관을 상기시키는 작업이었다. 독일의 사진 양식을 연상시키는 대형 카메라의 균형 잡힌 프레이밍, 일정한 카메라 높이와 정확한 수평, 수직, 낮은 채도와 차가운 색온도가 돋보였다.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나 「붉은 방」에서 보여준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통로」(2015)에 이르자 낮은 채도는 사라졌고 공해에 가까운 종로의 다양한 시각기호들이 프레임을 채웠다.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종로의 오색찬란한 시각기호와 풍경을 낯설 만큼 정돈된 구도로 기록한 작업은 사진을 통해 현실에 잠재된 현실(잠재태)을 길어 올리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피사체나 공간이 아닌 자신을 향해있었다. 「붉은 방」부터 「풍경」(2017)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의 작업에서 사진의 주체성과 사진가의 주체성 확립을 향한 미학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독립적인 가치나 정체를 판단하기엔 사진 이미지의 대상과 시각적인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다양했다. 개인의 미학적 성취를 넘어 사회, 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작가의 가치를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정신과 미학으로부터 ● 파괴된 집창촌, 강원도 산골짜기, 종로의 거리와 불에 탄 산 중턱, DMZ까지, 공간과 장소2)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작가 안종현의 중요한 전제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원론에 가까운 작가론은 기술 혁신에 따라 트랜스미디어 작업의 흥행하고 사진-디자인-디지털 이미지와 인화물 간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편협한 시각으로 치부되는 이 시점에선 다소 교조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사진의 독립적인 지위, 바로 '정신의 장소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래픽 작업만으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일러스트와 같은 벡터 기반의 이미지는 무한으로 확대되고, 가상의 공간은 창조가 가능하며 이들은 물리적인 공간과 밀접하게 결합해 있다. 이 공간들에 직접 갈 필요도 없이 스크린 위에서 창조하거나 원격으로 촬영할 수 있다. 더 이상 사진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실제와 가상을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물리적 사실을 직접 마주하는 원론적인 다큐멘터리 접근법은 사진을 통해 작가의 정신의 존재를 지표Index하고, 나아가 작품을 만들어낸 신체와 정신이 자리한 장소를 지표한다.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화부터 하이퍼리얼리즘 작품,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가상 그래픽 공간 작업, 현실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까지, 이들은 모두 자신을 창조한 신체와 정신의 장소를 동시에 지표하지 않는다. 물론 안종현의 사진에서 정신의 장소가 구체적인 좌표로 제시될 만큼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정신의 장소는 사진 속 공간과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 거리에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베르그송의 현상학에서 정신은 현실 세계를 감각하는 신체를 통해 구성되고, 다시 현실과 감각에 영향을 주며 순환하는 기억의 동태를 의미한다. 안종현의 작업에서 지표되는 정신을 구성하는 기억에는 전쟁을 피해 고향을 잃고 남쪽으로 피난을 온 아버지와 자신이 경험한 전쟁과 분단에서 위시하는 군대, 분단국가의 시민이자 사진가로서 관찰해 온 기형적인 도시 구조, 이념에 근거한 사회정치적인 분열, 아버지의 건강 악화와 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물리적 분리 등이 포함된다. 작가는 '현실로부터 분리된 현실'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음을 사진을 통해 확인시킨다. 이 현실들은 조밀한 중/대형 필름과 센서의 입자(픽셀)에 의해 세세하게 재현된 나무껍질, 철조망, 벽돌의 질감이나 익숙한 요소들로 구성됐지만 정작 실존하는 현실의 문제로서 마주한 적 없는 낯선 풍경을 통해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의 거리에서, 아름답거나 추하게 제시된다. 보는 이의 정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업들이 공통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사진 속 다소 반갑지 않은 현실 속에 위치한다는 사실과 이를 직접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생명력에 대한 가능성이다.
몸짓과 조형으로부터 ● 사진 이미지와 조형을 중심으로 안종현의 작품들을 살펴봤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는다."이다. 작가는 제한된 기회 안에서 현장을 답사하고 가로지르면서 불특정 피사체와 풍경을 기록하는 전형적인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 방식을 취한다. 정해진 형식 안에서 조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유형학이나 스튜디오 사진과는 거리가 멀지만 모든 이미지는 마치 당연히 그렇게 포착되어야 했던 것처럼 구도적, 조형적 안정성을 갖고 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철조망 이미지나 정신병원에서 포착한 하늘색 커튼 이미지는 이미지 안에서 완결적 구조를 갖춘 디자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조형적 특징은 작가의 카메라, 카메라 워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중계하고 전통적으로 사진으로 칭해지는 암실 인화나 잉크젯 프린터만 거치면 어떤 이미지도 사진으로 구분하며 빈곤한 이미지가 커뮤니케이션의 주류인 이 시점3)에서 카메라에 대한 논의는 아마추어 동호회나 SLR클럽 같은 대중적인 사진커뮤니티에서나 주목할 법한 기초적인 사안으로 다뤄지곤 한다. 그러나 알렉 소스Alec Soth,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같은 사진작가의 작가노트나 비평문, 가고시안, MOMA의 소개문에 대형 포맷 카메라 활용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카메라는 여전히 사진 이미지의 형식과 사진가가 기록할 현장을 마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안종현의 가장 초기작 중 하나인 「군대」(2005-2007)시리즈나 「붉은 방」을 살펴보면, 여러 작품이 35mm 소형 카메라의 유연하고 다채로운 위치와 렌즈의 원근, 수차 왜곡을 활용했다. 구도적으로 피사체의 형태를 강조하고 시선의 흐름을 유도하여 주제를 둘러싼 잠재된 내러티브를 강조했다. 「미래의 땅」에서는 건축, 인테리어 사진 수준의 통제된 왜곡과 직선적인 프레이밍 등 완성도 높은 대형 카메라의 카메라 워크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미래의 땅」의 피사체가 하늘로 뻗은 바위와 근대의 직선-콘크리트 건축물이었지만, 삼각대를 포함해 통상 10kg에 달하는 대형 카메라로 낯선 현장을 안정적으로 촬영하는 것은 DSLR을 들고 이런저런 사진을 시도해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아마 작가가 사진을 전공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대형 카메라를 다뤄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015년 「통로」 이후의 「풍경」과 같은 작업들에서는 중형 디지털 백의 장점을 살려 왜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폭넓은 피사체와 다양한 구도의 풍경을 담아냈고, 경우에 따라 35mm와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상징성 있는 존재들의 초상사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구축된 다양하고 정밀한 카메라 워크는 「시작의 불」, 「멀리 가까이 중간」의 DMZ, 정신병원, 미군기지 작업에서도 돋보인다. 타버린 나무의 뿌리, 강바닥에 놓인 주인 모를 의자, 국경 너머의 하늘을 비추는 바닥에 고인 물과 같이 우연으로 마주한 대상들을 필연적으로 느껴질 만큼 안정적인 풍경으로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 이미지의 구성 능력이 오로지 카메라에 의존하여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선배들의 말처럼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고, 카메라가 눈의 연장이라면, 이러한 성취는 현장을 마주하는 사진가의 숙달된 신체와 신체적 수행에 의해 완성된다. 사진이 기술, 물체, 매체와 같은 객체인 동시에 대상을 마주하고 기억하고 시각화하는 실존적인 몸짓,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작가의 '사진하기'의 수행은 퍼포머의 수행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정신의 재현, 현상학에서의 육체에 초점을 맞춘 근현대적 무용의 관점은 물론 이를 둘러싼 정동과 변수, 균열을 중심으로 하는 동시대 무용의 관점에서도 퍼포머가 육체를 매개로 개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적인 틀을 이룬다. 개인의 실존, 이 추상적인 목표는 흥미롭게도 물리적인 두 개의 조건을 전제로 한다. '(몸에)쌓임과 체득'이다. 가령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팔을 살펴보면 아주 얇은 경우에도 요측수근굴근4)만은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발레에서 팔의 곧은 선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팔을 고정시키고 손목을 돌려 팔꿈치 안쪽과 손바닥이 같은 방향을 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리의 경우 일반인보다 고관절 운동 전반에 사용되는 봉공근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꼭 발레가 아니더라도 물리적인 실천과 반복을 통해 몸에 쌓인다. 몸에 쌓인 근육들은 기술적인 동작의 섬세한 재현과 무대 위 실전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반복 속에서 무용수는 자신의 정신에서 비롯된 감정을 몸에 불어넣고 현장과 상호작용하며 특정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존하는 방법을 체득한다. 무용수, 즉 퍼포머의 쌓임, 체득과 같이 사진가,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기술적인 카메라 워크는 자신의 시선과 재현의 방식, 나아가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는 수행으로 확장된다. 물론 퍼포머의 정신이 육체적 재현과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등치 하지 않는 것처럼 사진가의 정신 역시 사진을 매개로 완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관객으로부터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존의 가능성을 체득한 신체는 더 이상 질량이나 강도에의 종속없이 적어도 작가 본인의 실존을 담보한다. 카메라의 현실에 대한 기술적 재현과 작가 본인의 감상에 기반한 주관적 재현, 안종현의 작업도 그 사이에 자리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사진의 매체적 특성과 실존적 수행, 양단의 팽팽한 균형 위에서 '운이 좋다면' 합리론과 경험론, 구상과 추상, 물질과 기억, 현실과 가상으로 끝없이 확장되어 온 철학적 논쟁에 대한 최소한의 해소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면역으로까지 ● 전시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를 구성하는 「멀리 가까이 중간」(2020)은 분단의 현실을 지축으로 하여 작가의 기억이 향하는 곳에서 몸이 체득한 방식으로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기록한 작업이다. 일반적인 풍경 기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사진들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자연'스럽지만 정치적 이념과 권력에 의해 분단되어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DMZ의 '부자연'스러운 현실을 담고 있다. 혹은 사진으로 마주했을 때 낯설고 부자연스럽지만 이 땅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미군기지, 정신병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극히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작가의 기억은 「군대」, 「붉은 방」부터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서사를 구축한다. 하지만, 안종현의 작업은 감성적 에세이가 아니다. 이미지들을 개별적으로 봤을 때 구조주의, 기호학적 해석이나 도상해석학적 접근을 요구하는 요소들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사진 이미지가 위치한 1/n 밀리의 스크린, 혹은 약 0.4mm 두께의 인화지의 앞, 뒤, 옆, 위, 아래에 있는 작가와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감정이다. 이 서사는 쓴맛이 나고 다소 멀게 느껴진다.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오늘날 우리는 거리 두기에 익숙하다. 전 지구적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거리 두기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기도 한다. 전쟁과 분단의 상황에서 상대와의 적정한 거리 두기에 대한 논쟁은 국가를 양극단으로 분열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애도와 추모, 상실과 상처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외면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문제를 수많은 외부의 스펙터클 중 하나로 남겨 놓는다. 이 단절의 종말은 결국 면역이 필요하다. 면역을 위한 항체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원인(항원)을 마주해야 한다. 이는 무수한 논쟁과 불쾌한 미열을 동반한다. 이미 죽었거나 약해진 병원체라면 그 과정이 수월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하지 못하다면 면역에 이르기 전 병원체에 의해 더 큰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방접종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독감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일을 뒤로 미루곤 한다. 그렇다면, 전시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와 당신의 거리는 어떠한가? 복잡한 미학과 현실의 문제들이 머릿속을 두드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완전히 외면하고 거리를 둘 수도 있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를 구성하는 사진들로부터 무엇을 느끼고 그 감상과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는 풍경의 조형적 아름다움 혹은 추함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사진 속 존재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나 기억, 정치적 견해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 감상들은 가슴 깊숙이 들어와 감동을 주거나 혐오를 유발할 수 있고, 적절한 거리에서 타인에 대한 추모와 애도를 촉구할 수도 있으며, 먼 거리에서 그저 객관적인 정보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 거리가 어떻게 됐든 그 곳에 정답은 없다. 우리는 사진 바로 앞, 혹은 표면 바로 위에 다가갈 수 있지만 작가의 진정한 의도, 촬영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상황을 완벽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작가는 사진의 뒤편에 있고 문제의 해결방법은 어디에, 얼마나 멀리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이에 있는 사진, 그저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없이 무자비하고, 차갑고, 비참한 객관적 사실, 혹은 상처와 기억들이 담긴 신체가 통감한 주관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 이들로부터의 면역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업의 제목 '멀리 가까이 중간'은 사실, 군대에서 사격을 연습하는 순서이기도 하다. 멀리, 가까이, 중간에서 표적을 겨냥하는 것은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필요하지만 전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멀리, 가까이, 중간에서 현실의 문제들을 직시하는 이 전시 역시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전시는 답한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 그 사이에 우리의 통로가 되어줄 사진이 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사진이 있다.' ■ 김진혁
* 각주 1) Erika Balson, "Laura Murvey's late style", Frieze, Vol.206, 2019, p.52. 2) 본 글에서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이-푸 투안이나 에드워드 랠프 등 1960년대 인류-지리학자들의 용어 정리를 기반으로 한다. 공간을 물리적인 실체를, 장소는 공간에 집단적 경험과 개인의 실천이 적립된 실존적 공간을 의미한다. 공간의 형성 자체를 사회적인 실천의 일환으로 보는 국제상황주의나 유물론적 입장은 다루지 않는다. 3)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론가인 히토 슈타이얼이 제시한 개념으로 제도화된 이미지 생태에서 배제되어 왔으나 디지털 미디어 내 효과적인 확산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주장하는 비주류 양식 혹은 저화질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Hito Steyerl, "In defence of the poor image" E-Flux Journal, Vol.10, 2009 4) 요측수근굴근(Flexor carpi radialis)은 팔목의 외회전에 관여한다.
가까이 혹은 멀리 ● 전시장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마주하는 이미지는 관객에게 관상의 출발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향방을 결정하곤 한다. 안종현 작가는 전시의 첫 작품, 「멀리 가까이 중간_DMZ-#01」이1)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라 했으니 작품이 관객의 시야를 가득 채우길 원했을 텐데 이 글을 위해 미리 전달받은 이미지는 고작해야 나의 모니터를 채울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겠지만 모니터에 눈을 최대한 가까이 갖다 대볼까? 내가 열어본 첫 이미지 또한 전시 전체에 대한 나의 해석을 결정해버렸다.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른 문장은 "피사체가 없다"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 하자면 주인공으로 보이는 피사체가 없어 보였다. 화면 대부분은 짙은 녹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다만 태풍으로 인해 부러졌을 것으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만 화면의 오른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나무가 도드라지도록 촬영되었다고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무가 해석의 실마리이며 시작점이라 확신하기 어려웠다. ● 어쩌면 그의 작품을 읽는 방법은 화면 속 주인공과 주변의 대상물이 상징하는 바를 해석해가는 전통적 그림 읽기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한다. 한 화면의 구도만으로도 스토리 엮기가 가능한 기존의 문법을 활용하려 했다면 피사체가 있기나 한지 의구심이 드는 촬영기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첫 번째 작품이 걸린 벽면을 돌아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전시장 입구를 차지하는 작품과 동일한 톤의 수풀 사진들이 걸릴 예정이라 한다. 그 중에는 사진을 절반으로 가르는 철사줄도 보이고 그 철사 줄 간간이 매달린 '지뢰'라 쓰인 붉은 사인물도 보여서 관객은 이 사진이 DMZ 어딘가를 찍은 사진임을 서서히 알아챌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전시의 제목이 언급하는 '거리'는 분단이 야기한 거리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나무는 아마도 분단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부가적인 정보를 위해 작가노트를 살펴보니 그는 그가 선택한 소재인 분단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이라 전제한다. 남북의 분단이 있고, 그의 경우 코로나 집단감염 발발 이후 정부가 발표한 언택트untact 조치로 인해 아버지의 요양병원을 방문할 수 없어 야기된 아버지와의 분단이 있다. 남북의 분단이나 언택트로 인한 분단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어서 작가는 이 전시에서 분단의 "분위기"와 "현실로부터 분리된 현실"을 시각화 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주인공 없는 사진과 점진적으로 설명이 더해지는 사진들을 배열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가 성취하려는 것이 분단의 상황이 이러저러하다는 추상적인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한다. 그는 사진 한 장 한 장에 내러티브를 심어 넣고 읽어내도록 하지 않는다. 분위기를 파악하게 하는 무대연출 방식이 이번 전시의 방법론일 수도 있겠다. ● 또한,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설명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포함된다. 그는 "현실로부터 분리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가상의 경계를 왕래했다"라고 말한다. 그가 왕래했다는 가상계는 브라이언 마수미가 규정한 가상계와 동일한 것일까? 마수미는 그의 저서에서 '가상계'를 관념계와 현상계 중간쯤 위치한 지각과 정동이 작동하는 영역이라 규정한다.2) 가상계는 추상적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언어화 하기 이전에 신체에 발현되었다가 사라지는 지각적 판단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그는 분단으로 인해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상태에 대하여 가졌던 그의 지각과 감각을 작품에서 다루는 것이 아닐까? 점점 더 명료해지는 것은 안종현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분단이라는 추상적인 관념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상징 메커니즘에 따라 분단이라는 관념어를 피사체에 대입하는 재현(representation)의 문법을 벗어나는 방법론은 정당한 선택일 것이다.
작가의 정동이나 감정이라는 것을 말풍선 없이도, 시각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미술사는 이것을 상징으로 해결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의 시각화가 여지껏 예술이 해온 기능이기도 하고, 예술이 가진 의미의 불확정성의 기원이기도 하다. 작가는 예술을 통해 정확한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아예 거부하는 듯하다. 적어도 첫 작품은 상징이 아니라 예술의 불확정성에 기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상징의 전달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한 정동을 관객이 지각하도록 정황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면 그가 회화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리하게 작동할 것이다. 맥루언은 차가운 매체와는 달리, 뜨거운 매체는 해상도가 높다고 했다.3) 대중매체를 연구한 맥루언의 분석은 텍스트, 회화보다는 사진 혹은 비디오에 적용되는 주장이다. 사진이나 비디오는 기계의 눈으로 포착되는 탓에 대부분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엑스트라 오브제들이 화면에 끼어들어 가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말 안해도 척이야'라는 표현대신 '안봐도 비디오야'라는 표현을 즐겨 쓰곤 하셨는데 자신의 추측이 해상도가 높다며 자랑하시는 품이 아마도 맥루언을 부지불식간에 체감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텍스트나 회화에서는 저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기승전결로 연출하는 과정에서 엑스트라를 축약하고 삭제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맥루언 식의 해상도를 떨어뜨리는 측면이 있다. 사진은 상대적으로 해상도가 높아 관객이 주관적으로 취할 선택지가 많다. ● 중심이 되는 피사체를 제거하는 듯이 보이는 안종현의 방법론은 신유물론적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의 관념세계를 추상적인 문자언어로 그리고 이미지라는 재현체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무의식에 '좀 더 가까운' 정동이라는 체험세계의 영역, 유물론적인 영역으로 다가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관념보다 인간의 무의식에 가까운 정동을 소통하겠다는 의지는 실재에 '좀 더 가까이' 다가 감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실재는 인본주의가 성취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약이다. 하지만 한 개의 동전에는 언제나 양면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는 주인공이 명료한 소통 대신 실재에 '더 가까이 가기'위해 주인공을 죽이고 해상도 높은 정황을 제시한다. 한편, 작가의 정동을 알 수 없는 관객은 주어진 해상도 높은 정황을 발판으로 자신의 주관에 기대어 취사 선택한 실마리를 활용해 상상해야 하니 당신으로부터 (관객의) 거리는 '좀 더 먼' 곳에 위치하게 될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 신현진
* 각주 1) 안종현, 「멀리 가까이 중간_DMZ- #01」ultrachrome archival pigment print 280×370 2020 2)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갈무리: 2011), p.55. 3)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 (그린비: 2020), p. 133.
Vol.20200806a | 안종현展 / ANJONGHYUN / 安鍾現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