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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729_수요일_06:00pm
후원 / 갤러리175_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연구소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3 2층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정주원은 작가의 시간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 시간을 그린다. 작가에게, 그 존재에 대한 '축하'가 허락되는 것은 전시가 열리는 아주 잠시 동안이다. 전시가 종료된 후 일상으로 돌아온 작가를 세상은 직업도 능력도 없는 무(無)의 존재로 바라본다. '작가의 시간'은 스스로 존재가 출생하는 시간과 사그러짐을 감내하는 시간, 생과 몰 두 종류의 시간을 동등하게 가리킨다. 어쩌면 '작가'란 축하 받는 존재와 쓸모 없는 존재 사이를 처절히도 그러나 기쁘게도 오가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정주원은 그 시선의 간극을 무시하지 않고 되려 그 간극을 오가는 과정을 작업으로 꺼내어 버린다. 별과 유령으로. ● 그러니 정주원을 작가로서 언급함은, 그가 이전 전시로부터 어떻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고 다시 이번 전시에 의하여 어떤 식으로 작가가 되는지에 대한 과정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작가의 "살갗에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흩트리고 뭉치며 서사를 이어간다. 작가는 작업 속에서 늘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전시 이전의 작가는 늘 주변과 함께 버티며 살아간다. 그 여정에서 돌출된 말이 "엄마, 미술해서 미안해"였다. 지난 개인전 제목은 그렇게 정해졌다. 작가는 창작활동이 '성실한 노동'임을 입증하기 위해 하루에 한 개씩 10호 크기의 작업을 매일 완성했고(「탈-불안 릴레이」), 성실함에 부합하는 '금전적 성과'를 이루고자 작품을 판매하고 수익의 절반은 엄마에게 전달했다(「가계에 보탬이 되는 드로잉」). 그러나 전시 이후의 작가 아닌 정주원은 기계적인 성실함과 판매수익의 한계를 깨닫고 만다. 이제 작가는 변화한다. 지난 전시와 이번 전시 사이에서 백토였던 것은 유화로, 상상 속 풍경은 일상의 풍경으로 치환됐다. 작가는 이제 엄마와 선을 긋는다. 선명한 상황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파도가 모래를 가져갈 때 자갈은 몇 번 비명을 지르며 구르지만 이내 다시 정갈해진다. 인정받으려 애쓴 상황을 지우고 나니 지난 개인전 그림에서 유령과 별이 남았다. ● 정주원에게 있어 별은 그가 작업을 하거나 전시를 진행할 때 머무는 작가의 층위를 의미한다. 작업과 전시의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 빛을 내거나, 빛을 반사하는 별로서 존재한다. 작가는 별처럼 작업과 전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곧 그가 작업과 전시 없이는 외부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에게는 재직증명서도, 월급명세서도 그리고 명함조차 없는 까닭이다. 전시 이후 작가는 그 어떤 것도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 머물며 그는 소등의 시간을 맞는다. 즉 그 소등의 시간, 홀로 빛이 배제된 시간에 머무는 동안 작가는 유령으로 존재한다. 이 유령은 빛을 두려워하나 다시 빛을 그리워하고, 동경해 빛을 좇는다.
「달밤」은 ⟪Starry, starry ghost⟫의 본질을 집약하고 있다. 별의 시간과 유령의 시간은 서로를 배리하지 않는다. 별은 빛을 발하면서 발화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을 잃어가며 유령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령은 빛을 투과시키고 침잠하며 침묵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을 향해 별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각각의 작업은 그 사이들, 작가와 작가 이전・이후를 오가는 작가의 존재 형식을 다룬다. 별은 유령으로 움직이고, 유령은 별로 움직인다. 「달밤」은 이 둘 사이 생성의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유령은 다른 작업과 다르게 형태를 명료하게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유령이 별로 응고하고 있거나, 별이 유령으로 승화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별이 만들어낸 밤은 유령이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고, 유령이 나타날 밤은 별이 비로소 보일 수 있는 순간이다. 별과 유령은 서로의 근거인 셈이다. 여기서 이 전시의 주체가 집약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별로서 내내 존재하는 것이거나 유령이 되는 시간을 영영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작가의 존재 형식은 별과 유령을 오가는 찬란함과 참담함을 동시에 또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태도에 있다.
따라서 다른 작업에 나타나는 별과 유령을 우리는 고정되어 완성된 상태나 전락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을 그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이상과 소망을 떠올리는 순간을 표현한 「고스트 인 더 미러」 연작은 미술계를 떠나는 작가 유령(「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으로 가는 길이며, 불안감을 감추려는 듯 하얀 이불보를 뒤집어쓴 작고 귀여운 유령의 형상(「어쩌다 마주친 유령」)은 먼 발치에서 아름답게 빛나며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스타 유령(「별의 유령」)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믿어보자. 엄마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 전했던 의문스럽고 수상한 시절을 지나 정주원이 도착해 있다. 불씨만큼 타오르는 물음을 탐문하며 정주원은 일찍이 그의 내면에서 사춘기를 제대로 겪었을 테다. 작업을 하는 삶이 세상을 향한 회신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 지난한 과정에 침잠 할수록 애닳고 들끓는 내면을 창작이 받아내지 못하는 날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 승천과 전락을 모두 감내하며 이를 오가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별처럼 머나먼 자리에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희망일까. 유령처럼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다는 불안일까. 소망과 현실, 존재와 부재, 인정과 무시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주원은 유령이 되어 별을 통과하고, 별이 되어 유령을 통과한다. 작가는 별과 유령, 두 대상 사이에서 진동하며 자리를 종신형처럼 옮겨 간다. 그렇기에 정주원의 작고 귀여운 유령은 오래 이곳에 머물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미약한 유령을, 찬란한 별을 아주 오래도록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기뻐질 것이다. ● 삶에 어둠이 찾아올 때면 우리는 별이나 유령을 본다. 태양 아래서 존재들은 쉬이 별과 유령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속상해 하지 말자. 햇볕이 뜨겁게 비추는 날에도 별의 유령과 유령의 별은 여전함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작업으로 우리의 곁에 머물고 있을 테니 말이다. 유령을 느끼기 어려운 날에는 별이라도 소원하며 살자,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이라면 유령이라도 품어보며 살자. Starry, Starry ghost. 전시는 별이 반짝이며 빛나는 밤에 공존하는 유령에 관한 이야기. 혹은 빛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던 별이 된 유령, 유령이 된 별에 관한 이야기. ■ 정희영
Vol.20200729c | 정주원展 / JEONGJUWON / 鄭朱原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