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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617_수요일_04:00pm
갤러리 제이콥 1212 GALLERY JACOB 1212 서울 종로구 북촌로 25 @gallery_jacob1212
먹의 黑이 오만色으로. 밸런스와 진보 ●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강열한 불과 마주하게 된다. 화마가 휩쓸고 가는 전시장에서는 한국화의 소박함이나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초가산간을 다 태우는 불의 기세는 보는 이를 흥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한다. 시선을 압도하는 기세는 단순히 파격을 유도함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오행 중 하나가 너무 강하면 화가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맞추어 색을 써서 조화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작품 속 타오르는 적(赤) 곁에 재가 되어버린 흑(黑)을 배치, 불의 기운을 눌러 주어 상생의 조화가 존재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방색에 내재된 순환개념에 따랐는지 그저 전하고자 하는 스토리텔링의 효과적 발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양화가 아닌 한국 사람의 '한국화'로서 우리의 정신과 철학, 문화가 시대를 넘어 반작용이 아닌 확장으로서 원용을 찾아 꺼내는 힘을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자각과 진보의 작업들은 현대회화로서 충분한 장르의 한 축을 만들었다. 이동환 작가 집안은 대대로 화가를 배출한 가문으로 작가는 태생적으로 한국화에 풍요로운 토양을 가지고 있다. 예술적 배경이 득이 될 수도 있으나 역으로 한국화의 정통성이 족쇄를 부여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에 대해 어릴 때부터 화선지를 펴고 산수화를 그리는 모습이 일상처럼 익숙하게 인지되었으나 자신의 화풍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롭다 하며 현대미술로서 화선지와 안료를 대면할 수 있는 사유(事由)에 대해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인용하였다. "두 개의 밸런스를 가져야 한다. 채색화가 있다면 사군자도 존재해야한다. 먹의 黑이 오만色으로 번져야 한다." 작가는 전통의 한국화의 기법과 재료를 활용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향한 발언을 담는다. 불혹을 넘어서면 지나치게 미학에 치우치기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는 작가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탐색하며 한 가지 관심사에 시리즈를 창출하되 반복하지 않는다. ● "물 위에서 들 수 있는 최대한의 무거운 돌멩이를 보듬고 있다가 발 앞에 던진다. 한 발을 내딛고 다시 돌을 준비한다. 그렇게 하나씩 발 앞에 돌을 던져서 징검다리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동환)
화염에 투영되는 희망 ● 검게 그을리고 여전히 타고 있는 집의 전경을 멀리서 보면 쓰러진 서까래. 멀리 네모난 창문 등 배치와 조합이 나라 국(國)의 획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암시하는 화재의 현장에서 유일한 인물인 팔이 없는 아이는 무기력한 민(民)을 대변해주고 있다. 잔혹할 만한 불에서 고려 불화를 비롯하여 경전에 기록된 지옥의 그림 '지장도' '시왕도' '감로탱'이 연상이 된다. 고려시대에 '불화'와 '민중'은 원나라의 침탈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목적성에 의해 중요 키워드였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보호하고, 위로하는 일면은 생생한 시각효과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교훈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이동환 작가의 작품의 숨겨진 목적과도 상통한다고 사료된다, 작금의 뉴스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집단이기주의와 부조리가 얼마나 팽배한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가치관이 그릇되고 윤리와 도덕적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현 사회의 비극적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정원」 비롯하여 무수히 지옥도가 제작되는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지옥이 필요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너무나 부조리해서 힘없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곳에 벌어진 불의 심판은 징벌을 넘어 극한의 나락으로 향하기 전 깨달음이 되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시무시한 화재의 현상학적 접근과 달리 잠재적 해석에는 번영과 번성이 존재한다. 프로이드나 융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집이 불타는 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길몽 중에 대표적인 꿈이다. 그것은 화전민들처럼 불로 밭을 일구고 새로운 터전을 만든다는 현생의 욕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칫 음산하고 불길한 현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실은 기복적인 메시지로서 화마(火魔)가 복전(福田)이 되어 새롭고 정의로운 나라(國)가 시작되길 앙망한다는 바람의 발로일 수 있는 것이다.
해학의 편린(片鱗)을 엿보다. ● "니 그림 줄까 무섭다." (2005년 개인전에서 이동환 작가의 누나) 작가가 위의 멘트를 가족에게 또는 동료, 후배에게 들었을 때 관객을 의식하지도 콜렉터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던 자신의 길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한다. 비기교성, 무가식성, 순수한 비판과 미적 생명력을 가진 1995년 개인전 '흙가슴'으로부터 2019년 목판화 개인전 '가슴에 품은 돌베개'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은 대체로 무겁고, 진중하며 때론 암울하기까지 하다. 되짚어 보자면 그는 IMF때 쏟아져 나온 노숙자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연민을 느꼈고 이를 감추어진 풍경, 뒤안길과 같은 관념적 풍격으로 묘사하였다. 이후 동료작가들과 대화주제였던 영화 시네마스코프가 가진 시간성, 공간속 움직임을 평면 회화에 펼치고자 하였으며 피에로처럼 웃는 모습의 양의 실체를 사회와 빗대어 '병적인 웃음' 시리즈로 보여주었다, 4대강 개발 시점에는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예술가로서 자연이 훼손될 때 작품으로 목소리를 내었으며 세계가 아비규환에 빠졌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심경을 '삼계화택'에서 실었다. 상실의 시대에 작품은 오래 기록되고 남겨질 것이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그의 자세가 만들어낸 일련의 서사들이다. 그가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은 늘 새롭게, 끝없이 옮겨갔으나 그 내면의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담화구조와 형식의 우월성은 변한 적이 없다. 다분히 황량하고 몽환적인 그림 안에 편린(片鱗)한 해악의 요소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그의 메인 주제를 떠나 소개된 작품에는 유쾌한 그의 감상을 엿볼 수 있다. "가끔 받는 선물처럼 재미난 해학의 그림이 하나씩 나온다. 나의 그림은 항상 우울하지는 않다." 언행일치를 하고자 하는 작가는 그림에 보이는 열정적 풍자의 에너지로 살고자 한다, 더불어 해학적인 삶을 수반하여 흑에서 색으로 번져나가듯 생의 의미와 쾌활한 정신구조 사이 밸런스 있는 삶을 추구한다. ■ 김하림
Vol.20200617f | 이동환展 / LEEDONGHWAN / 李東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