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구조

리자(이정자)展 / LEEJA(LEEJOUNGJA) / 李貞子 / painting   2020_0605 ▶ 2020_0628 / 월요일 휴관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130×194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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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605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www.facebook.com/INDIPRESS

회화, 그 경계 너머의 잔여에 관하여 ● 이정자 작가의 작품이 나에게 주는 감동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답을 구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인물 드로잉 앞에서도, 진달래와 매화 그림 앞에서도 그저 전해지는 아름다움에 나를 맡기고 싶을 뿐이었다. 많은 그림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만, 이정자의 그림은 더욱 그러한 편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그 정서와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그것은 이미 나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림은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능동적으로 '나는 이정자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라고 물으며 서두의 질문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 분명 '사람'과 '꽃'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무엇을 보는가?'라고 묻다니... 작가의 지향이 단지 소재의 재현에 있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감천마을 풍경도 마찬가지다. 감천마을은 한국전쟁 이래,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오늘에 이른다. 오랫동안 달동네로 불리던 그곳은 근래에 들어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정자의 그림은 이 장소를 규정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리얼리티나 드라마에 무심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감천마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는가? ● 나는 거기서 이정자라는 화가가 어떻게 세계와 만나고 있는지를 본다. 내가 보는 그림은 실제 세계와 화가의 눈에 비친 세계가 만나 만든 혼합물이다. 결국, 내가 이정자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화가와 세계의 관계를 보는 것과 같다. 그 둘이 어떤 식으로 만나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만남의 양상은 화가마다 다르다. 이정자는 어떤가?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91×91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91×91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91×91cm_2020

이정자의 일관되고 기본적인 방법은 세계를 성실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시선은 세계를 조망하면서 인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 이런 시선은 화가가 세계를 자신과 구별하면서 그 앞에 주체로 나서는 것이다. 반면에 이정자의 시선은 오히려 주체의 자리를 무화(無化)하면서 세계 속으로 스며드는 시선이다. 이정자의 화면은 화가와 세계가 경계를 잃고 하나가 되려고 하는 지향으로 충만하다. 달빛 아래 은은하게 피었거나, 바람에 흩날리며 흐드러지거나, 오직 한 송이로 피어나거나 이정자의 매화그림에서는 꽃과 화가의 감각이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꽃잎 하나하나, 터치 하나하나가 꽃이기도 하고 화가 자신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사실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 감천마을 풍경도 다르지 않다. 감천마을은 지형적 한계 속에서 집들이 이리저리 공간을 주고받으며 오밀조밀 얽혀있다. 이 복잡성과 다양성에 푸른색 지붕과 파스텔색 집이라는 획일적인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이곳 특유의 시각적 풍경이 발산된다. 여기서도 작가는 '감천마을'이라는 소재의 재현에는 관심이 적다. 가난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소박한 삶 속에 깃든 인간적임 같은, 이러한 소재의 그림들이 다룰 만한 감상적인 이야기에도 무심한 편이다. 작가는 마을 풍경이 발산하는 빛, 색, 선, 형태, 운동, 공간, 질감 같은 것들과 긴밀히 교감하는 데에 몰두해 있다. 그림은 화가와 세계가 사유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감각적 소여(所與)를 주고받는 가운데 생겨나는 진동으로 가득하다. ● 특히 이 감천마을 그림에서 작가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분채'라는 재료는 화가와 세계의 감각적 교감을 더욱 호소력있게 하는 데에 유용해 보인다. 가루 상태의 이 안료는 물에 녹지 않고 끝까지 미립자로 남는다. 그래서 아교나 본드 같은 접착제에 섞어서 사용해야 하지만 강한 도포력을 얻거나 두께감을 주는 데에 효과적이다. 작가는 이러한 분채를 이용해서 감천마을 특유의 매트(mat)한 파스텔색과 시멘트벽의 거친 질감을 적절히 얻어내고 있다. 질감을 느끼는 촉각은 시각에 비해 훨씬 주객혼융적인 감각이다. 뭔가를 만지는 것은 동시에 그 뭔가로부터 만져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촉각적 표현은 화가와 세계가 훨씬 밀접해 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촉각적 호소는 이정자의 전체 작업을 특징짓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130×162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116×91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91×116cm_2020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이정자의 작업에 있어 화가와 세계의 만남은 감각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사유를 최대한 배제한 채... 이정자의 작업이 이성이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그림에 이입된 작가의 호흡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이정자의 그림은 작가의 호흡을 가시화해준다. 호흡은 그 중요성에 비하면 무척 단순한 활동이다. 들숨과 날숨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그래서 호흡은 자각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쉽다. 그러나 호흡은 몸의 상황을 그 무엇보다 섬세하고 민감하게 반영하며 변화한다. 예를 들어 이정자의 매화그림은 들숨에 있다. 꽃과 작가의 관계는 들숨에서 절정에 이른다. 내면으로 들이쉰 숨이 그 지고의 순간에 멈췄다. 숨이 멎을 듯 강렬하다. ● 반면에 감천마을 풍경은 날숨에 있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감천마을을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 탄성을 밖으로 내뱉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 속에 감천마을이 화가의 날숨과 함께 시원하게 펼쳐진다. 휘돌아가거나, 은근히 흐르거나, 표면을 훑으며 천천히 스치며 내려앉거나, 아래로 쑥 빠져나가거나, 감천마을을 담은 그림에는 언제나 숨결이 지나가는 숨길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뱉어진 날숨이 바로 감천마을이 발산하는 감각적 소여들에 대한 작가의 감응인 것이다. 매화그림에서 꽃의 감각이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왔다면, 여기서 작가는 자신을 풍경에 그대로 내어준다. 작가의 눈과 손은 마을 풍경이 드러내는 형태감과 구조에 긴밀히 반응하고 있다. 호흡은 꽃과 인물을 다룬 이전의 그림과 마을풍경을 다룬 지금의 그림에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그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매개다.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72×60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72×60cm_2020
이정자_캔버스에 분채, 혼합재료_72×53cm_2020

이처럼 화가는 자기가 보는 것에 따라 몸을 바꾸고 호흡도 바꾼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그러한 변화를 관람자에게 전이시킨다. 감동이 몸을 바꾸는 것이다. 그림은 단순히 어떤 정신적인 것만을 통해 마음이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의 감각, 즉 몸을 물리적으로 자극한다. 감천마을 풍경에 흐르는 숨결이 매화그림에서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챈다면 화가의 시선이 몸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되리라. ● 이제 다시 묻는다. '나는 이정자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화가와 세계가 감각적으로 상호 스며들면서 하나가 되려는 지향, 그리고 그것에 몸의 기운을 불어넣는 숨결을 본다. 이런 것들은 개념적 언어나 논리적 사유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감각적인 것은 언제나 개념과 언어가 다 담을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 그런데 언어와 개념의 경계 너머에 있는 이 세계는 일상에 오염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다. 언제나 존재하지만 내가 보려 하지 않는 세계다. 마치 우리가 이정자의 그림에서 매화와 진달래와 감천마을만을 인식할 때, 그곳에 산재한 감각과 그곳에 흐르고 있는 숨결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회화의 세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태, 바로 그것이 회화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이정자의 그림이 나에게 주는 감동은 그러한 회화적 세계가 열어주는 자유로움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언어와 논리,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으로 채워진 세계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이러한 것들을 들어내 보이고 체험하게 하는 이정자의 그림은 결국, '회화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회화다. 회화에 관한 지순(至純)한 이야기다. 작가의 회화에 대한 순애보 때문이기도 하고, 작가의 작업이 순수하게 회화로 회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김소라

Vol.20200605g | 리자(이정자)展 / LEEJA(LEEJOUNGJA) / 李貞子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