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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성인 3,000원 단체 20명 이상 20% 할인 학생(대학생 포함), 7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 3급 이상 무료입장 두레유 식사시 무료입장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97번지) Tel. +82.(0)2.720.1020 www.ganaart.com
끊임없이 자생하는 마리킴, 새로운 시도로 국내에서 4년만에 개인전 개최 ● 가나아트 갤러리는 커다란눈을가진소녀이미지를'아이돌'(Eyedoll)이라 명명하고 다양하게 확장해 나가는 마리킴 개인전을 개최한다. 마리킴은 호주 멜버른 공대에서 멀티미디어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여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는컴퓨터에의해가공된이미지가갖는무한한복제와자유로운변형이가능하다는점에의의를두고, 작가 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다각도로 탐구하여 재생산한다. 그런 그녀가 국내에서 4년만에 열리는 본 전시를 위해 일률적으로 선보이던 '아이돌'(Eyedoll) 캐릭터를 세계적인 명화와 불화에 오마주(Hommage) 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대중에게 선보인다.
예술과 현대 기술의 조우, 끊임없이 시도하는 그녀의 태도 ● 마리킴의 작업은 컴퓨터 기술에 의해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존재하는 회화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 마리킴은 그녀의 '아이돌' 캐릭터에 화장과 옷을 갈아 입히는 과정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그동안디지털이미지를그대로프린트한작품을선보여왔다면, 근래에는 프린트된 화면(畵面) 위에 회화 기법을 덧입혀 예술과 현대기술의 사이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응한다. 이번 전시는 특히, 명화의 기법에 집중하여 오리지널리티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마리킴의 미학을 명화에 오마주(Hommage)하여 재구성 ● 본 전시는 두 가지의 테마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2019년 LA에서 처음 발표한 'Masterpiece'시리즈의 연장선으로, 이미 예술성을 획득한 세계적인 명화에 작가만의 미(美)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선보인다. 명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아름다움의 정전(Canon)으로 사용되며, 이를 작가만의 미학으로 재구성한다. 이전에는 사실적인 묘사 없이 제한된 배경으로 캐릭터에만 집중했다면, 이번 작업은 산드로 보티첼리b.1445-1510의'이상적 여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b.1452-1519의'흰 단비를 안은 여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b.1841-1919의'물 뿌리개를 든 소녀' 등 15여점의 유명한 서양 명화를 전체적으로 오마주하였다. 그녀는이번시도를통해'아이돌' 캐릭터가 지닌 고유의 분위기를 명화에 그대로 녹여냈다. 즉, 원작에 내재하고 있는 아우라(Aura)에 마리킴의 상상력과 현대기술의 융합하여 새롭게 탄생되었다.
불교 예술의 백미(白眉)인 고려 불화에 오마주하여, 국내 명화를 재조명 ● 두 번째 테마는 이번 전시를 위해 그녀가 본격적으로 시도한 고려 불화를 오마주 한 작업방식이 주목된다. 그녀가불화를선택한이유는앞서선보인서양명화오마주작업을국내명화에대입하고자찾던중고려불화는명품중에명품임에도불구하고현재국내에서는보기어럽다는점에서재조명하고자몰입하였다. 앞서 서양의 초상화와는 달리 불화는 실제가 아닌 상상의 세계를 시각화 한 불교 이념의 상징화이다. 불교 이념에 따르면 보살을 통해 구제된 중생이 다시 환생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하는데, 끊임없이 여러 모습으로 변용하고 영역의 범위를 넓힌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 방식과 그의 '아이돌' 캐릭터가 닮아 있다. 특히 오마주한작품들중에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광배 속에 서있는 「수월관음도」를 오마주한 작품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현재 일본 도교 센소지(浅草寺)에서 소장하고 있어, 국내에서는 보기 쉽지 않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 작품을 통해 선보이게 되었다. 숭고하고 심오한 불교의 교리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고려 불화에 그녀의 미학을 더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아이돌'(Eyedoll) 캐릭터의 변용 범위 확장에 대한 기대 ● 이처럼 본 전시는 2019년 LA에서 발표한 서양의 명화를 오마주한 작업에서 더 나아가 동양의 불화를 오마주한 신작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집중할 만하다. 작가는보편적인아름다움에대한고유의질문과현대기술복제에의해제기되는'예술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이번 전시를 통해 답하고자 했다. 따라서 본 전시는 여러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거침없이 시도하는 그녀가 명화라는 매개체로 더 발전한 범위 확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얼굴과 자아, 그리고 우주론 : 마리킴의 정직한 미학 ● 얼굴은 신체에 속하지 않는다. 얼굴은 순수한 의미론의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얼굴은 머리도 아니고 이목구비도 아닌, 이미지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인식할 때, 비로소 얼굴은 나타난다. 타인이든 자신이든, '인식'(reconnaissance)은 다시(re-) 알아챈다는 뜻이다. 얼굴은 다시 알아채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하나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얼굴은 이미 규범적 가치 판단을 전제한다. 규범에 어긋나면 부적절한 얼굴이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곧 판단을 좌우하는 도덕의 잣대인 셈이다. ● 마리킴의 연작들은 이런 얼굴의 속성에 대한 작업이다. 일관되게 그는 하나의 '얼굴'을 고집해왔고, 이번 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익히 '명화'로 알려진 작품들을 변형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명화'는 무엇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의 정전(canon)으로 정립된 작품이다. 여기에서 정전이라는 뜻은 다른 작품의 기준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정전은 규범이다. 특정한 인식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 마리킴의 작품에 등장하는 얼굴은 "예쁜 얼굴"이다. 그러나 이 "예쁨"은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같은 것은 아니다. 마리킴의 미학을 구성하는 요소가 바로 "예쁨"이고, 이 개념은 규범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다. 마리킴 고유의 "예쁨"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카와이"(kawaii)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카와이"는 대상을 탈소유화시키는 개념이다. 타키에 레브라(Takie Lebra)의 규정에 따르면, "카와이"는 대상화라기보다 자기의 투사(projection)이다. 자기의 투사는 다름 아닌 지극한 즐거움(enjoyment)의 실행이다. "카와이"가 나르시시즘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이 즐거움의 조건이 바로 비대칭(asymmetry)의 관계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 비대칭의 관계는 불균등(inequal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균질(heterogeneity)을 암시한다. 불균질한 교환이 바로 상징 교환의 특징이다. 교환 가치는 이 불균등성으로 인해 사용 가치로 변신한다. 이 착시효과를 마르크스는 상품의 페티시즘이라고 명명했지만, 이 페티시즘이야말로 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교환 가치를 사용 가치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미학의 전도가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마리킴의 작업들은 일관되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나의 평가이다. 이번 전시의 성격도 이 일관성의 연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작업은 항상 얼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이 얼굴은 특정 대상의 얼굴을 묘사하거나 재현하고 있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얼굴은 현실과 비대칭의 관계를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얼굴은 특정한 인격의 표현이라기보다, 얼굴성(faciality)의 구조를 보여준다. "명화"에 덧입혀진 "카와이"한 얼굴은 해당 작품을 "명화"로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본래성을 해체해서 그 조건을 드러낸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명화"를 "명화"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본래성 자체가 아니라, 그 본래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우라(aura)이다. 이 아우라야말로 개별 예술작품에게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선험성이다. ● 마리킴의 작업은 이 선험성에 대한 실험이다. 그는 기존의 초상에서 얼굴을 지우지 않고 다른 얼굴을 덧입힌다. 그의 작업은 반복의 제스처이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반복한다. 그 다른 것은 "카와이," 마리킴의 용어를 빌리자면, "예쁨"의 효과로 인해 발생한다. 기존의 "명화"와 마리킴의 작품 사이에 만들어지는 비대칭의 관계가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모든 정전은 마리킴의 작업을 통해 "예쁜 이미지"로 거듭 난다. 반복이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 특히 이번 전시에서 돋보이는 것은 불교 탱화를 오브제로 사용한 작업들이다. 탱화는 서양의 초상화와 달리, 개별 인격의 표현이라기보다 불교라는 이념의 상징화이다. 실제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마리킴의 작품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수월관음도」를 변주한 작품은 불화와 팝아트의 의미론적 친연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관음은 성차의 구분을 넘어서 있는 보살의 존재이다. 보살의 윤리학은 중생, 곧 대중의 구제에 있다. 중생에게 열려 있다는 뜻은 무한한 변용을 허락한다는 의미이다. 다양체의 발현이 곧 보살의 존재론이다. 마리킴의 "물방울 관음"은 이런 보살의 존재론에 대한 응답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와이"는 보살의 미덕이기도 했다. 이 해학을 현대의 언어로 바꾼 것이 마리킴의 작업이라고 본다.
마리킴의 탱화 작업은 자아와 우주론(cosmology)의 관계에 대한 인류학의 탐구를 떠올리게 한다. 얼굴이란 것이 자아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마리킴의 탱화는 자아를 떠받치는 무의식의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우주론의 문제를 제기한다. 본질적으로 종교는 우주론의 상징화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리킴의 탱화 작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을 불교와 연관 짓는 것은 일면적인 이해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지는 일단 만들어지는 순간, 기원을 은폐하고 자율성을 획득한다. 마리킴가 반복한 이미지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 읽힐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불교 탱화의 외형을 빌리긴 했지만, 마리킴은 그 외형에 자신의 '얼굴'을 덧씌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얼굴은 곧 '얼룩'이기도 하다. ●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리킴의 반복은 원작에 묻은 '얼룩'일 수 있겠지만,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얼룩'은 독자적인 얼굴이다. 얼굴을 획득함으로써 불교의 탱화는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탱화는 실질적으로 부처의 보살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여럿이지만 동시에 하나인 만트라의 세계가 곧 탱화의 이미지이다. 그 역시 하나이자 여럿인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마리킴의 작업 또한 이런 탱화의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지는 생산되는 순간, 또 다른 기표로 바뀐다. 이 기표는 기원을 벗어나서 본래성을 만들어낸다. 기원과 본래성은 이런 의미에서 다르다. 마리킴의 작업은 이런 기원과 본래성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균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쁜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직한 그림이다. ● 불교의 탱화를 다른 기표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마리킴의 작업은 탱화의 의미를 전복한다. 이 전복은 불교와 탱화의 자리를 뒤바꾸어 버리는 전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탱화는 불교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마리킴의 "물방울 관음"이 역으로 하나이자 여럿인 불교의 이미지를 불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탱화가 불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마리킴의 "물방울 관음"은 한 지점에 머물지 않는다. 이 관음은 얼굴이자 캐릭터이다. 몸을 배경으로 빌린 이 얼굴은 얽매이지 않고 흘러넘친다. 캐릭터가 되는 순간, 관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무한한 개방이 마리킴의 미학이다. 이 얼굴은 "예쁨"이라는 자아를 구성하지만, 그 표면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자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 이런 의미에서 "예쁨"이라는 자아를 구성하는 무의식은 재현되지 않는다. 그 재현의 차원을 화폭 너머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킴의 작업은 현대 문화의 증상을 정직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의 작업은 규범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역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고 마리킴이 존재하는 규범의 굴레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가 기존의 "명화"에 자신의 얼굴을 덧붙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마리킴은 정직한 작가이다. ■ 이택광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 이번 전시의 모든 작품들은 세계 명화들을 오마주(Hommage) 하고 있다. 전시를 둘러 보다보면 혹자들은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라는 피카소의 말이 떠오를 만하다. 그의 말로 굳이 따지자면 원작을 모방했다고 하기에는 이미지의 차용과 기법을 원작과 최대한 비슷하게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에 훔친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정도에서 의문이 생긴다. 작가 마리킴이, 내가 훔친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물리적인 작품, 즉 예술 작품을 훔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루팡 정도의 대도는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근원이 되는 것은 예술, 예술가,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예술 작품을 훔치지 않았고 예술가는 훔칠 수도 없으니 여기서 내가 훔친 것은 예술이라고 봐야 하겠다. ● 하지만 훔쳐진 것이 예술이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의 '이상적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woman'을 오마주한 작품을 들여다보자. 여기에서 나는 보티첼리의 '예술'을 훔쳤다고 봐야 맞는데 여기서 보티첼리의 예술 즉 예술 행위는 실존했을 그림의 주인공 여자를 형상화하여 캔버스 속에 그려 넣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 예술 행위는 보티첼리가 수백년 전에 그린 그림의 이미지를 구글에서 참고하여 내 작품 특유의 얼굴을 그려 넣어 재생산한 것이다. 나는 이 두가지가 전혀 다른 예술, 예술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보티첼리의 '예술'을 훔친것은 아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이번 한국 전시에서 오마주 할 작품들을 리서치하면서 일부 한국의 명화들을 재연하려 하였는데 쉽지가 않았다. 예술이 꽃피었던 고려시대의 불화들이 대부분 도난당하거나 해외로 팔려나가 있고 훼손상태가 심해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던 점 때문이다. 보티첼리의 그림 이미지와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림들을 참조하고 재현하였고 결국 작품들로 완성하였다. 경로는 다르지만 비슷한 방법으로 작품들이 생산된 셈이다. 이 과정을 통해 본다면 도난당하거나 훼손된 작품들을 재현하여 고국에 전시하려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술을 훔친것의 반대 의미로 해석 될수 있지 않을까? ● 기술 복제 시대와 신디셔먼이나 바바라 크루거로 대표되는 구성사진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거쳐오며 '회화는 죽었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회화를 되살렸다고 말하고 싶다. 미술관에서만 볼수 있었던 오래 전 죽은 예술가들의 명작들을 이 시대의 기술과 상상력으로 현생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물론 내 작품들과 원작과의 관계가 무관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작가 마리킴은 오마주한 작품들의 이미지와 아우라에 대한 빚을 졌고, 빚을 진 결과는 작품들에 투사되었다. 나는 관객들이 작품에 내재된 원작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을 즐겁게 바라봐 주고 이러한 시도가 전형적인 팝아트 사조를 이어나간다기보다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예술 작품을 시도하려는 노력으로 해석해 주기를 바란다. ■ 마리킴
Vol.20200506g | 마리킴展 / MARI KIM / printing.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