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예술공간 봄 ART SPACE BOM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76-1 Tel. +82.(0)31.246.4519 www.artspacebom.com
리바이어던 그 바다괴물의 귀환 ● 바다에 사는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불렸던 모비딕(백경)은 백색의 거대한 고래로 수많은 포경선을 침몰시킨 고래들의 수호자이며, 반대로 고래잡이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은 적이다. 그의 몸에는 그 동안 고래잡이들이 던진 작살과 그로 인한 흉터가 가득하지만 아직 까지 그 누구도 모비 딕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본문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인간이 자연을 공포와 숭고의 대상으로 여겼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보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 더 없이 거대하고 망망하며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세계인 바다를 상징하는 모비딕은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저서에서 국가이전의 상태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라는 무질서를 상징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를 제어하고 제거해 나가면서 계약이나 합의로 만들어지는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으로서 대립적이면서도 이중적인 아이러니한 형상으로 등장한다. ● 그래서 모비딕은 그저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고래" 라고 규정지을 수 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으로서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커다란 잠재성,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때때로 예측 불가능하게 닥쳐오는 사건이나 통제 불가능 한 힘은 재난으로 우리에게 닥쳐온다. 그렇다고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홉스는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주는 흉폭한 모비딕에게 그 야성적인 흉폭함과는 반대되는 질서와 도덕이라는 표상을 부여한다. 그러나 질서와 통제를 행사하는 국가 권력은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표방해도 야만성과 혼란을 지닌 바다고래를 길들이려는 인간들의 간교한 지혜와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영화[모비딕]에서 모비딕 사냥을 나선 에이허브와 피쿼드호 선원들의 항해 또한 바다의 예측 불가능한 힘을 따라잡으려는 인간들의 무모한 모험으로 묘사되지만 그 모험은 끝없이 계속된다. 여기에서 바다는 존재론적 장이다. 거대한 파도, 수많은 물결이 일어나고 사라져 들어가는 장이다. 존재자들은 자신의 개체성을 잃으며 그 존재의 바다 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침몰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비 딕의 가공할 힘을 따라가게 하고, 죽음의 공포마저 잊은 채 바다라는 존재론적 장을 향해 질주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책략’이라면, 그것은 이성의 책략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책략이라 할 것이다. ● 나는 이 신화속의 동물인 바다고래 리바이어던의 속성과 그를 통제하려는 포경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자본에 대한)과 한편으로는 결코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힘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한때 자연에 승리하여 인류가 거대한 자연의 힘에 굴복 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그 반대편의 인류의 힘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양쪽의 투쟁은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나온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은 결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잡히지 않는 잡힐 수 없는 자연의 본성일 수도 있는 모비딕 처럼 끊임없이 변용된 힘을 가지고 다시 살아온다. ●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사회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온다. 자연은 그저 한정된 자원만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
오래된 장소들의 사라짐에 대하여 ● 한때는 나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던 풍경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그 자리에는 커다란 건물들과 새로운 구조물들이 들어서면서 익숙했던 공간들은 점점 낯선 공간으로 대체되어간다. 오랬 동안 익숙했던 풍경들은 나 개인의 기억을 넘어 그곳에 정주했던 공동체의 일원들 에게도 많은 기억과 경험들을 공유하게 해 주었고 더 넓은 범주에서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과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냈고 때에 따라서 그곳은 의미 있는 역사적인 공간으로서도 자리매김 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익숙했던 풍경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지 그 장소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서 어떤 정서적인 상실감을 동반한다. ● 어린 시절 아버지가 멸치어장을 하셨던 남해의 어떤 섬에서 몇 년 동안을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곳은 정말로 극한의 고요함을 간직한 너무도 원시적인 풍광들이 펼쳐져 있던 곳이었다, 바로 집 앞에는 바다가 있었고 바다건너에는 또 다른 섬들이 이어져 있고 아주 외딴 곳이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봐도 참으로 적막한 곳이었다는 생 생각이 들었다. 밀물에 실려와 파도를 따라가지 못해 바위틈사이의 작은 물웅덩이에 갇힌 물고기들을 보며 바닷가를 놀이터삼아 놀았던 어린 시절을 아직도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이웃집들은 폐허로 남아있었고 그 앞에 커다란 송전탑이 들어서 있었고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한 거대한 토목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의 쓸쓸함과 상실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곳에서 지냈던 기억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자연속 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 때문인지 나는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지금도 조금만 공기가 나쁘거나 소음이 심한 곳에 가면 쉽게 지치고 힘들게 되는데 자연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나 스스로 너무 주변 환경에 예민해져서 주변이 변화되고 오염 되어가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을 비롯해 여러 곶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대규모의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며 동네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동네에 새로 들어선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파트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새로운 숲이 되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낯설고 황량해진 장소의 풍경들이 변화해 왔던 과정들과 시간들을 다시한번 상상 해본다. 아직 문명이 생겨나지 않았던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먼 과거속 시대의 원시적인 풍경들 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장소들은 어떤 변화들을 거쳐 지금 우리가 보는 곳으로 변화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지질학자들이 증명해 내는 어떤 지층의 변화나 하는 그런 종류의 궁금증을 넘어서 그곳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던 사람들과 식물들에 대한 것이다. 나의 작업은 그 오래된 시간속의 어떤 지점에 존재했던 동물들과 식물들 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작업 중에는 거의 지속적으로 동물 이미지들이 나타 난다. 그것은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남편이 야생동물 진료소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함께 일을 하면서 부상당해서 구조되어 오는 야생동물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그들이 생존할 곳이 없어진다면 결국은 우리도 살아가는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유기적 존재로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의미로서 동물들이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 같다. ● 한편으로 여러 종류의 생화학제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지금도 여전히 글로벌 자본으로 사세를 확장하면서 다양한 화학제초제와 그 제초제에 맞게 디자인된 유전자 조작한 종자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인간의 필요(자본의 축적)에 맞게 디자인 하려고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노력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날 자연이 얼마나 인간에 대항하는 힘의 균형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 지금도 지구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와 인간들에 의해서 야기되는 재난들은 자연과의 힘겨루기에서 결코 인간이 우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지금시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근대이전의 자연을 대하는 마음 이였던 공포심과 숭고함을 간직한마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본의 책략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자각과 함께 자연과의 공존의 길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의 진화를 거쳐 만들어온 인간고유의 유전형질을 보전하고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새로운 시작 ● 자연과 인간의 투쟁을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그래서 모비딕과 인간의 투쟁을 당연한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자연으로 부터의 재난이면서, 반대로 자연이 감당해 내기 어려운 인간에 의한 자연생태계의 재난이다. ● 지금 만약에라도 끝없는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서 고갈되고 무너져가는 자연생태계에 위협을 느끼고 자연에 대한 착취를 가끔씩 멈추면서 가는 시스템을 발동 시키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또 다른 어떤 시스템의 출현일 것 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그런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것은 마치 피쿼드호의 고래잡이 선원들이 모비딕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향유 기름을 포기하고 모비딕이 아닌 작은 고래들만을 잡으려고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로 나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 황의선
Vol.20200430a | 황의선展 / HWANGEUISUN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