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The 12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Exhibition - Open Studio   2020_0421 ▶ 2020_1206

김선행_발생정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40.5×40.5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김선행展 / 2020_0421 ▶ 2020_0425 김소라_김민성展 / 2020_1021 ▶ 2020_1025 김재홍_김상덕展 / 2020_1104 ▶ 2020_1108 김경호_이현정展 / 2020_1118 ▶ 2020_1122 이승희_서동진展 / 2020_1202 ▶ 2020_1206

주관 / 영천시_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 (교촌동 298-9번지) 1,2전시실 Tel. +82.(0)54.330.6062 www.yc.go.kr

김선행展 / 2020_0421 ▶ 2020_0425 낯선 차원에서 만나는 세계 ● 초록, 빨강, 파랑의 강렬한 색과 붓 자국 없이 매끈하고 깔끔한 화면, 섬뜩하기도 하고 불편한 사물과 사람의 형상은 감상자가 작품 앞에 머물도록 한다. 현실적 풍경 이미지를 닮았지만 차가운 공간은 시간의 흐름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작품을 그린 작가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작품의 장면은 생생하다. 김선행의 작품은 이처럼 단순한 상상의 묘사를 벗어나 비이성적이거나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소개할 수 있는 용어는 '초현실주의'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용어가 과연 김선행의 작품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무의식 세계를 그리는 작품을 초현실주의라 말하지만 김선행의 작품은 이 용어로 단순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작가가 작품 하나하나에 문학적 서사를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미완의 이야기로 전개되고는 있지만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신비로운 이야기는 시간을 멈추고 현실을 벗어나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한다. ● 이처럼, 김선행의 작품을 빛내는 서사구조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는 공간은 낯선 차원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그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공간의 표현은 몇 가지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 왔다. 먼저, 공허하고 삭막한 공간과 인체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미묘함에서부터 앙상한 뼈로 이루어진 생명체와 둥근 구를 통해서 작품의 공간 표현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영천에 와서 시작된 녹색 식물 연작(이것은 필자가 명명한 것이다.)에서 비로소 자신의 세계관이 더욱 확장되어 낯선 차원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즉 작품의 배경인 공간은 수학적이거나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낯선 차원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이것을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적막한 공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배경의 역할 아니라 낯선 차원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창이다. 이 창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녹색의 구조물과 생명체를 만나게 된다. 이 독특한 형상들은 식물의 생태적 관찰과 인간의 인공물인 파이프를 통해서 식물의 줄기와 뿌리와 파이프의 유기적 관계를 하나의 서사구조로 표현한 것이다. ● 이런 유기적 관계에 대한 관심은 이전에 시작했던 뼈, 생명체, 구가 등장하는 작품의 연작에서부터였다. 김선행은 생명체가 죽고 남기는 앙상한 뼈에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둥근 구를 이용하여 새로운 생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을 '뼈 생물'이라 명명하였다. '뼈 생물'은 자연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와 인공적인 구를 결합한 인위적인 사물인지 아니면 원래 자연에 존재했던 존재물인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자연과 인공, 물리적 공간과 물리적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공간 사이의 모호함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또한 생명을 품고 있는 알의 대표적인 형상인 구를 통해서 그녀는 죽음과 생명, 그리고 인공과 자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다시 한번 우리를 뒤흔든다. 무엇이 진정한 세계인가?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實在, reality)인가? ● 여기서 작가의 세계관이 확장되고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 가능함을 예견하게 한다. 하나의 서사는 또 다른 서사와 연결되고 그렇게 그물망처럼 연결된 서사는 커다란 세계관을 형성하여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채우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초현실적 이미지는 단순히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는 특이하고 흥미로운 형상들의 나열의 아니라 새로운 차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경험하지 못한 낯선 감성을 제시하는 것이자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저것을 조합하여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형상을 표현하는 그런 작품을 뛰어넘어, 김선행의 작업은 일정한 맥락에 따라 일관되게 연결되면서 자신의 세계관이 확장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서사로 펼쳐 나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은 미지의 세계를 여는 창이 될 것이다. ■ 서희주

김소라_왕평길 31_캔버스에 유채_65.1×53cm_2020

김소라_김민성展 / 2020_1021 ▶ 2020_1025 불안의 응시1. 김소라가 그리는 그림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불안에 대한 치유적 장소다. "나의 작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는 주변 환경들에 의해 발생하는 불안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유년시절 추억이 깃든 장소가 고층 아파트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느낀 소외감으로 어느 순간 낯선 풍경과 자신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감에서 발생하는 불안감이다. 이러한 분리 불안과 소외를 치유하기 위한 작가적 시선은 활력이 사라진 방치된 공간, 누구도 찾지 않는 발길이 끊긴 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다. 그 흔적 너머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 방치되어 버려진 곳의 존재감의 회복을 위해서 '소외된 풍경'을 두툼한 붓질로 묵직하게 기록한다. '불안은 방출되지 못한 자극들이 축적됨으로써 무기력함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프로이드)이기도 하지만, 김소라의 불안은 방치된 풍경의 응시를 통해 상실의 시대, 무감각해진 감각들을 회복하기 위해 붓을 들고 불안을 통제한다. 그래서 '방치된 공간'은 김소라 작업에 있어 불안을 통제하고 나아가 치유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방치된 공간은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 삶의 은유로써 버려진 풍경이자 무대의 바깥에 놓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김소라는 방치되고 버려진 곳을 되살리고 물감으로 치유하듯 구석구석 붓으로 어루만진다. 이렇듯 방치된 장소는 기억을 환기하는 풍경으로 심리적 공간과 촉각적인 질감을 통해 그만의 존재감을 회복한다. 할아버지의 부재로 혼자되신 할머니 「할머니 방」는 예전의 낡고 작은 집 옆에 현대식 주택을 지어 살고 계신다. 재래식 화장실도 아파트의 신식 화장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하지만 손녀인 김소라의 기억에는 할머니 집은 여전히 낡고 허름한 과거의 기억들이 겹친다. 「할머니 방2」를 보면 벽에 걸린 어린아이의 사진이 걸린 그림이다. 할머니가 바라보는 손주와 이제 성인이 된 사진 속의 손주가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 기시공간에서 기억을 품는다. 할아버지의 부재가 투영된 대형회화작인 「빈자리」는 명절이면 할머니 댁에 갔지만, 인터넷 접속이 안돼서 소와 외양간이 친구이자 놀이터였지만, 할아버지의 부재로 외양간에는 소가 사라지고 텅 빈 곳이 되었던 심리적인 공간을 투영한 그림이다. 소가 있던 공간은 폐허가 되어있다. 할아버지의 부재를 보는 존재(작가)의 시선은 방치된 흔적만큼 부재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고 넓게 다가온다. ● 2. 김소라의 풍경은 부재에서 생기는 심리적 불안을 치유하기 위한 풍경이다. 신체적 및 심리적 반응인 불안을 김소라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기억으로 확장해 간다. '방치된 유원지'와 '개발제한 구역'에 대한 주제는 부재를 보는 '불안의 응시'가 개인에서 문맥으로 확장한다. 보이는 것, 경험 한 것을 응시하면서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가가 응시하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시‧공간의 확장일 것이다. 아이였던 자신과 성인이 되었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불완전한 자아의 틈새, 그 시‧공간의 심리적 간격을 연결하는 장소,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이다. ● 대표적으로 「부곡하와이」는 대형 회화작업으로 '방치된 유원지'를 그렸다. 2017년 5월 부곡 하와이가 폐장된다는 기사를 보고 가족과 함께 혹은 유년기 견학을 갔던 기억의 조각으로 존재하는 장소, 그 아련한 기억 속에서 폐장하는 순간, 그 이후는 기억의 흔적들만 겹치고 교차한다. 김소라는 그 기억의 단편을 찾아가 기억의 저편에 있는 시‧공간을 겹치며 변화된 모습을 겹겹이 쌓이듯 강한 붓질로 물감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방치된 현재의 실체를 강조하기위한 방식으로 취했다고 한다. 물감의 색과 질감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감각의 기록들, 유년 시절의 불완전한 신체를 극복하는 성인이 된 화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 몸의 성장은 정체성의 형성과정이고 완결되지 않는 삶의 노정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기억은 성장기를 통해 생리심리적인 정체성의 방 속에 자신만의 기억을 저장한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은 실재와 상상이 겹치는 장소이자 불안과 결핍을 생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김소라에게있어서 유년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담긴 부곡하와이에 대한 폐장 뉴스는 상상과 현실, 과거와 미래 사이가 겹치는 시공간적인 공명으로 남겨지는 동시에 지워지는 흔적일 것이다. ● 「개발제한구역」은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다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곳을 발견하고 그린 그림이다. '개발제한구역'은 마치 청소년시절 모험을 위해 일탈을 감행하는 것처럼, 호기심의 공간인 동시에 불안심리 역시 작동한다. 이곳의 제한 구역은 도시경관을 정비하고, 환경을 보전한다는 명목 하에 지정된 곳으로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아 잡초들이 뒤엉킨 풍경을 통해 '방치된 풍경'의 확장된 응시일 것이다. 김소라는 "그곳에서 발견되는 건초더미들과 죽은 나무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쓰레기들은 그곳이 방치되어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이다. 나는 이곳에서 발견하는 흔적들의 재현을 통해 유령화 된 과거와 현재의 틈 속 상실된 것들에 대하여 기록,"임을 밝힌다. ● 3. 김소라의 '불안의 응시'는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기억의 장으로 끌어내는 생생한 현실의 장이 된다. 직접 경험한 장소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장소를 주제로 하던 작업을 지금은 대구와 영천을 오가며 마주하는 풍경을 그린다. 섬세한 기억이나 감정을 강열하게 표현하는 김소라는 감정의 무게를 물감과 붓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규격화되고 체계화된 시스템보다는 감정에 다가가기위해 물감과 붓의 존재감을 묵직하게 표현하는 이 작가는 앞으로는 '가까이에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 전단지 이미지, 소품으로 망가진 테이프 등으로 설치를 시도해 보고 싶다고 한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다가 점점 좋아하는 것을 최근에 마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더 마주보고 나 자신을 보다 명확히 알게 하는 작업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전의 작업이든 또 다시 시도하는 작업 역시 김소라가 보고 감각했던 '시‧지각의 장'일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시‧공간적 경험이 담긴 현실의 장이자, 이를 회화적 감각으로 변형한 풍경이다. 그것은 변화된 현실과 변하지 않은 기억에 대한 응시를 통해 불안 너머의 세계에 가 닿게 하는 무한히 열린 장이다. ■ 김옥렬

김민성_2020-09-25 오 후 11.13.29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0

일상의 스크린샷 ●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가는 현실(Real-life)에서 사진에 담긴 모습이나 영상의 일시 정지, 스마트폰 혹은 컴퓨터 화면의 캡처 기능과 같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화면을 캡처하듯 일상에서 마주하는 순간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지와 소리, 냄새와 같이 감각 기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지각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상념까지도 한데 얽혀있는 '순간' 그 자체를 포착한다면 말이다. 회화 매체를 통해 본인이 목격하거나 관찰한 표면에 대해 기록해온 김민성은 근작에서 물질적인 표면의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포착한 뒤, 이를 다시 변형시키고 재구성함으로써 작가 본인의 주관적인 기억과 감정의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그렇게 재구성된 이미지는 시각적인 재현을 넘어 '순간의 원형'에 가까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 김민성은 회화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어느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며 표면과 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계속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작품의 주제를 본인이 일상에서 느낀 단상에서 불러온다는 점이다. 「A21」(2016), 「A7」(2016)에서 작가는 마카를 사용해 일상에서 마주한 풍경을 픽셀화(Pixelate)하듯 재구성했다. 2017년도에 제작된 「Folk Village」 등을 통해서는 일상에서 관찰한 자연을 재해석해 화면에 옮기며 배경과 같은 특정 요소들을 선별적으로 탈락시킴으로써 이미지 변형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2018년 제작된 『The ocean』 연작에서는 전작에서 일부 사용하기 시작한 겔 미디엄(Gel Medium)을 화면 전체에 등장시키며 다양한 재료 실험을 진행했다. 2019년부터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캔버스 천에 출력하고, 마스킹테이프와 에어스프레이, 겔 미디엄 등을 통해 원본의 이미지를 거의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시키고 중첩하면서 지나치게 빠르게 감각되고 교체되는 물질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여덟 개의 캔버스로 제작된 세로 3m, 가로 6m의 대형 작업 「At a high Sierra」(2020)는 맥OS(macOS)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배경화면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다. 정확하게 말해 이 이미지는 2016년 공개된 맥OS 시에라(Sierra)의 배경화면으로, 실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이다. 작가는 먼저 본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랩탑의 화면을 캡처하고 그래픽 툴을 활용해 일부분을 흐리게(Blur) 만들거나 잘라내고 붙이는 등의 일차적인 가공을 거친 후, 이를 다시 여덟 개의 이미지로 조각내서 각각의 캔버스에 디지털 인쇄했다. 그 후 겔 미디엄과 에어스프레이를 이용해 다시 한번 이미지를 변형시킨다. 작품은 필터를 통해 일부분이 흐려졌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관찰하는 실제의 스크린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확대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개별적인 요소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뒤로 멀어져야 비로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있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의 모습이다. 화면에서 멀어질수록 견고해지는 또 하나의 장치는 관객에게 착시를 유발하게 하는 흰색의 수직선이다. 실제로 걸려있는 캔버스 사이의 틈과 동일한 간격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직선은 '사실 그대로'를 인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정체시키면서 인지의 프로세스를 의심하게 만든다. ● 2020년에 제작된 이번 작품이 현재 맥OS가 제공하고 있는 최신의 운영체제가 아닌 구버전 운영체제의 이미지를 가져온 이유에 대해 자연스레 의문이 생겼는데, 작가에 따르면 이는 '현재 본인이 가장 많이 마주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민성의 작업은 스크린 너머 디지털과 가상의 영역이 아닌, 실존하는 세계의 시선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원형을 가늠할 수 없게 조각난 파일 탐색기와 화면에 번지고 있는 읽지 않은 메시지들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화면에 버튼을 눌러 스크린샷을 남기듯이, 작가는 지나쳐버릴 수 있었던 일상의 순간을 '표면의 모습'으로 포착하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하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을 배회한다. ■ 이규식

김재홍_내면의 빛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20

김재홍_김상덕展 / 2020_1104 ▶ 2020_1108 존재 방법 ● 'je pense, donc je suis(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명한 이 문장은 데카르트가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명제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이 오늘날에도 유효한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주체적 존재에 대한 사유로의 길을 연 것은 분명하다. 김재홍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러한 주체적 존재에 대한 사유의 증명 방식으로써 접근한다. 검은 화면에 원(circle)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한 형태의 원이 아니라 일렁이는 형태로 원에 가까운 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大家)가 오더라도 이론적으로 완벽한 원은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간의 오차를 가진 이것을 '원'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원'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고 있다. ● 김재홍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시작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별적 존재자인 '나(작가)'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온 숙제인 '존재'라는 질문,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작가로서의 물음이다. 작가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원의 존재처럼 논리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지만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각의 합이 180°인 사각형은 논리적으로나 현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내각의 합이 180°인 사각형'과 같이 문장으로 규정한다면 형태를 상상할 수 없더라도 관념적으로는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작가는 끊임없이 실험하고 증명하려 한다. ● 작가는 이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거리' 그리고 '간격'이라는 매체를 통해 증명하려 한다. '거리'와 '간격'은 작가가 구축하고자 하는 '존재론'의 중요한 맥락으로써 작동하고 있는데, 작품을 보면 화면 한가운데의 원을 중심으로 엷은 선들이 파장처럼 번지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원으로 완성된다. 파장은 굉장히 얇은 두께로 그려져 있는데, 한 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작업 공정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적 프로세스는 '단색화'의 작업 방식과도 유사한데,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을 통해 한국의 정신성을 표현하는 단색화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나'라는 사유를 풀어내려 시도한다. 그렇다면 「내면의 빛」이라는 작품 안에서의 '거리'와 '간격'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 「내면의 빛」은 화면에서의 구도나 형태를 통해 거리나 간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작가가 작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거리'와 '간격'을 통해 구성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스스로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작업을 구상⋅진행하는데, 그 사유가 작업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1인칭의 '나'보다는 3인칭으로서의 '나'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고자 시도한다. 그렇게 3인칭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나'는 하나에서 둘이 되고, 셋이 되며 나아가 무수히 많은 '나'를 생성시킨다. 원이 등분된 수많은 선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수많은 '나'가 모여 하나의 원으로 치환되고 물음에 대한 파장들을 화면 위에 형상화한다. ●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김재홍 작가의 작업은 화면의 구성을 통해 어떤 객관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상징체로서 오롯이 작가의 사유 과정을 보여주며 회화의 본질을 건드린다. 물감을 섞고 캔버스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화가'라는 역할을 지시하고, 제작된 작품은 작가가 스스로 견지하는 화가로서의 존재 의미 혹은 존재하기 위한 과정을 드러낸다. 이렇게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은 데카르트가 말한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작업과정과 그 사유 자체를 지속시킬 수 있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김재홍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작품을 이어가는 작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한 근원을 작업으로써 질문하고 증명하고 있다. ■ 박천

김상덕_그들은 늙지 않을 것이다_4_종에에 목탄_18.2×25.7cm_2020

사는 게 연습 같아서 ●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미덕 가운데 중요하지만 흔한 두 가지가 있다. 변화와 일관성이다. 지금 상태에 머물지 말고 새로움을 모색하는 변화, 다른 것과 차별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키는 일관성. 두 가지는 모순의 관계로 엮여있다. 이건 일관된 작가에게 변화를, 변화무쌍한 작가에게 일관성을 요구하는 상투적인 조언으로 쓰인다. 양자를 적절히 취하는 중용의 아름다움이 있으면 좋겠으나, 그게 말처럼 쉽다면 세상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다. 어떤 예술가들은 조화로움과 균형, 혹은 안정이 끌어내는 미적 세계를 거부한다. 그들이 곧잘 빠지는 길은 전혀 다른 형식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제각각의 내적 일관성을 지키는 행위다. 작가 김상덕이 그렇단 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 작가가 쓰는 투 트랙 중 하나는 주변의 일상을 기록하듯 그리는 드로잉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내면에 품은 망상과 취향을 표현하는 추상 페인팅 작업이다. 이 젊은 화가가 먼저 택했던 건 펜 드로잉이고, 아크릴 페인팅의 이력은 그보다 짧다. 현재 그는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시에 참여하면서, 그때마다 새로 완성한 작업을 공개한다. 대단한 기세로 작업량을 늘여간다는 말이다. 두 가지 연작 모두 작업의 설정이 교묘하게 구성되지는 않았다. 동시대 미술이 품은 개념적 조형성에 작가는 그다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은 재현적인 조형성에 기대고 있고, 페인팅은 추상적 조형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어렵게 생각하며 심각하게 대하기보다, '그림 속 저들의 이야기는 뭘까?', '저 뒤죽박죽 속 형상은 뭘까?'라는 식의 잔재미에 우리 감상의 초점도 맞춰진다. ● 김상덕이 보여주는 드로잉의 필체는 학교 교육과 자기 수련에 따른 결과겠지만, 정통 삽화체에 닿아있다. 그건 서구 화풍이 일본의 출판물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196, 70년대 옛 잡지 연재소설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떠올린다. 세속문학에 삽입된 그 옛날 콘텐츠는 이를테면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도심 경관을 배경으로 하는 남녀 모습이 전형적인 그림일 것이다. 대개가 열정과 불륜, 쾌락과 번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외양은 매혹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김상덕의 드로잉 속에는 그런 인물들이 안 보인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권태롭고 지쳐 보인다. 그들은 세련미가 덜하고 거칠기도 하다. 무엇보다 착해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작가와도 이어진다. 작가는 삶 속에서 주변인들의 면면을 끝없이 발견하며, 그들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하지만 그림으로 옮기기엔 대상의 움직임보다 멈춤에 가까운 상태를 더 반길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생긴다. 그림에 사람이 들어가면 배경이 생략되고, 경관이 들어가면 인물이 빠지는 것도 그 점과 관련되어 있다. ● 작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상을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 앞서 밝힌 대로 작가는 본인 스스로가 작업을 개념 미술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예컨대 인물 사생에 특정한 의미를 설정하여 작업실로부터 반경 몇 킬로미터 내의, 매주 무슨 요일에, 매번 같은 공간 혹은 장소 순례하는 식의 그리기가 그에게는 없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황, 하이데거(M. Heidegger)식으로 말하면 작가나 타인들이나 똑같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그의 그림 속에 있다. 작가 본인이 관여할 수 없는 세상의 일부를 화폭에 옮기는 제한된 능동성은 멜랑콜리로 가득 차 있다. ● 김상덕 작가가 펼쳐놓은 또 하나의 작업, 얼핏 봐서 난장판 같은 추상 표현은 이토록 힘든 현실계와는 또 다른 거친 세계가 있다. 또한 작업 속에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작가가 완성한 대작을 차례로 감상하다 보면, 그 속에 음악에서 리듬, 아니면 시에서 내재율과 비슷한 무엇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원색을 과감하게 선으로 내지르면서 해방감을 느꼈을 거란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추리가 맞았다면, 그는 이 작업이 앞서 나온 구체적 표현에 대한 일종의 자기 반발이란 점도 설득력을 얻는다. 여기에 작가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하는데, 그 작업 동기가 선량하다. 그것은 대강 이런 것이다. 이 페인팅의 대상이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이라고 공공연히 밝혔으나, 실은 추악함과 살육과 음모와 혐오의 대상을 남몰래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 밝혀지는 일을 꺼리면서도 그 변형된 일부를 노출하는 희열을 작업의 추동력으로 삼는다. ●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언급조차 그림 속에 숨은 모든 것을 밝혀놓았다고 보지 않는다. 작가가 표면상 드러낸 주제 속에 숨은 주제는 또 그 안에 미처 개념으로 영글지 않은 다른 무엇이 있다. 그림의 시작점과 끝점을 알 수 없는 이 작업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리는 것과는 별도로, 작품이 드러내는 순수한 이미지 그 자체를 관객이 탐닉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다. 그의 작업은 이 시점에서 예술을 하는 청년이 그를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영역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훗날 성취될 예술의 초월성도 이런 성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의도야 어쨌든, 서로 다른 두 갈래 작업으로 분산되었든, 그의 회화는 보는 이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지점을 찾았다. 어지럽게 뒤틀리고 숨겨진 그 상징의 실체가 밝혀진들, 또 무수한 드로잉의 반복이 감흥 없는 일상의 기록일 뿐일지라도, 그 상반된 움직임은 미적 실천이라는 고색창연한 개념 속에 작가 김상덕의 미적 세계를 넓히는데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현실을 묘사하되 텅 빈 부분을 품는 드로잉, 비현실 속 비정형을 꽉 채우는 페인팅. 이 모순된 두 가지 사실의 간격을 띄우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 윤규홍

김경호_공존하는 실재_한지에 혼합재료_45.5×53cm_2020

김경호_이현정展 / 2020_1118 ▶ 2020_1122 공존을 통한 하모니의 향연1. 내 삶의 향기,,, 예술가 김경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그 날,,,, 그의 작업실에 가득한 작품들, 그리고, 스케치한 장면들에 대해 그곳에 머무는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금호와 영천 지역에서 보내는 동안에 잠재된 많은 경험은 지금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에게 다시 다가왔고, 고향의 흙내음이 그의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향수가 자신을 드러내는 조형적 언어가 되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는 주위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작품에 임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기독교 예술가로 삶을 살았으며, 그가 지닌 대부분의 예술적 영감은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오는 삶의 여정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작가는 기독교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따라 살았던 인생의 한 시기를 넘기고, 지금은 귀국하여 또 다른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여기 고향의 작업실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작가로서 사는 두 번째 삶을 통해 향기로운 숨을 쉬고 있는 듯하였다. ● 작가는 현재 고향의 자연 공간에서 만나는 대상인 말(馬), 별, 나무 등을 보면서 자신이 자라온 곳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작금을 즐기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며 작품에 임한다고 한다. 사실 그는 영천 레지던스에 입주하자마자 코로나로 인해 2주간 자가격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과 불안, 어두움에 생각들이 뒤엉켜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빛, 희망, 웃음, 행복을 통해 그 상황을 극복하면서 2주간의 힘든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그가 자가격리 기간에 겪었던 일련의 경험과 생각들은 김경호 작가의 작품 주제가 되었다.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두움 등 삶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통해 자신에게 내재한 내면의 근원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이에 대한 기표언어들은 많은 이들과 소통하며 작가의 생각과 뜻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김경호 작가만의 방식이다.

2. 경계를 넘어 하모니를,,, ● 김경호 작가는 학창시절 동양화를 전공하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채색, 여백 등 수묵화에서 나타나는 전통적인 기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가가 다루는 것은 소금, 먹, 아크릴, 유화, 나무 등의 이르기까지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소금은 그림의 대상의 형상이나 색을 허물고 비표상적 형태의 공간을 만들어 버리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작가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표상적 의미의 동일성을 파괴하여 상징적 형태가 아닌 다름의 그 무엇인 새로운 객체를 만드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계획하는 과정에서 전혀 자신도 예기치 못하는 순간의 새로운 형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앞서 말한 자신의 노스탈지아(nostalgia)에서 오는 기억의 형상은 불안정한 이미지들의 연속에서 드러나는 실재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드러난 표상적 이미지로서 새로운 형상(이미지)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작품을 계획하고 형상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라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이때 비로소 작가는 예기치 않는 형태,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상상하는 새로운 형태들이 구현되면서 계획된 형상들은 소거되어 없어져 버린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설정하지 않은 중심 개념과 장소를 확정하되 물리적 어려움 때문에 그 장소를 표현할 수 없게 되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 변경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우연을 만나고, 거기에서 그의 새로운 이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이런 우연이라는 것은 외부 인자가 침입해서 들어와서 마음의 평정 상태를 깨부수고 발생하는 새로운 이미지라고 한다면 김경호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의미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 이렇게 우연의 효과는 작가의 회화적 기법을 통한 재료의 경계를 넘어 실험적인 예술적 융합에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작가는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자유롭게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캔버스가 아닌 한지 위에 아크릴과 유화를 함께 사용한 점, 고목(나무 설치작품) 단면에 종이를 붙여서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그의 실험적인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작품으로 승화되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데, 단순화된 형태와 결합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회화가 만들어진다. ●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푸른 색채가 눈에 띈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는 푸른색의 색채를 통해서 작가만의 특이성(singularité)으로 드러나는데, 푸른색은 작가가 어렸을 때 봤던 아버지 모습을 소환하고 있었다. 작가의 아버님(작고)은 군무원으로 평생을 일하셨으며, 항상 푸른색의 군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곤 한다. 성인이 된 작가는 영천이라는 고향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는 평안함을 아버지를 기억하도록 하는 군복색인 푸른색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대개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존재는 무서움, 억압을 통해 소통하지 못하는 타자의 대상으로 많이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억압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기억 속에서 잠재된 군복의 푸른색이 자연의 평온함과 자신의 정서가 맞닿으면서 작품에 주요 색감으로 녹아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대부분을 이루는 푸른색 색채의 표상적 이미지는 강한 상징성을 가진다. 어떠한 원형(原形)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상징은 의식이 직접 드러낼 수 없는 불분명한 어떤 것이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간접적으로 색채를 통해 그 이미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되어있던 군복의 푸른색은 작품의 표상적 이미지와 연결되어 하나의 이미지인 원형상(原形像)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3. 공존은... ●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목'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제목도 '고목'이라고 명했다. 일상적으로 '고목'이라 하면 버려진 나무, 쓸모없는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고목'은 구시대의 상징도 권력의 상징도 아니다. 단지 쓰러지고 쓸모없는 나무를 통해서 예술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는 코로나로 인해 2주간 자가격리와 간접적인 외부활동 자제를 겪으면서 죽음, 불안, 어두움 등에 대한 긴 터널을 지나면서 다시금 생명, 희망, 기쁨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당시 불안했던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죽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고목이 창작자의 손을 통해 예술적 조형언어로 승화되어 바로 지금 우리가 고목의 생명력에 집중하고 있다. ● 그는 이번 '고목'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작가의 테크닉을 통해 화려한 모습의 고목의 작품이 아니라 고목이 가지는 소박한 모습의 형상을 통해 지속적 생명으로 회화 작품들과 어울려 화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 김경호 작가의 모든 작품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어울려 새로운 공존을 만들어 가고 있다. 회화 작품에서 어둡고 빛나는 푸른색과 검은색, 흰색 등이 보편적 형태나 색채에서 벗어난 새로운 원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괴테는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을 가장 중요한 색으로 보았다. 특히 노란색과 파란색을 빛과 어두움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횐색과 파란색을 신성시하는 색으로 쓰이기도 했다. 작가 또한 작품에서 자신의 내면적 감정이나 세계를 색채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면서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형태나 색채는 작가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어우러져 나타내려고 했다. 그의 작품에는 빛을 상징하는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암흑, 어두움을 상징하는 검은색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색채가 작가의 정서를 반영하듯 회화로 구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 우리는 항상 착각 속에서 생활한다. 항상 빛만이 존재하고, 좋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빛만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있는 곳에는 어두움과 빛이 함께 공존한다. 그리고 빛은 어두움이 있기에 더욱 밝게 빛나고 빛이 있기에 어두움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빛은 어두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나게 된다. 김경호 작가 작품에서도 밝고 어두움이 항상 공존하고 서로 화합되길 바라는 듯하며, 우리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빛을 발견하길 작가는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4. 결국은 알레테이아적 진리와 실천 ● 알레테이아는 존재에 대한 진리가 드러남(비은폐성)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진리가 드러나면서 감춰있다는 이중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자는 비은폐로 드러나지만, 바로 그때 은폐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항상 대상이 가지는 의미(본질-진리)를 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존재자인 대상은 우리 앞에 항상 비은폐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존재자의 진리를 현존하게 하고 실천 대상으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김경호 작가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 작가의 내적 표현인 작품에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사물적 성격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작가에 작품에 형태나 오브제의 사용하는 방식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작품 앞에서 작품을 바라보면서 그의 진리의 비은폐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은폐성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른 어떤 상징물의 역할로서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인 「신발」 작품을 통해 신발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신발을 신었을지도 모를 인간의 삶에 대해 총체적으로 환기시키는 비은폐성, 즉 진리를 말했다. 이번 김경호 작가의 작품도 전시를 통해 소통하고 드러내고자 했던 진리인 희망, 빛, 영(spirit), 생명, 어우러짐 등이 상징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김경호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났듯이 재현의 의미가 아닌 자기 자신도 의도치 않은 데서 새로운 형태가 드러나고, 작가가 의도하는 작품의 진리는 묘사 대상이 되는 대상과 일치되는 재현의 방식으로서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작품에 숨어있지만 동시에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이중적 의미(빛/어둠, 밝음/어두움 등)는 작가 자신의 변함없는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 심상이다. 그것은 인간은 언제나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세상의 환경을 뛰어넘는 불변의 실체인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그 존재자를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진리를 예술작품을 통해 개방함으로써 작가 자신에 내재한 진리를 조형언어로 실천한 결과물들을 전시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김경호 작가가 그동안 다양하게 접했던 많은 경험은 이렇게 예술작품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통해서 끈질기게 탐구하여 평면 회화뿐만 아니라 입체작품과 다양한 재료를 이웃하여 그만의 방식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다. 파울 클레는 말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작가의 독특성을 맛보며,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그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봉욱

이현정_사로잡힌 콤프라치코스의 아해_장지에 혼합재료_162.2×130.3cm_2020

끊어내며 나아가기 ● 이현정의 작품은 전경과 후경 모두에 적용된 역동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균형감이 있다. 재현적 요소의 비중이 크지 않은, 전체적으로 추상적 화면이기에 이러한 균형감은 돋보인다. 실재감과 중력감이 있는 작품은 추상적이면서도 장식적이지 않다. 한편 몸에서 떼어낸 살점 같은 작품을 단위로 삼아 컴퓨터를 이용해 패턴으로 만들어 양탄자 무늬나 우표로 만든 또다른 작품들에는 추상이 장식 및 기능(디자인)과 가지는 관계가 드러난다. 이러한 그림의 확장은 조형적 유희가 아니라 상징적 차원을 가진다. 거기에는 개별과 보편 사이의 갈등부터 동일자의 몸통을 이루는 타자의 위상이 포함된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초기 추상 화가들이 가졌던 염려, 즉 참조대상이 사라지고 나서도 예술이 리얼리티를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이현정의 해법은 추상적 어법을 활용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할 말이 많은 젊은 작가는 그림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생각에 서사 작업도 병행한다. 작가는 틈틈이 단편소설을 쓴다. 그렇다고 그림이 글의 삽화는 아니다. ● 텍스트는 그림과 상보적 관계에 놓인다. 작가는 그것을 소설 형식의 작업노트라고 말한다. 원래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쓰기와 그리기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림과 소설의 내용은 작업 중심에 놓인 당면한 현실은 작가의 자의식부터 여성의 사회적 상황에 이르는 광폭의 범위에 걸쳐있다. 중간 톤으로 조절되어 있지만 청/홍계열의 색감, 즉 살색 섞인 붉은 계열과 블루 그레이가 주는 대결적이면서도 보완적인 부분이 특징적이다. 대구를 이루는 형식에는 에너지의 흐름이 잠재해 있다. 그 한 가운데서 동양화의 시원한 필획을 떠올리는 검은 선의 출렁임이 있다. 하늘과 대지, 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징 색은 조화롭게 어우러지지만, 이현정의 작품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조화가 아니라, 조화를 향한 과정 중에 생겨나는 갈등과 투쟁이 전면화 된다. 무언가의 경계를 이루었을 듯한 검은 선이 내용물을 탈각시킨 채 혼돈에 가세한다. 회오리치는 검은 선들은 기존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지만, 새로운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과도기적 시공간의 궤적들이다. ● 검은 선들은 여린 담쟁이 손들처럼 단단한 판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며, 무엇인가를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포획 이후에야 무엇을 원했는지 비로소 깨닫는, 다소간 맹목적인 투망(投網) 작업의 연속이 바로 작업이다. 때로 검은 선들은 쇠꼬챙이나 칼처럼 단단하다. 검은 선들은 체액이나 살을 떠올리는 형상과 상호작용한다. 이현정의 작품에서는 무엇이 절단 나는가. 작가의 최근 관심사인 페미니즘은 전통적인 희생물이었던 여성을 주목한다. 이현정에게 모태언어라고 할 수 있는 먹으로 그려진 선은 경계가 와해되고 구축되고 다시 와해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푸른빛과 조화를 이루는 붉은 빛은 그림과 더불어 제시되곤 하는 단편소설의 지원을 받아 선혈이 낭자한 분위기로 변모하곤 한다. 고(古)지도부터 벽지같은 이미지까지, 상상과 현실을 아우르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는 인류 문명사에 늘 있어왔던 잔혹과 희생, 위반과 탈주가 자리한다. 그러한 작업들은 작가에게 카타르시스와 치유적 효과를 주었다. 작가는 작업이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일깨워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매개 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 이선영

이승희_J11407f_천에 프린트_68×128cm_2020 이승희_J1686ab_천에 프린트_204×154cm_2020 이승희_K004199_천에 프린트_130×162cm_2020 이승희_깃발(Colouful Daegu)_알루미늄, 천에 프린트_게양대 380×85×3.5cm, 깃발 60×90cm_2020 이승희_Jc93924_천에 프린트_181.8×227.3cm_2020 이승희_Nc93924_천에 프린트_160×120cm_2020

이승희_서동진展 / 2020_1202 ▶ 2020_1206 '차이'를 위한 '폴리포닉(Polyphonic)' ● 이승희 작가의 관심은 매체나 형식이 아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의 문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영국 유학을 기점으로 이전의 작업이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측면에 주목했다면, 유학 시절부터는 생태 및 환경 문제와 더불어 미술계를 비롯한 '제도'로까지 확장되어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나거나 소외된 사건, 사고, 존재 등에 주목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작가의 관심이 확대된 이유는 개인사적 경험과 더불어 작가가 소수자(Asian woman)로서 유럽에서 겪었던 여러 상황이 체화되어 작업에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승희 작가는 『컬러풀 페스티벌』(2020)에서 우리를 둘러싼 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이에 앞서 시안미술관(『인식의 그늘』, 2020)에서 선보였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2020)와 「바르게 자」(2020)에서는 과거 국가개발과 경제성장, 그리고 이와 함께 이루어졌던 계몽운동과 관련된 문구들이 오늘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루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현재를 관통하는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의문은 『컬러풀 페스티벌』에서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그 변화 가능성과 함께 복합적으로 다루어진다. 『컬러풀 페스티벌』은 「적청인지검사표(Stereotype)」, 「우리가 남이가」, 「사회적 버튼(Thumbs Signal)」 같은, 다양한 오브제와 영상 등의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이에 반해 작가의 발화(發話) 방식은 조금 독하다. "내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긴 했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컬러풀 페스티벌』은 현재 대구(경북), 나아가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역사·문화·예술 등을 투영하는 일종의 거울로서 역할 한다. 그러나 이 거울은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자기비판적 메시지를 넘어 자기반성적 기회로 작용한다. 이는 대구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한 사람의 아티스트로서 '이승희'가 '대구'를 규정하는 지역·정치·사회·문화적 '주체'와 '타자' 중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Stereotype'이라는 영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청인지검사표」는 '파랑'과 '빨강'이라는 각각의 색에서 연상되는,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 남과 북 등을 픽토그램과 상징적 텍스트로 보여주지만, 붉은색과 푸른색 조명이 각각 켜진 두 개의 검사표에서 이것들은 우리 생각과는 반대로 자리해 있다. 이 검사표의 맞은편에는 파랑·빨강 렌즈가 한 쌍을 이루는 거대한 안경이 놓여있는데, 이 안경을 통해 검사표를 볼 때 같은 색의 렌즈로는 같은 색의 검사표를 읽어내기 어렵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얼마나 이분법적 구분과 사고에 익숙한지 반문한다. ● 「우리가 남이가」는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넓은 의미의) 가치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지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장을 높이 약 1m 크기로 오브제화 한 이 작업에서 '우리가'와 '남이가'라는 세 글자는 각각 그룹을 이루고 있다. 벽면에 부착된 두 개의 센서에 움직임이 감지되면 각 그룹에 조명이 켜지는데,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응원 구호를 외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우리가 남이가'의 중의적(重義的) 표현을 통해 '우리'라는 단어로 엮이는 집단의 경계와 정체성,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 「사회적 버튼」은 개인이 가진 힘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 트로피 형상의 금색의 엄지 신호는 아래를 향해 있다. 이 엄지 신호는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최고' 혹은 그 반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2030 세대에게는 SNS에서 자신의 호·불호를 표현하는 기호로 익숙하기도 하다. 이 거대한 트로피 하단의 앞면에는 몇 가지 문구가 새겨진 명패가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균형발전위 조사 결과, 삶의 만족도 평균 이하'라거나, 'GRDP 27년째 전국 최하위' 등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그 주인공이 대구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끼며 트로피의 뒷면(명패의 맞은편)을 향하면, 짧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의 주인공은 이 엄지 오브제를 바로 세우려(엄지가 위를 향하도록) 노력하지만 거듭 실패하고, 잠시 후 한 남성이 등장해 그 행위에 동참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 『컬러풀 페스티벌』을 통해 우리는 '컬러풀'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다. '다양성의 존중'이나 '지향' 혹은 '차이에 대한 인정'이나 '이해'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말에서, 과연 '나는 현재 이 집단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나'를 설명해주기도 하는 내가 속한 집단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내가 그 주체성을 자각하기 위해 우선으로 요구되는 것은 '사고(thinking)' 하는 행위이다. 이는 곧 '나'에 대한 의식 행위 즉 내가 바로 '세계의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되기(self-becoming)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와 '주체'를 구분 짓지 않는 '상호 인정'이다. 다시 말해 나의 주체성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타자 역시 하나의 주체라는 점을 함께 의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이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실존들의 상호 간에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며, 이 '차이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만 '타자'와 '주체'에 대한 구별이나 차별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이승희의 작업들은 '나' 혹은 내가 포함된 '우리'를 비추어 자기반성적 계기를 제공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나'와 '우리'에 대한 객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타자화'를 거쳐 '상호 인정'이 이루어진 상황이야말로 대구를 넘어 지금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행위로써 개인-개인, 집단-집단, 또 집단-개인으로 설정되는 타자-주체의 경계를 재설정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차이'란 다양성이라는 말로 포장된, '집단으로의 개별성의 흡수나 포섭'을 의미하는 모노포닉(monophonic)이 아니라, 상호 인정을 통해 주체-타자 간의 경계가 재설정되어 차별, 배제, 불평등이 없는 폴리포닉(polyphonic)을 의미한다. ● 우리 사회를 비롯한 미술계에서도 여러 '차이'가 존중받기를 바라는 이승희 작가가 전시를 통해 묻고 싶은 것은 '행복'에 관한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정의를 '우리의 현재(내가 처한 현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본다면,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다성적(polyphonic) 요구를 끊임없이 단성적(monophonic)으로 만들려는 현실 그리고 이러한 현재를 바꾸기 충분한, 주체들에 내재 된 가능성을 이야기하듯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전시를 보는 많은 이들이 『컬러풀 페스티벌』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와 우리의 현재를 돌이켜볼 수 있으면 한다. ■ 정은진

서동진_알렉산더 잠자 공작_골판지 부조_117×97cm_2020

작가 서동진 작업에 관한 소론세 개의 변신과 하나의 가치 서동진 작가의 글쓰기는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이야기가 있다면 더 쉽고 명확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서동진 작가노트 중)라는 미적 고민도 한 몫 했다.(모태는 '글쓰기'로 동일하지만 전자와 후자 간 간극은 크다. 예술가의 삶에 있어 가치적 측면은 후자에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작업과정을 글로 적고, 관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수단인 '소설쓰기'였다. 장편소설 『잠자 부부의 변신』(2018)(이 소설의 초고는 2016년이다. 그는 단편소설을 2015년부터 써 왔다.)도 그렇게 탄생했다. 『잠자 부부의 변신』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중편소설 『변신』(Die Verwandlung, 1916)을 각색한 것이다. 다만 『잠자 부부의 변신』은 가족에게 외면 받고 시름시름 앓다 죽는, 다소 음울하게 매듭지어지는 원작과는 다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겨운 삶을 살던 주인공 잠자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흉측한 해충으로 변신한 이후 가족 간의 갈등 끝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원작 대신, 밝고 일상적인 내러티브를 축으로 한다.(학대에 가까운 고통을 주던 부모를 귀여운 앵무새로 바꾼 후 부모의 관점에서 아들 그레고리의 상황을 그리는 등 원작과는 정반대의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유명세를 얻는 잠자 부부라는 가공되고 상상력이 가미된 측면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겪을 법한 삶의 소소한 단상들, 사건과 일화들이 긍정적으로 그려진다는 게 특징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이입이 빚은 서동진 식 결론이다. 서동진 작업과 관련해 흥미로운 지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앞서도 언급한 소설이다. 소설은 그 자체로 작품이지만 새로운 시각조형의 동기가 된다.(물론 조형예술가들이 문학을 작품으로 확장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키앤홀츠가 그랬고, 제니홀저, 조셉 쿠수스, 온 카와라가 그랬다. 물질로서의 예술이 비물질적인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며 음악이 되는 시대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내건 소설, 지시문, 악보, 시나리오 등은 생각과 아이디어, 언어/문자자체가 예술 재료화 되는 개념미술을 통해 예술은 새로운 정의를 갖게 되었다.) 책에선 텍스트와 이미지가 하나 혹은 각각의 예술작품으로 존재한다. 텍스트 자체가 문학이라면 글 속에 삽입된 그림은 이야기를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별도의 예술적 위치를 부여받는다.(이들은 어떤 면에선 자웅동체를 형성하지만, 명화를 패러디하는 기존 작업에 부응하면서 다양한 명화 속 장면들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동기야 어떻든 새로움에 대한 갈증과 시도는 충분히 의미적이다. 두 번째는 동시대미술과의 연관성이다. 실제로 서동진 작가의 작업들은 장르 간 학제 간 경계 없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미술에 부합한다. 즉 서로 다른 무언가(문학과 시각예술, 상상과 현실, 실제와 가상 등)가 이질성 없이 연속적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과 형식 및 내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그의 소설 『잠자 부부의 변신』은 작화적 시점에서나 독자의 시각에서 주어진 시간성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각자 고유의 시간성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 안에 내재된 다양한 생각들을 자발적으로 공유하기에도 용이한 매체이다.(이를 미적 현상으로 바라볼 경우,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와도 결부된다. 내용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사적 서사이긴 해도 충분히 공감 가능할 만큼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될 수 있는 경험을 충족시키므로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잠자 부부의 변신』은 서동진 작업의 중요한 레퍼런스이자 조형의 단초이며, 자타 모두에게 여러 층위로 사고를 확장시키는 매개이다. ● 마지막 세 번째는 시·공간의 자유로운 왕래이다. 그의 명화 패러디 작업(『잠자 부부의 변신』과 명작 패러디 모두 원작이 있다. 재해석하는 측면도 있지만 언젠가는 창의적으로 온전히 분리되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은 소설에서 차용하거나 차용된 결과는 다시 독립된 작업으로 치환된다. 왕래에 제약은 없다. 중요한 건 우린 서동진 작업에서 엿볼 수 있는 장르 간 학제 간 교차방식이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남다른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 ● 일련의 전시와 글, 그리고 기타 자료들을 종합할 때 서동진의 작업은 예술가로서의 자세와 고민이 투영된 결과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어쩌면 도달하기 쉽지 않은 '평범한 근로자'이고 싶은, 다짐이 담긴 '작업시간표'(2016년 1월 14일자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작업에서처럼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골판지를 오리고 붙여야만 하는, 그야말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고된 작업만큼이나 꼼꼼하고 솔직한 그의 작업노트(작업일지)도 그것을 증명한다. ● 그 작은 것에서 작가의 의지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게으름 없이 조형적-미학적인 연구를 이어가며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현재를 살피려는 눈과 마음만으로도 가치 없다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물은 많은 이들에게 시각적 즐거움과 이성이 감각적인 심상과 결합되는 체험을 선사한다. 이밖에도 서동진 작업에서 읽히는 장점은 여럿 된다. 카프카와 서동진 식 변신이라는 두 개의 변신에 덧대어 또 다른 변신(세 번째 변신)을 꾀하는 긍정성을 읽을 수 있다. ● 그러나 자칫 장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장식적이란 금전적 이익을 주는 소비의 가능성(아트상품까지 만든다면 소비적 측면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팬시업자가 아니다.)을 낮지 않게 하나 싫든 좋든 취향에 읍소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귀엽다, 예쁘다, 집에 걸고 싶다는 취향의 영역이고, 취향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기에 결국 예술가들의 생명력은 단축된다.(넓게 보아 자본과 예술은 어쩌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다시 말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가 적당하다. 팔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작품이 팔리는 상황조성이 가장 이상적이다.) '잘 그린다' 혹은 '잘 만든다'와 좋은 작품은 별개의 개념이다. ● 참고로 예술가들이 스스로 설정한 목표 혹은 만족할 만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건 운이 없거나 실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으나, 망막의 만족은 높을지 몰라도 공감이 떨어지거나 사변성에 치우쳐 인류 공통의 문제를 간과한 채 예술이 또는 예술가가 공동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지 않는 탓도 있다. 자신의 예술이 어째서 예술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정립도 희미한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그리거나 깎고 다듬는 기능적 노동을 예술 활동으로 치부하는 경향 말이다. ● 하나 더 덧붙이면, 미술의 역사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우직하게, 인내하며 자신의 신념대로 한 길을 걷는 이들의 몫이다. 굳이 대중의 이해에 목말라할 필요 없다.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2017년 9월 15일 작성한 '사대주의와 가르시아 마르케스'(같은 글엔 그의 작업에 앵무새가 등장한다고 하여 그것을 '사대주의'라 지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관람객의 반응은 무척이나 뜬금없다. 그런 식이라면 '미술'이란 용어는 일제의 잔재이니 더 이상 사용하면 안 되고, 유화는 얀 반 아이크라는 유럽인이 보급했으니 거부해야할 재료가 된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이나 르네상스 명암법도 사용하면 곤란하다. 까치든 까마귀든, 아니면 독수리든 앵무새든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의도에 준할 뿐이다. 그리고 만약 까치로 했다면 그땐 또 통속적이라고 했겠지.)라는 글 속 '한 남자'처럼. ■ 홍경한

Vol.20200420d |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