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상원(上元)

안성규_나형민 2인展   2020_0401 ▶ 2020_0429

안성규_경계(Border)19-81 자이푸르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정부서울청사 입주기관 공무원 및 청사 방문객 대상 전시로 관람대상이 한정되어있습니다.

정부서울청사 문화갤러리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209(세종로 77-6번지) Tel. +82.(0)2.2100.4711 www.chungsa.go.kr

안성규 작가가 도시풍경을 중심으로 작업을 한다면 나형민 작가는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작업을 한다. 안성규 작가 화면의 주된 제재는 도시 속의 오래된 골목이나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건물들과 멀리 전망대에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라면, 나형민 작가는 수수한 수수밭이나 전원에서 흔히 보게 되는 수풀 가득한 지평선과 울창한 듯 단아한 노송(老松)이 주를 이룬다. 이 두 작가의 소재는 '도시와 자연', 재료에서는 '캔버스와 한지', 기법에서는 '쌓아 올린 입체적 터치와 스며드는 평면적 터치'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서로 이질적이고 대비적인 풍경화면을 연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란 하늘의 보름달'이라는 유사점이 보인다. ● 두 작가의 화면 속 하늘에는 둥근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둥근달을 보름이라고 하는데, 음력 1월 15일 일 년 중 첫 번째의 가장 큰 달덩어리를 대보름이라 한다. 한자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푸른 상원'이란 파란 하늘(靑天) 가운데 밝은 보름달(明月)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족의 건강, 직장에서의 성공 등등 제각각의 소원을 기원하였다. 특히, 정월 대보름에는 달빛 아래에서 횃불에 불을 붙여 돌리거나 동네 빈터에 볏짚을 쌓아 달집을 태우며 일 년 중 액운을 제하고 소망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농경사회에서 보름달의 달빛이란 병해충은 물론 인간사회의 어둠, 질병, 액운 등을 제거해주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 소망과 기대의 대상이다. 또한 보름달은 이곳뿐만 아니라 먼 고향 땅에도 똑같이 비추어 주기 때문에 타향살이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름달이란 풍요와 소망의 기원이 담긴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안성규_경계(Border)19-84 톨레도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19

그런데 두 작가의 보름달은 밤하늘이라 하기에는 생경한 파란 하늘을 통해 등장한다. 안성규 작가는 이전의 다채로운 낮의 하늘에서 보름달이 등장하는 밤 또는 새벽녘의 하늘을 표현하고 있지만, 검은색이 아니라 진한 코발트블루에 가깝다. 나형민 작가는 도리어 하늘색인 셀루리안블루에 가까운데, 밤이 아니라 낮이기도 하고 달이 아니라 태양일 수도 있는 모호한 시간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파란 하늘은 특정한 시간대나 공간을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추억이 내재할 수 있는 여백이자 사유의 토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시풍속에서도 우리의 염원은 해보다 달에 더욱 투영되었듯이 해인지 달인지도 모를 애매모호한 둥근 원형은 우리의 의식은 통해 해(日)보다 달(月)로서 더욱 인지되는 듯하다. 그러면서 각자의 염원과 소원을 담아내는 달 그릇과 같이 감상자들을 비추고자 하는 것이 작가들의 의도일 것이다.

안성규_경계(Border)19-101 바라나시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안성규_경계(Border)19-102 그라나다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두 작가는 또한 공통으로 하늘과 지평의 경계선을 표현하고 있다. 안성규 작가 작품에서 경계란 하늘과 지평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시공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접촉하는 공간이라면, 나형민 작가의 경계는 열린 정자각(丁字閣)의 문과 같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소통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경계의 표출을 위해 두 작가는 화면의 하단에 낮게 도상을 배치하여 하향성의 평원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성규 작가의 표현 대상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아래쪽에 편중되어 있다. 그리고 마치 거대한 여백과 같이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이 차지하고 있고 거기에 은은한 불빛의 보름달이 위치하고 있다. 이런 하단 편중 구도는 작가의 뚜렷한 조형 의지로 화면 가운데 무엇이 주제이고 부주제인지의 구별 가능한 전통적인 풍경화의 구도와는 차별화된 화면구성이다. 마치 도시풍경임에도 도시가 작품의 주제화 된 대상이라기보다 도시와 하늘이 이루는 경계가 화면의 중심이 되며 명상의 토대가 된다. 이런 화면 구성의 의미를 안성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넓은 하늘과 좁은 도시 풍경의 의도적 연출 속에서 여백의 미는 중요하다. 여백에 대한 동양의 사유를 하늘에 담고자 하며 그림 속에 배어들기를 바란다. 먼 거리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기록하고 포착하여 표현하는 것은 넓은 지역을 멀리서 찍은 '익스트림 롱샷(Extreme Long Shot)' 촬영기법이 가지는 고요한 명상의 요소를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경계' 풍경화는 화면이 클수록 명상의 요소가 강화된다."

나형민_명승(名勝)-울산바위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8
나형민_재생의 언덕_한지에 채색_135×190cm_2020

나형민 작가 역시 다소 낮게 지평이 드리워지면서 고원적 평원법 시각을 연출하고 있다. 안성규 작가보다는 대상이 극단적으로 하단에 배열되지는 않지만 비교적 낮게 배치되면서도 치솟아 있는 소나무, 곧게 뻗은 수수, 드높은 산맥 등은 수평보다는 위로 올려다보는 시각법을 보여준다. 특히 평면화된 대상을 표현한 레이어의 중첩을 통해 겹겹이 쌓인 듯한 심도감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중첩된 표현법은 랜티큘러를 활용한 '랜티스케이프'라는 새로운 풍경화로 응용된다. '랜티스케이프(Lentiscape)'는 랜티큘러(Lenticular)와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합성한 조어(造語)로 랜티큘러 방식을 활용하여 산수화에서의 다층적 구성을 뉴미디어 방식으로 시도한 나형민 작가의 작품 유형을 통칭한다. 랜티큘러(Lenticular)란 볼록 렌즈를 나열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영상이 보이도록 한 것으로 간단하게는 2개 이상의 그림을 병첩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환되는 이미지 구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공간감을 주어 입체적 화면을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나형민작가는 랜티큘러의 특성인 시점에 따른 변환, 심도 있는 공간감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산수화가 추구해온 다원적이고 동적인 공간을 새롭게 연출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와유의 대상으로서의 전통적인 한지의 산수화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산수화, 또는 산수 정신의 구현을 실험하였다. 결론적으로 Lentiscape(Lenticular+Landscape)란 고정된 시점으로서의 풍경화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전통적인 족자나 횡권 형식에서 보여 왔던 횡적, 종적 화면의 확장을 랜티큘러라는 렌즈를 통해 집약적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새로운 산수화, 풍경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나형민_Lentiscape-붉은 상원_렌티큘러_66×100cm_2020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안성규 작가의 푸른 하늘은 저녁 무렵 같기도 하고 새벽녘 같이도 하다. 심지어 달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과 같은 하늘에 여행 중 만날 법한 야경의 도시가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형민 작가는 색채의 변화 없이 무감각한 단색으로 메꿔진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심지어 보름달이 떠 있기에 무안할 정도로 파랗다. 그래서 사실적인 하늘색이면서도 하늘이 아닌 다른 세계와 같이 느껴진다. 이처럼 푸른 하늘의 보름달이란 낯선 풍경일 수도 있지만, 두 작가의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이백의 눈에도 보름달의 야밤은 푸른 하늘(靑天)로 보였던 거 같다. 이백의 시 「파주문월(把酒問月; 술잔을 잡고 달에게 묻다)」을 보면 청천(靑天)의 흰 달빛(明月)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늑대인간이라도 등장할 것 같은 서양 밤하늘의 보름달과 달리 서정적이면서도 희망적이다. ● "푸른 하늘에 저 달은 언제부터 있었던가 青天有月來幾時 / 나는 술잔을 멈추고 달에게 물어보노라 我今停杯一問之 / 사람은 밝은 달에 기어오를 수는 없으니 人攀明月不可得 / 도리어 달이 항상 사람을 따라다니는구나 月行卻與人相隨 / 날아가는 거울과 같이 흰 달빛이 단궐(丹闕)을 비추듯 皎如飛鏡臨丹闕 / 푸른 안개 다 사라지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綠煙滅盡清輝發 (...) 현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今人不見古時月 /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今月曾經照古人 /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흐르는 물과 같음을 古人今人若流水 / 명월을 보고 느끼는 것은 이와 다름없으리라 共看明月皆如此 / 오직 바라노라, 노래하고 잔을 들 때에 唯願當歌對酒時 / 달빛이 술잔을 오랫동안 비추어주기를 月光長照金樽裡"

나형민_둥근 수수밭_한지에 채색_135×175cm_2019

예나 지금이나 마치 보름달이 가득 찼다가 사라지고 이내 다시 채워지듯이 흐르는 물(流水)과 같은 삶의 순환적 흐름의 이치는 달을 통해 깨달았으리라. 삶과 죽음, 내세와 외세에 대한 순환적 세계관에서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 또는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라고 인지한다. 그래서 오늘날 빈곤이 있으면 내일은 풍요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 소원을 갖고 현실적 문제에 해탈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보다는 생명을, 고통보다는 행복을 오랫동안 지속하기를 희망한다. 이백이 웬만하면 술잔에 달빛을 잡아두고 싶어 한 것과 같이, 두 작가는 어두운 현실 가운데 불빛을 선물하듯이 푸른 하늘도 모자라 그 속에 보름달마저 잡아두고자 했을 것이다. ● 뜻하지 않게 전염병으로 고난스러운 이 시기에 두 작가의 푸른 보름달이 정화와 재생의 불꽃이 되어 주길 기대해 본다. ■ 나형민

Vol.20200403g | 푸른 상원(上元)-안성규_나형민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