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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429_수요일_05:00pm
주최,주관 /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파라다이스 집 Paradise ZIP 서울 중구 동호로 268-8 Tel. +82.(0)2.2278.9856 www.p-zip.org
희망의 길 위에서 ● 어느 분야에서든 소위 성공이라는 말과 연결된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상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성공에 대한 선망과 상찬은 미술계라고 빗겨가지 않는데,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하나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공한 예술가라는 호칭이다. 예술가의 성공은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현실적 성공이다. 이 성공은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의 욕구이론을 살짝 빌려서 말하자면 개인적 차원에 해당하는 생리, 안전에 대한 욕구나 사회적 차원에 해당하는 애정과 소속감, 존경에 대한 욕망이 다양한 강도로 시장과 역사 위에서 뒤얽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술계 내외에서 성공한 예술가를 이야기할 때는 보통 이러한 현실적 성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현실적 성공의 반대편에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삶을 충실히 일궈나가는 수행적 성공이 있다. 이 성공은 현실적 성공에서 언급한 욕구와 욕망이 해결되었다고 여겨지거나 전면적으로 혹은 일부 생략될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수행적 성공은 시장과 역사라는 경유지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거나 혹은 아예 집착할 필요가 없다. 현실적 성공은 나와 우리의 무수한 실패와 패배를 제물로 삼아야 하는 곳이다. 반면 수행적 성공은 실패나 패배를 제물로 삼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의 성공을 필요조건으로 삼지 않고 수행적 성공으로 직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가의 성공을 논할 때 두 가지 맥락의 성공이 공존하는가와 공존한다면 어떤 비율로 공존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공한 예술가에 대하여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에디 강의 작업이 현실적 성공보다는 수행적 성공에 훨씬 많은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에디 강의 작업은 현실의 강력한 중력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삶으로 옮기는 끈질긴 노력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디 강을 단순히 시장형 작가 혹은 팝아트 작가라는 식으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은 현실적 성공에 대한 과몰입이 만들어낸 일종의 착시다. 이 중에서 특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다양한 캐릭터의 응용과 만화적 구성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에디 강의 창작을 팝아트로 환원하는 경향이다. 사실 그의 창작에서 캐릭터 응용과 만화적 구성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팝아트의 역사적 측면이나 시대적 흐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청소년기부터 이러한 요소를 자연스럽게 창작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디 강의 창작은 모더니즘과 대중문화를 똑같이 논평했다는 측면에서 네오 아방가르드라 호명되기도 한 팝아트나 혹은 중국의 정치적 팝아트, 일본의 네오팝, 미술시장의 거품 시기에 등장한 한국식 팝아트 등을 의식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착시를 빗겨나가 볼 필요가 있는데, 마침 이번에 열린 『We will be alright』가 이러한 착시를 우회하여 에디 강의 작업을 보다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에디 강이 보여주는 작업들은 근래에 자신을 엄습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상실을 묵묵히 감내하고 끌어안으며 빚어낸 시간이 물리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상실은 현실의 시간과 애도가 거처할 마음의 시간 사이에 극적인 엇갈림을 토해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실이 엄습한 후에 한동안 그러한 엇갈림 위에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고립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에디 강도 상실 후에 뒤따라오는 이러한 고통 속에 한동안 잠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자신의 자아가 고립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으며 결국 현실의 시간과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에디 강은 여행 속에서도 드로잉 작업을 멈추지 않았는데, 바로 이 드로잉 작업들이 이번 전시의 중심축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드로잉 작업들은 에디 강의 다른 드로잉 작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이 작업들은 문학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언어와 기록을 통한 애도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드로잉 작업들이 구현되는 스케치북, 객실에 비치된 메모지, 지도, 엽서 같은 바탕들은 마음의 시간이 물질화된 것이다. 따라서 에디 강이 물질화된 마음의 시간 위에 선을 긋거나 색을 칠하는 행위는 그 시간 위에 애도를 직조하는 행위와 같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있는 화포 위에 유화,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등을 사용한 작업들은 드로잉 작업들의 전후에서 애도가 직조되는 과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에디 강이 이러한 작업들을 추상의 영역에 모두 밀어 넣지 않고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대변하는 캐릭터인 러브리스, 믹스, 예티 그리고 "WE WILL BE ALRIGHT", "MISSING YOU", "I WILL ALWAYS BE THERE FOR YOU", "UPSIDE DOWN", "LOOP", "GOT TO FIND MY WAY" 등과 같은 문장과 연동해 가시화된 이야기로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Dreamer」(2017)를 시작점으로 풍선을 놓치는 러브리스와 믹스 그리고 고통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예티가 풍선을 잡고 어린 소녀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Don't forget the magic」(2020)으로 이어지며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에디 강의 상실, 고통, 애도, 희망을 순차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가시화된 이야기는 분명 에디 강의 매우 사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가 가시화한 이야기는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 속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인간의 보편성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측면을 가진다. 따라서 에디 강의 이번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향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것이 될 수 있다. 다행히도 에디 강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집약적인 애도를 치러냈으며 덕분에 현실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을 점차 동기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도라는 것은 충실한 노력 없이 결코 쉽게 직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노력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이번 전시에서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디 강의 『We will be alright』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상실과 고통을 가로지른 애도는 어쩌면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애도가 끈질긴 노력 없이 직조되지 않듯이 희망도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삶이 출현하고 거처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이라는 이름의 길을 걷고자 할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빛조차 삼켜버리는 현실의 중력이 선사하는 무수한 고통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희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끝없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노력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한편 우리가 희망의 길 위에서 마주해야 할 고통 중에는 노력이 행복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판단이 무한히 증식한 결과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통 앞에서도 희망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희망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어느 시대든 죽음조차 희망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절망에 철저히 삼켜진 경우도 많았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의 길을 걷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고통을 끊임없이 돌파하는 것이 죽음 이후에 피안을 보증해주는 열쇠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희망은 죽음 이후를 위한 봉헌이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해독하여 꿈, 행복, 사랑 등이 깃드는 삶을 계속 직조해나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끝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희망의 길을 끈질기게 걷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죽음을 넘어선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디 강의 이번 전시를 가로지르는 희망도 결국 우리가 희망을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와 그 의미가 어떤 충실성을 계속 필요로 하는지를 곱씹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은 에디 강의 작업들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각 작업들이 호응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배면에는 분명 희망에 내재된 의미와 무게에 대한 사유가 고르게 드리워졌다. 그러니 우리는 에디 강이 선사하는 이야기의 배면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우리의 삶과 현실에 대하여 함께 질문하고 응답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홍태림
Vol.20200325b | 에디 강展 / Eddie Kang / 姜錫鉉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