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김지예_한수정_황소영展   2020_0211 ▶ 2020_0318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0_0211_화요일_06:00pm

주최 / 갤러리 유진목공소 기획 / 반이정(미술평론가, 갤러리 유진목공소 디렉터)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유진목공소 GALLERY EUGENE CARPENTERSHOP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89-2번지 1층 www.facebook.com/gallery.eugene.carpentershop

분홍색을 기획 주제로 잡기 ● 『분홍』은 김지예·한수정·황소영을 초대한 3인전으로, 작업을 접하는 1차원적 표면의 색채를 분홍색으로 쓴 작가 셋을 선별한 전시다. 이 세 작가 중에 분홍색을 자기 작업색으로 특화한 경우는 황소영이 가장 가깝고, 장기와 인체 일부를 에로티즘과 연결지은 김지예의 작업도 대부분 분홍색이라 하겠다. 분홍색 꽃잎의 부분을 강조한 한수정은 다른 채색으로 완성한 꽃이 더 많을 뿐더러, 다양한 시각재현 실험에 방점을 둔 작업을 해온 터라 분홍색과는 연관짓기 어려운 전력이 있다. ● 그렇지만 『분홍』이 기획된 계기는, 분홍색 표면의 작업들로 전시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한수정의 제안이 발단이었다. 작가 3인 중에 분홍색과 유기성이 가장 낮은 이가 그런 발상을 꺼낸 건데, 그 제안에 '그거 괜찮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시각적으로 단번에 각인되는 공통점에 기반한 미술 전시 기획. ● 색은 언어나 수리를 넘어선 직관의 호소력을 지닌다. 이같은 호소력은 시각예술의 본령이기도 하다. 미술작품마다 풀이하는 해설을 갖다붙이는 건 통념이 되었고, 명화로 지목된 그림은 과유불급의 해석이 주렁주렁 달리게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좋은 미술품은 작업의 표면을 마주하는 순간, 완성도를 직감하는 경험칙이 우리에겐 있다. ● 분홍색을 여성과 연결짓는 건, 지구촌 대부분에서 합의된 시각 언어다. 남성이 파란색과 연결된다면, 그 대척점에 여성성 나아가 여성 섹슈얼리티와 엮여 사유되는 분홍색이 있다. 성별에 따른 이 같은 색채 이분법을 사진가 윤정미는 프로젝트로 다루기도 했다. 반면 남성미술가 최민화가 제작한 거의 대부분의 분홍빛 회화는 급진 정치미술를 재현할 때 사용되었다. 분홍색은 최민화의 고유색으로 각인됐다. ● 갤러리 유진목공소의 기획전 『분홍』 은 시각적으로 단번에 각인되는 분홍색을 공유하는 세 작가의 작업들로부터 미술의 촉각성, 인체 감각의 연장, 성애주의性愛主義, 장식 가치 등이 어림짐작할 만한 교집합을 형성하는 모양새를 보여주려 한다. 비중의 차이는 있어도 전시를 구성하는 이 네가지 키워드는 세 작가에게 고르게 배어있고, 그것을 분홍빛이 직감적으로 연결시킨다. ● p.s. 『분홍』이 시각적으로 각인되는 공통점에 기반한 기획전이라는 입장은 앞서 밝혔다. 갤러리 유진목공소는 추후에도 동일한 컨셉트의 기획전을 이어가려고 한다. 작품 표면에서 시각적인 공통점을 전시의 기획으로 떠올린 이 단순명료한 발상으로부터, 『2018 광주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 총평』란 제목으로 연전에 기고했던 내 글이 떠올랐다. 원고의 일부는 이랬다. ● "올해 광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 연구서 『상상의 공동체』를 차용해 전쟁, 분단, 냉전, 포스트인터넷 등 어지간한 연결고리를 지닌 모든 주제를 전시의 큰 주제 속에 포함시켰고, 부산 역시 '분리'라는 큰 주제 아래 난민, 디아스포라(이산), 정치 갈등, 경제 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끌어왔다. 어쩌면 비엔날레들의 다음 주제로 등판할 선수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일지도 모른다. (중략) 특정 사회과학 화두에 최적화된 현대미술(가)이 있을 리가 만무하건만, 전 세계 수백 작가들을 끌어 모아 비엔날레가 정한 단 하나의 주제에 수렴시키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러다보니 포괄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누구도 트집 잡기 어려운 선한 대의명분이나 이미 공인된 사회학적 화두가 주제로 선택된다. 비엔날레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미술이 어느덧 위대한 구호를 대변하는 매체로 둔갑해있다. 냉전, 전쟁, 분단, 소외, 이산, 인종문제, 젠더 등등 절박한 사회문제를 관철하는 진지한 대변인으로 변신해 있다. 믿겨지지 않는 일이다." ● 비단 비엔날레처럼 매머드급 기획전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술판에서 반성없이 되풀이 되는 전시 기획의 공식은 관념적인 화두나 공인된 인문학의 수사를 제목으로 걸고, 직간접으로 연관짓기 까다로운 작품들을 한데 모은 것 같다는 환멸이 내게 차츰 쌓이고 있었다. ■ 반이정

김지예_lacy_도자기 바니쉬_가변크기_2018_부분
김지예_saint cherry_도자기_가변크기_2017_부분
김지예_plate_1_종이에 색연필과 아크릴채색_54×54cm_2013_부분

김지예의 도예품은 부서질 듯 가녀리되 만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촉각성을 드높인 작업이다. 유약으로 반들반들한 표면이 생물체의 내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내장을 묘사한 그녀의 작업은 성모 마리아의 내장을 상상해서 만들었다는 사연을 후일 남이 쓴 비평을 읽고서야 알았다.) 점액질의 내장은 실물이건 그것의 재현물이건, 보고싶은 형상이긴 어렵다. 그럼에도 살구색과 점액질 형체를 결합시킨 김지예의 반들반들한 도예품은 성애주의를 직감하게 하며 조형미까지 갖추고있다. 그녀의 도예품 대부분이 단번에 무얼 재현한 건지 알기 힘들 만큼 구체적인 형상이 잡히진 않지만, 그런 모호한 신비감이 되려 에로티즘을 심증으로 확신케한다. ● 김지예의 초기작에 속할 평면 작업도 이 전시에 선택됐다. 도예작업의 연속선 위에 있는 평면작업이다. 새의 암수가 짝짓기하는 다양한 체위들로 균질된 패턴을 만든 평면작업은 도예작업에 비하면 직접적인 성적 유머를 구사하며, 도예작품과는 다른 차원에서 장식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수정_peony_캔버스에 유채_75×75cm_2008
한수정_peony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8
한수정_peony_종이에 수채_50×70cm_2015

한수정의 작업 계보는 일관되게 '시각 재현의 다양한 구사법'을 이행한 과정이었다 하겠다. 초기작 「그림자로 보기」 시리즈는 벽면에 문과 문고리의 윤곽을 검정색 시트로 붙여 실제 문이 벽에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1회용 설치작업이다. 젊은 시절 M.C. 에셔M.C. Escher의 착시 기법을 좋아한 작가는 최소한의 정보로 최대한의 눈속임 효과를 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한수정의 재현 방법은 '어떤 사물을 파악할 때, 대상 전체의 정보가 아닌 대상을 특징짓는 일부분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 '꽃'을 재현 놀이의 대상으로 가져온 건 2005년부터다. 꽃은 미술사에서 오래된 도상이며, 아카데미 미술에선 정물화의 전통을 잇는 계보가 있을 만큼 유구한 주제다. 한수정의 꽃 그림은 최소한의 구성요소만으로 꽃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완전한 꽃의 재현이 아니어도 관람객이 하나의 완성된 꽃으로 지각하도록 유도했다. ● 2017년 전후로 꽃 그림 재현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대상의 '형태'가 아닌 '색'에 집중해서 제작되었다. 오랜 시각예술가의 생활과 노안은 정교한 형태 묘사가 아닌, 색만으로 대상을 완성시키는 대안을 발견하게 했다. 이는 시각예술가가 경험하는 일반 체험을 자신의 작업방법론에 연결시킨 것으로, 창작자의 지각 변화와 작품 사이의 유기성을 재현한 것이라 하겠다.

황소영_잃어버린 산수화 오후 2시 30분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19
황소영_잃어버린 산수화 오후 1시 1분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9
황소영의 요가 클래스가 전시 기간 중에 일반인의 신청을 접수 받아 갤러리 내부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화-목 11:30~12:30 / 토 14:00~15:00

황소영은 요가 강사를 부업으로 할 만큼 요가가 생활로 내면화된 미술가다. 요가를 통한 인체 체험을 평면 회화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며, 그 점에서 미술의 촉각성과 인체 감각의 회화로의 연장이라는 주제와 맞는다. 황소영은 요가의 수행을 통해 인체의 안팎에서 느껴지는 시간 흐름의 차이를 체험했고, 자연과 자신 사이의 일심동체를 느꼈으며 그 같은 요가 체험을 회화 작업으로 투영하려 했다. 요가를 통해 삶에 흐르는 에너지의 순환 경험은 옛시절의 산수화 전통을 통해 재현하려 했다. 서양화 전공이지만 주제를 동양화의 고전 도상을 매개로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황소영 작업의 주제어는 '읽어버린 산수화'다. 오늘날 화단에서 입지가 훨씬 좁아진 옛 산수화의 방법을 빌려와 현대적 회화를 제작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차용한 분홍색 산수화 속에는 요가를 수행하는 현대인의 신체가 숨은 그림처럼 스며있다. 그녀의 모든 '준' 산수화 속에 현대적 광경이 보일 듯 말 듯 배어있다. 다채롭고 농염한 분홍 화면 속에 스며든 다양한 체위의 인체형상은 성애주의의 질감도 스며놓는다. ● 붓의 움직임과 터치의 비중이 높아서 표현주의적 화면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동양미학의 기운생동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황소영은 빨간색과 흰색이 뒤엉켜 분홍색으로 전면화된 그림을 그리는데, 그 색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색으로 간주하는 전통사상의 영향도 있지만, 작가가 느낄 때 인체의 수축 이완이 붉은색과 흰색의 조합으로 잘 표현된다고 봐서다. ■

갤러리 유진목공소 1. 갤러리 유진목공소는 30년째 운영 중인 유진목공소 옆에 자리한 화랑으로, '유진목공소'라 적힌 대형 간판 아래 나란히 있다. 이곳은 원래 수도와 보일러를 수리하던 설비업체가 있던 자리로, 화이트큐브의 백색 벽이 아닌 설비업체가 철수하며 남긴 흔적/인테리어를 전시장 벽으로 그대로 사용한다. 2. 14세부터 55년간 줄곧 목수로 일한 윤대오 사장이 아들 윤종현과 운영 중인 유진목공소는 KBS-TV 교양프로 「낭독의 발견」 2010년 방송 등 대중매체에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3. 목공소로 유명했던 홍은동 문짝거리에 재개발 바람이 일면서 목공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와중에 현재 남은 목공소 두 곳 중 한곳이 유진목공소다. 이곳은 '전통창호'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목공소다. 2019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방한한 첫날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배경으로 선 만찬장 상춘재의 전통 문창살 99짝의 교체를 담당한 목공소가 유진목공소다. 4. 갤러리 유진목공소는 분야가 다른 세 사람이 운영한다. 반이정(1970) 디렉터 ● 공동대표: 미술평론가. 「중앙일보」 「시사IN」 「씨네21」 「한겨레21」 「한겨레」 「경향신문」등에 미술 칼럼과 시사 칼럼을 연재했다. 「교통방송」 「교육방송」 「KBS」 라디오에 미술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송은미술상 등의 미술상 심사위원과 많은 미술 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 선발 심사위원을 지냈다.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예술판독기』 『사물판독기』 외에 여러 책을 썼다. 유튜브 채널 '반이정의 예술판독기'를 운영하며, 네이버 파워블로거에 선정됐다. 이민재(1967) 매니저 ● 공동대표: 청운 중학교 과학 교사.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고 『현대미술의 이해』 『모마 포토그래피』같은 시각예술 전문서적과, 물리학자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 같은 과학서를 번역했다. 윤종현(1983) 공동대표 ●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5년여를 충무로 영화계에서 『얼굴 없는 미녀』 『효자동 이발사』『거울 속으로』등에 조명팀으로 참여했고, 그후 수행자가 되기 위해 해인사와 불국사에서 1년 반여 행자 생활을 하다가 하산했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아버지 목수 윤대오 사장과 유진목공소에서 목수로 일하면서 평생 미술 작가로 존재하길 꿈꾼다. 5. 갤러리 유진목공소가 기획하는 전시의 지향점은 왕성한 전성기를 누렸으나 어느덧 잊힌 듯한 중년작가를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일과, 진가를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미술가를 발견하고 소개하는 것이다. 갤러리의 지정학적 위치에 걸맞게 목공의 미학과 홍은동 목공거리의 역사를 주목하는 전시도 계획 중이다. ■

Vol.20200211f | 분홍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