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0_0204_화요일_06:00pm
참여작가 남민오_안근영_윤재일_정아사란_한솔_황선정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 CHOSUN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4(소격동 125번지) Tel. +82.(0)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영국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라도 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회계사 보조는 로마의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영국의 왕은 그럴 수 없다. 영국의 왕은 이미 왕이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것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김효정 역 (까치글방, 2012), 39.) ● 영국의 왕에게 로마의 황제가 되겠냐는 물음은 물속에서 달을 찾는 일과 다름없다. 이미 왕의 좌(座)를 얻은 자가 다른 왕의 좌를 얻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좌우지간 '왕'이라는 소명은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닌가. 로마의 황제와 영국의 왕은 각기 다른 독립적 주체성을 가질 뿐 아니라, 우열도 없다. 로마의 황제가 위대한가, 영국의 왕이 위대한가 하는 쓸데없고 어리석은 잣대를 들이대며 영국의 왕에게 로마의 황제를 꿈꾸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예술가에 빗대어 흥미로운 비유를 만들어보자.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는 예술가를 어떤 좌(座)로 이끌어주려는 것인가? ● 사실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에는 선행 과정이 있었다. 2018년에 기획했던 「부재중 전시」에서 참여 작가 6인 중 3인의 작가-안근영, 정아사란, 한솔-들은, '전시'를 예술의 매개체 중 하나의 형태로 간주하여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를 다시 전시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오늘날의 전시들이 출판, 상연, 렉쳐 등 다양하게 확장된 형태를 포함하면서 '전시장'의 범주화는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전시 제도를 비판하며 전시장을 탈출한 미술의 행태는 이미 수많은 선례들을 남겼으며, 새로운 시도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던'(「부재중 전시」(2018.11.20. - 11.24, 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의 서문에서 언급한 기획 의도의 일부분.) 이들의 「부재중 전시」는 텅 빈 공간을 담는 과감한 시도와 독창적인 형식을 제시했다. 그러나 '전시를 전시하는 전시'라는 이들의 패기 넘치는 실험은 그야말로 '빈(부재중인)' '전시'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한 반면, 그 공간적 개념의 협소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이 '전시를 전시'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정립했어야 할 과제는 곧 예술의 원칙들을 이해하려는 예술가 자신에게 돌아왔다. ●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는 이러한 과정의 환류가 낳은 새로운 질의의 발현으로서 좀 더 작가적 태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부재중 전시」가 전시의 구현에 관하여 가능한 사변(思辨)적 태도를 취하고자 했다면,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는 제도를 비판하고 형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실은 시각정보와 이미지가 소통되는 전시 공간 내에 생성된 관계들을 오직 자기 체계 내에서 정립한 작가적 입장을 표명한다. '예술가가 내적 경험과 감정을 선과 색채, 음향, 움직임, 혹은 언어에 의한 표현 형식에 의해서 다른 이에게도 그 감정을 전달하여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 활동이며 예술을 단지 쾌락의 수단이 아닌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그 예술적 인상을 받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상호교류 수단이라고 한다면'(톨스토이가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에서 서술한 민중 지향적 감염(感染) 예술론. 그는 '다른 이에게 창작자의 감정을 감염시키는 것'이 예술이며, '진정한 예술가'란 개인의 행복만이 아닌 사회 복지를 증진시키고 건전한 정신을 함양시키는 선구자로서의 예술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그 활동의 원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거나 상호작용하는 요소는 작가(예술가와 작품), 공간(갤러리 또는 미술관), 제도(지위와 교육), 그리고 비평이다. 이것들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대중과 사회에 안착한 예술의 미적 경험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이들의 '작가적 태도'는 이 요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술이라는 미명(美名) ● 1980년 10월 27일에 열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 2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에서는 예술가의 지위를 1. '한 사회에서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역할에 따르는 중요성을 기초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존중'이자, 2.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제 권리를 포함'하고, 3. '예술가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소득과 사회보장과 관계되는 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정'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예술가의 지위에 관하여 의문을 갖는 이유는, 이들이 권고하는 '사회적 권리'와 '사회 보장',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존중'을 현실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가, 또는 그러한 여건이 조성되는가 하는 문제를 여전히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남민오 작가의 「미술판」(2019)은 예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나 제도들이 촉발하는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예술가의 운명을 냉소적인 관점에서 시사한다. 보드게임의 형식을 취하여 플레이어(예술가)들의 치열하고 흥미로운 생존 경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제시한 이 작품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예술의 복합적인 요소들-작가, 비평가, 미술관, 제도, 교육 등-을 모두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지침'으로 간주한다. 이 '판'에서 예술가들은 사회적 운명 또는 개인적 운명의 상황에 놓인다. 사회적 운명이란 전쟁, 혁명, 경제 위기와 같이 외부로부터의 제약 조건을 가지며, 개인적 운명이란 죽음, 실수(실언과 같은), 건강, 탈(脫)미술과 같이 내부적으로 발생한 상황이다. 이러한 운명적 상황은 인물카드-가족, 아기의 탄생, 평론가 등-를 뽑으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예술가라 칭할 수 있는 창작의 주체"가 "경제적, 사회적, 신분적 제약 없이 사명감을 가지고 본연의 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와 교육기관은 이 '판'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떠한 실효성을 갖는가? 이 게임의 승자는 과연 위대한 예술가의 지위를 얻는가? 각기 다른 유형의 조건과 상황의 판 위에서 주사위를 던져 결정되는 예술가의 운명은 위대함으로 귀결되는가?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을 배제한다면, 「미술판」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변하지 않는, 굳건한 선입견들의 합집합일 것이다.
남민오 작가의 「미술판」이 예술가의 내∙외부를 둘러싼 다소 적나라한 예술'판'의 현실을 언급한다면, 그에 반해 정아사란 작가는 '예술가'라는 명명(命名)의 미명(美名)에 주목한다. 그는 신작 「Faith will save us」(2020)와 「I receive a revelation」(2020)에서 이 전시의 내러티브를 위해 가상의 위대한 예술가를 설정하였고, 위대함이라는 개념을 불특정 다수에 의한 믿음의 소산이라고 정의하면서, 위대함의 서사는 권력과 지위, 업적 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생성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작가가 그동안 다루어왔던 디지털, 비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한 작업 세계에 회로의 망망대해를 부유하는 이 '믿음'을 결합시켜 위대함의 서사를 순식간에 불안정한 서사로 탈바꿈시킨다. 디지털 좌표에 생성된 이미지와 시각적 콘텐츠는 수많은 '좋아요'와 함께 수많은 믿음을 생산한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믿음은 위대함을 탄생시키고 그 위대함은 다시금 욕망으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숭배의 비물질 세계를 은유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콘텐츠화한 예술가의 정체성(또는 그 이름)이 지닌 허상의 좌표를 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예술가라는 정체성의 내면을 고찰하는 작품들은 이 전시의 주제에 접근하는 관객들에게 또 다른 문을 열게 한다. 황선정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한 작품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고 그 판단을 유보하는 것으로 에포케(epoche)적 순간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이라고 언급한다. 「deep-dope-dare rhythme(epoche1)」(2019)에서 움직임에 따라 회전하는 소용돌이의 형상은 주체(subject)에 의한 시각적 경험이 다시 자기참조(self-reference)된 객체(object)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소멸하며, 그 소멸의 순간 비추어진 상(象)은 순수하게 자신과 자기참조의 관계를 대변한다. 또한 「Resonant imagery, folding screen (epoche2)」(2020)의 색면에 투사되어 겹겹이 쌓이는 이미지는 병풍 안에 자리한 신화적 존재의 형상을 비유하면서, 자기 자신의 기원이자 본질을 은유한다. 남민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Likely Shining Telescope」(2020)에서는 예술가로서의 개인적인 상황들-나의 좌표들, 나를 움직이는 것들, 개인적 지침들-을 부유하는 이미지들로 은유하여 망원경 형상의 틀 안에 투사한다. 혹은, 예술가의 작업은 무수히 많은 관계를 생성하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측면에서 주제를 해석한 작품도 있다. 윤재일 작가의 「위대한 작가들의 초상」(2020)은 예술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설정하고, 데이터 마이닝을 통해 작가의 이름과 텍스트를 추출하여 수없이 얽힌 관계망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추출된 데이터는 각각 하나씩의 노드를 가지며, 이 노드들이 얽혀 새로운 예술가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예술가의 얼굴을 형성하는 것은 기존의 예술가들로부터 얻어낸 데이터의 집합일 뿐이다. 작가는 예술계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데이터를 완전히 배제한 채,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오직 예술계 내의 관계망만을 설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안위하는 이 협소한 관계망 안에서 질적 상황은 발생하는가? 관계 안에서 상생의 순간은 존재하는가?
아름답게 제작해도 진부한 관념을 구제할 수는 없다 ● 안근영 작가는 예술작품의 규정을 예술가의 서명(signature)이라는 행위로 단정한다. 작가는 「익명의 서명」(2020)의 작품 구상 단계에서 세 가지 레퍼런스를 도입하려고 했다. 하나는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 '관념은 예술을 만드는 기계' (Sol LeWitt, "Paragraphs on Conceptual Art", Artforum, June 1967) 이며, 또 하나는 기원전 6세기부터 있어왔던 예술작품에의 서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공지능 프로젝트 「The Next Rembrandt」(마이크로소프트와 ING,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 공대, 렘브란트 미술관이 공동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젝트로, 18개월 동안 렘브란트의 작품 346점을 분석하여 생전의 렘브란트 화풍의 회화를 입체(3D) 프린터를 이용해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딥러닝 알고리즘 「The Next Rembrandt」에 의해 렘브란트를 완벽하게 재현한 작품이 렘브란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작품을 완벽하게 재현하더라도 작품의 고유성(originality)은 재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익명의 서명」이 개념미술이라는 예술의 한 형태를 다루면서 '개념미술의 개념'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감안하고 생각한다면, "관념은 예술을 만드는 기계다"라는 솔 르윗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면서 바로 그 '작품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서명에 의해 고유성 자체를 침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이해해볼 수 있다. 중세의 예술작품이나 오늘날의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의 손으로 온전히 제작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부유한 후원자에게 판매하기 위해 만드는 작품들의 많은 수가 공방 노동자들에게 제작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설령 "관념이 예술을 만드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아름답게 제작해도 진부한 관념을 구제할 수는 없다"는 솔 르윗의 태도는, 관념의 진부함이란 매체의 내재적 특성을 파악하고 이에 맞춰 작업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로버트 스토, 「친애하는 동료들에게」, 『Visual』11(2014): 18.) 즉, 「익명의 서명」은 컴퓨터가 그리는 행위를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공방 노동자들의 제작에, 관객의 서명을 예술가의 서명에 대입하여 관념의 진부함을 가지고도 작품의 고유성을 탄생시킬 수 있는 '예술가가 되는 방법'을 하나의 지침으로서 제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균열된 사변(speculative)의 틈 ● 이쯤에서 우리는 비평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은 매우 가변적이다. 예술의 시대적 역할을 묻는 비평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원칙들을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학적 수사로 작품의 관념과 매체를 지나치게 의식한다. 비평이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가정이란 사변적 유물론에 근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미적 경험을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분리시켜 순수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의 언어는 비평의 언어를 거치면서 다양하게 얽힌 관계망으로부터의 이탈(離脫)과 우연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한솔 작가의 「Y연대기-Archive Y」(2020)에서 우리는 어느 날부터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게 된 Y의 일대기를 세 명의 비평가를 통해 듣는다. 작가는 앞서 언급했던 예술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 중에서, '비평'의 힘에 주목했다.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예술적 가치 판단을 끌어내는 비평은 텍스트의 파급력 위에서 더욱 강력한 예술 전파의 역할을 수행하고, 매개체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Y연대기-Archive Y」의 가상의 작가 Y는 그의 생전 활동과 작품 세계, 그리고 사후까지도 예술가 자신이 아닌 오직 비평가의 언어-구술 언어(인터뷰)와 텍스트 언어(평론)-만으로 존재를 확립하였다.
예술가의 언어는 비평의 언어보다 감각적인 우회의 방식을 시각화하여 구현하는 능력을 지녔다. 6인의 작가들이 예술에 대한 사변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 그 틈에서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를 내놓기까지 서로가 나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 전시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가 참으로 궁금하다. 전시가 끝난 후 영국의 왕도 로마의 황제도 아닌 그들이 '위대한 지침서'를 들고 예술가의 좌(座)에 도달한 호기로운 경험담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임보람
Vol.20200204d | 예술가를 위한 위대한 지침서 Great Guide for artis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