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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코리아목욕탕 KOREA Bathhouse 서울 종로구 삼청로4길 12-1 여탕
The Fantasy From SOSAN ● 숨겨진 공간, 앞서 '홀씨의 공간'이었으며 '심해종(深海種)'이 유영하는 '깊은공간'이자 삶이라는 가장 큰 판타지가 시작되는 곳. 또한 소산의 판타지가 싹을 밀어 올리는 곳이자 어머니의 목소리로 아이들의 꿈을 부르는 공간. 소산이 그렇게 찾아든 곳은 심해였다. 세이렌의 노래와 이세상 저세상의 파편이 떠다니는 곳. "심해는 아직도 인간의 눈길이 닿지 않은 채 신비에 싸여 있고" (쥘 베른, 『해저2만리』, 中) 그곳에는 이야기의 씨를 뿌리고 다니는 그의 셔틀이 있었다. 셔틀은 해저의 평원과 산호의 숲을 오갔으며 이름 모를 살아있는 것들과 고래를 만났다. 그곳에 도달한 이들은 "이성이 아니라 신앙으로 고래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쥘 베른, 『해저2만리』, 中) 그들은 고래이자 곤(장자)처럼 보이는 그것들 앞에서 믿음의 방법을 강구하기 보단 함께 마주보고 살아나야할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를 상상하고 긍정했다. ● 소산은 "별이니 출발이니 여행이니 하는 데 대해서 매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생텍쥐베리, 『어린왕자』, 中) 이것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곰곰이 살아가는 중에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지구, 목성, 화성, 금성처럼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큰떠돌이별들 외에도 다른 떠돌이별이 수백 개가 있고" (생텍쥐베리, 『어린왕자』, 中) 다가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소산은 천천히 자신의 우주를 만들어갔다. 작가는 「요술지팡이」(2013)를 이용해 그곳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홀씨의 공간」(2013)을 가꾼다던지 「판도라 상자의 다른 이야기」(2017)를 열어보았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의 꼬리를 잡으며 「세이렌이 유혹한 우주선」(2017)을 타고 그곳을 돌아다니다 우주의 곳곳에서 여러 은하를 만났다. 소산을 실어 나르는 우주선이자 "그의 배는 영혼 자체" (쥘 베른, 『해저2만리』, 中)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닿는 곳에서 생명이, 이야기가 발화하길 바랐다.
지금까지 소산의 작업이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으로 특유의 결을 만들어왔다면 근래의 작업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해낸다. 적극적인 서술의 방법은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 뛰어든 곳은 숨겨진 공간이자 물의 공간인 「탕TANG」이다. 전시장으로 사용된 '코리아목욕탕(여탕)'은 현재의 목적이 '장소대여'라는 모호한 표현 뒤로 숨겨진 공간이다. 과거 숙박과 모임, 촬영공간 등으로 기능했지만 소산과의 이번 전시로 인해 새로운 쓸모(기능)를 찾게 됐다. 여전히 내부의 시설은 대중탕의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기에 작가의 작업과 공간의 사전적 이미지 조합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필자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소산은 공간에 대한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해석보다는 앞서 언급한대로 익살과 정념이라는 태도로서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곳은 물이차고 버려지길 반복했던 공간이자 현재 숨겨진 공간이었다. 인간이 닿지 않는 무정의 공간이었으며 때문에 소산에 의해 새로운 생태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빛을 바라보고 소리를 들으며 파편적인 정서의 순간적 변화를 기록해 내는 것이 작업의 과정이었다. 과거 소산의 작업이 자신의 행성들을 만들고 움직임을 부여해 그것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방법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야기를 찾아내고 드라마를 움직이는 직접적인 동인이 된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먼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끌어온 무늬이다. 이것을 조금 더 다가가 바라본다면 그가 이어온 선들이 보인다. 하나의 끝에서 또다른 처음으로, 타래처럼 얽히던 것들이 꽃잎이 되어 흐드러지듯. 그렇게 그가 이어온 선을 하나의 결이라고 한다면 소산은 결(理)에서 연(緣)을 찾고 있는 듯하다. 결이라는 것이 순간과 단편만을 일컫지는 않기에, 그곳에서부터 이곳에 이르는 시간을 다스리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살피는 일은 그의 결을 느끼는 일이 된다. 그의 결은 고요하지만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익살을 가졌고 목욕탕의 정중앙에서 넘쳐흐를 수 있는 정념도 갖추었다. 그의 익살은 수많은 이야기와 가상의 공간을 이끌어온 천진한 안내자의 모습에서 드러나고 정념은 흥분으로 분화하기도 고독 속으로 소멸해버리기도 하는 미완의 정서에 담겨있다. 결을 새기는 이러한 행적 동안 그가 찾고 또 살펴온 것은 연의 조각들이다. 그 연이 물속으로 흩어져 버리게 될지 살갗의 새로운 주름으로 남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결에 새로운 주름을 새겨가며 「심해종」(2019)들과의 연을 고백했다.
이번 전시 공간에서 가장 먼저 각인되는 것은 설치작인 「깊은공간」(2019)이다. 가라앉은 왕국의 파편이거나 바다 속 깊은 산맥의 어느 줄기처럼도 보이는 구조물은 목욕탕의 분위기와 생태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환유를 부르는 미디어이기 보다는 '깊은공간' 그 자체로 자리한다. 작가의 과거작 역시 그러했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상징이라기보다 각각의 우주이자 환상 자체로 존재했다. 이번전시에서 작가가 불러낸 '깊은공간'에는 「심해종」(2019)이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바닥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세이렌의 음성이 교차한다. 그곳에서만 살아있는 것들, 그곳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인연을 불러낸 것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복권을 이루어낸 세이렌이다. 세이렌은 더 이상 항해자들을 끌어들이는 요물이나 요조(妖鳥)가 아니라 뮤즈이자 탄생의 계시자가 되었다. 소산의 세이렌은 작가가 자신의 몸에 무늬를 그리고 공간을 겪어내는 중에 등장했다. 심해종으로 변신한 작가가 직접 소리를 냈고 자신이 찾아낸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더 절실하게 담았다. 때문에 퍼포먼스 영상과 사진으로 확인가능 한 작가의 몸에 새겨진 무늬들은 세이렌의 악보처럼도 보인다. 정확히 독해해내긴 힘들지만 작가가 체득해낸 조형에 음을 얹어 소리로 바꾸어낸 결과물이 '깊은공간'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노래는 세이렌의 노래도 무엇도 아닌 소산 자신의 노래가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심해종과의 연을 노래한 새로운 기록이 탄생한 것이다.
소산의 작업을 미술의 언어로 기록한다면 '움직이는 오브제의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선 그의 작업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보다 여전히 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합리적인 감각의 영역보다도 조금 더 넓은 시야를 염두에 둘 때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무용에서 유용으로,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실 소산의 주된 테마였다. 출품작 「깊은공간」(2019)을 이루는 나무의 일부는 과거 작가의 작업으로 변모했던 나무들의 나머지이다. 작가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은 파편들이 새로운 세계가 되고, 숨이 끊어져가던 공간이 새로운 이야기로 변주되었다. 마음의 장막을 걷고 날아오르면 곤이 대붕(大鵬)이 되듯 (장자, 「소요유」. 참조) 그의 이야기는 마음에 따라 무엇으로도 변한다. ● 하지만 각자의 삶에 따라 물아래는 다르게 보이고 몇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비슷한 패턴으로 정형화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방향 전환에 시간을 끌어 화를 돋우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카프카, 『변신』. 中) 체념보다도 삶이라는 가장 큰 판타지에 몸을 던지고 있다. 소산은 카오스(Chaos)의 공간이 아닌 그 안에서 다함께 살아나가는 조화(Cosmos)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조직을 양생해 나가듯 걸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환희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의 연장에서 본다면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결의 성질이 어느 사조적이거나 동양적이라는 감상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오래되어 보이는 결' 혹은 '고전적 판타지'라는 표현은 어떨까 싶다. 단숨의 유희를 좇아왔다기보다 세계의 곳곳에서 오래된 질서와 조화를 찾아온 자들이 선택해온 그런 행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산은 허구가 아닌 판타지로서 살아있는 것들과 만나가는 과정에 있다. 더욱 먼 곳에서 다양하게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심해를 유영하고 곳곳에 이르러 씨앗을 뿌리고 있다. ■ 이주희
OUR FANTASY ● 1970년 때는 아나로그(Analog)적인 면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일반적이였다. 나의 아버지는 건축 설계사이셨다. 그 덕에 푸른색 설계도면 프린트가 집안에 뭉텅이로 있었고, 그림 그리기 좋아했던, 어린 나에게 커다란 스케치북이 될 수가 있었다. 설계도면에는 바둑판처럼 정확한 치수가 촘촘하게 체크 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정해진 암호처럼 집안 구조 설계가 수치와 함께 그려져 있는 프린트였다. 그 수치는 공간의 넓이를 말하는지는 그때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놀았던, 푸른 잉크색 도면 프린트가 지금에 와서 매우 그리워진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생산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옛것이 된 아나로그 물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칸 안에 연필과 크레용, 물감으로 또 다른 나의 암호를 그려 넣어, 전혀 다른 세상의 이미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다. 더 확장시키기 위해 도면을 무시하는 드로잉을 크게 그리기도 하면서, 한 장 한 장들을 만들어 나아가기도 했었다. 그 때는 집안에 워낙, 많은 양이 쌓여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설계도면 프린트양이 매일 아빠가 보시고, 쌓아 놓으셨던, 신문지 양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다. ● 그 시절에는 신문지를 재활용하는 일이 많아 버리지 않고, 쌓아 보관 했던, 시절이 였다. 아빠는 설계이후로 건축공사장에도 데리고 다니셨다. 강원도 쪽에 아주 큰 콘도를 건축하셨는데, 주마다 갔을 정도로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지금도 강원도 쪽을 갈 때면, 4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콘도를 볼 수가 있고, 그때를 회상 할 수가 있어 좋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집들이 빽빽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빠는 주택과 빌라건축을 그때, 많이 하셨다. 골조부터 건물이 세워지고 인테리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이사하는 모습들과, 들어가서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사람들 거주의 이동을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을 걸쳐 그곳에서 살았었고, 그림도 시작했던 곳이다. CAD 작업으로 도면 설계를 하고, CNC로 잘라 낸 나무 조각마다 그림을 그려, 건축하듯 스틸에 부착해 조형성을 이루는 작업 형식이 어린 시절 설계도면을 접했던 나의 행적들과 아빠가 해 오신 일들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알아 차렸던 것 같다. 어릴 적 덮고 잤던 이불의 문양과 색감들이 인식하지 않아도 지금 작업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을 엄마의 말로 알게 되기도 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목화솜으로 이불을 엄마들의 손으로 만들어 졌었다. 공단 천과 무명천으로 앞, 뒤가 다르게 만들어 졌고, 원단의 이불이 원색적이면서 꽃그림들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보고 느꼈던 감수성들이 지금의 나를 창의적인 작업 활동에 크나큰 영양을 주었고, 동양적인 표현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졌다. ● 누구에게나 감수성을 가지게 하는 시절들이 있고, 그로인해 꿈이 만들어 진다고 본다. 꿈의 세계를 쉽게 공감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세대를 살았다면, 쉽게 공유 할 수 있다. 시대성이 보여 지는 감각과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종합예술의 복합성을 작업으로 보인다. '실재하는 허구'를 표현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사람들은 꿈에서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그 느낌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아니면, 자기가 경험 하고, 기억하는 것에 비롯한 작품을 통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관람객들과 내 작업이 만났을 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이 빛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졌던 것도 자신들의 기억과 환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작업은 기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표현의 폭을 넓게 갈수가 있었다. 회화적인 페인팅과 기계적인 설계가 어우지면서, 표현의 관계가 만들어 졌고, 상상 속 에서 벌어지는 실제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판타지(Our Fantasy)'이야기로 전개가 되어 진다. 상상의 표현과 기계와의 만남에서, 함께 하는 관계들을 각자의 감정놀이로 하나씩 나아 간다면, 판타지 영화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시각예술에서 보여 주는 함축적인 내용을 깊이 있게 볼 수 있겠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동양철학기반으로 도(道)를 실천의 원리가 바탕이 되어지는 것을 안다. 그로 인한 전통성을 체득과 실천으로 하는 학문의 진리를 배웠다. 이런 행적의 수련들을 비논리적으로 풀어서, 판타지가 탄생 할 수 있는 면모를 보이려 한다. 익숙한 전통적인 색감과 터치가 살아나면서, 현대적인 기계장치와 무의식의 꿈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인다. 두 가지이상의 만남을 오묘하게 '시대성'을 보여 줄 수 있는 판타지 표현방식을 현대미술로 '우리의 판타지(Our Fantasy)'로 보이려 한다. 시간과 공간의 익숙함과 영속성이 와해된 상태에서 새로운 공존에 대한 인식을 판타지라는 현대 미술작품으로 작업 방향을 세운다.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사유로 점철 되어 보인다 해도, 각자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처럼, 상상의 체험을 갈구 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강조 하면서 에술의 본질에도 마주 할 수 있는 창의적인 표현에 연구 하겠다. ● 작업매체로는 나무(Acrylic on Wood), 스테인레스, 알루미늄, 모터, LED, 아크릴 판넬, 그 외 오브젯(Found object)를 이용해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 그림을 조각을 내는 형식으로 조형적인 설치 작업를 보인다. 나무들을 조각을 내고 조각 하나하나에 그림을 그려, 스틸(steel)을 레이져 커팅과 용접을 이용해 틀을 만든다. 나무 조각들을 이용해 굴곡이 있는 형태를 만들어 각자의 움직임을 표현 하면서, 재조합되는 방식이다. RPM이 다른 모터(moter)를 이용해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하면서, 공간의 흐름의 방향을 다르게 한다. 입체적인 설계제작으로 근대 기술을 이용한 판타지(fantasy)가 연출되어지는 작업을 보인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에 대한 에피소드(Episode)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 하면서, 상상의 표현이 시각적 물성으로 보여 지게 한다. 나무 조각들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문장 단어들과 같다. 조각그림 언어로 단어를 연결 시켜 문장을 만드는 것과 같이 조각들을 연결 시켜 그림의 언어로 말을 하려 한다. ● 한국의 현 시대에는 짤 문화와 줄임 말이 언어로 생겨났다. 핵심적, 요약적, 타이틀 문구와 말을 짧게 줄여 소통하는 언어가 생겨났고, 흘러가는 뉴스와 이슈들이 넘쳐 나고 있다. 그림에서도 짤 예술이 생겼고, 성문화에서도 자극적인 짤 동영상들이 돌아다닌다. 그런 짤막한 문화적 흐름에서 토막을 내는 행위의 작업으로 나는 짜깁기 하듯, 나무를 토막 내고, 토막 낸 조각들을 연결시켜 덩어리로 만들고 형체를 이룬다. 표현하고자 하는 키워드가 판타지로 변모가 되어 질수 있게 형태나 색감으로 말하고자 한다. 언어의 문장과도 같은 조각의 연결고리가 그림의 언어로 되어지고, 언어들은 '창조적 상상'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페인팅에서는 섬세하고 반복적 페턴이 그려진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들이 무한반복으로 사용 하는 것과 같이 반복적인 그림에서 페턴화 되어지는 이유이다. 그 안에서도 꽃의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번식하고 변화하는 생명력에 바라 볼 수 있는 고마움을 가진다. 그들의 정적인 감수성을 내 작업에서 보여 질 수 있길 바란다. ■ 김소산
Vol.20191003j | 김소산展 / KIMSOSAN / 金召山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