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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상시가능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HOAM FACULTY HOUSE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 239-1번지 Tel. +82.(0)2.880.8589 www.hoam.ac.kr
非일상으로의…, 여행! ● 그리는 자, 안성규 ● 안성규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 가운데 사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 유화로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 바로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림에서 물러섰던 한 발을 자동적으로 그 그림을 향해 다시 내디딘다. ● 그에게는 그리려는 풍경을 포착하고, 선정하고, 그리는 정확한 '눈' 같은 '손'이 있다. 그린다는 행위에 얼마나 성실한 지 그의 작품을 보면 바로 읽힌다. 그의 그림에 대한 성실함에는 시간의 축적이 있고, 그 축적의 겹겹에는 외로움도 있다. 안성규의 이러한 작업 세계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지면서 관객들은 작가의 정서에 공감하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묻어둔 동일한 정서를 끌어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선물 같은 시간을 가지는 것 같다. ● 먼 옛날 사진기가 없던 시절, 그리는 것에 충실했던 화가들의 후예 답게 능숙한 '손'의 소유자로서 작품 곳곳에 자신감을 뽐내고 있는 것 같아 미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전통적인 회화를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 그런데, 최근의 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붓의 터치가 무심하다. 어떤 부분은 따로 떼어 확대해보면 추상화라고 해도 될 만큼 무심하고 때론 거칠게 물감을 올려 화면이 두텁다. ● 그림을 그리는 가장 오래 된 재료, 유화 물감을 사용하는 그는 성실하고 능숙하게 그림 그리는 자 답게 선택한 풍경 특히 하늘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색들을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게 채색한다. ● 빛과 그 빛을 반사하는 대상을 얼마나 많이 바라보면 그런 색을 빚어 낼 수 있을까?
첫 시선, 안성규의 하늘 ● 그의 작품에서 첫 시선이 머무는 곳은 역시 '하늘'이다. 아마도 마지막 시선을 거두는 곳도 '하늘'일 것이다. 또한 관객이 갤러리를 나서면서 자신의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에 보관하려는 대상도 그의 '하늘'일 것이다. ● 안성규의 1997년 첫 개인전부터 하늘의 흔적이 보인다, 회갈색의… 하늘이기 보다는 공기의 밀도가 높아 숨쉬기 곤란한 대기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 이후 좀 긴 공백 기간이 지난 후 2005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의 하늘은 아파트촌의 공허가 전이된 하늘, 도시의 우울이 번진 하늘 그리고 일어서다 현기증으로 어지러운 눈에 들어온 하늘에 자신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리려는 대상(사물 혹은 건물)을 시선 가까이에 둔 채, 하늘을 멀리 바라보던 그는 2006년 세 번째 전시부터 대상도 하늘도 멀리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관조하는 것 같은 화면 구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성규 특유의 화면 구도, 띠 모양의 얇은 도시 풍경과 화면을 다 삼켜버린 하늘을 비로서 만난 것이다. ● 그가 그리는 하늘의 시간은 다양했지만, 2013년부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하늘의 표정이 달라진다. 밝아졌고 공허함이 사라졌다. 도시의 분주한 소리도 대가족이 북적대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사 준비하는 시간처럼 따뜻하게 들린다. ● 그리고, 드디어 2019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하늘은 서늘하고 단순했다. 싸늘한 느낌이 아니고, 차가운 느낌도 아닌 우리의 감성을 심연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기분 좋은 서늘한 공기를,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채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풍경들 ● 마치 관객을 호객하는 것처럼, 관객을 그림으로 끌어당겨 그림과 관객 사이의 공간을 좁히고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키는 그의 작품 하단에 위치한 '미니어쳐' 같은 건물들과 도시들이 있다. ● 그는 갤러리를 마치 키가 6인치도 되지 않는 소인들이 사는 나라, '릴리퍼트'로 만들어버린다. 관객들은 소인국의 걸리버가 된 것 마냥 작은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며 숨어 있는 소인들을 찾는 것처럼 작은 건물의 창이며, 문이며, 나무들이며, 숲을 시선으로 헤집는다. ● 관객들은 익숙한 거리의 간판을 읽어가며 그 장소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여행에서 지나쳤던 파리, 이태리, 인도에서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화면에 자리잡은 단색의 블루에 화룡점정처럼 찍힌 달에 대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지막 시선이 멈추는 곳, 경계 ● 화가 안성규는 왜 '경계'라는 제목을 자신의 작품에 명명한 것일까? 그의 '경계'는 어떤 의미일까? ● 경계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혹은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이다. 즉, 사물이든 지역이든 사상이든 두 개로 가르고 구분하고 한계 짓는 것이 경계이다. 그런데 화가 안성규의 '경계'도 사전이 내린 정의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 하늘과 도시(건축물을 포함한), 자연과 인공, 과거와 현재 등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대비 혹은 대치하고 있는 두 성질의 것들이 그의 '경계'에서 만난다. 그의 경계는 가르는 '곳'이 아니라 만나는 '곳'이다. 한계 짓는 공간이 아니라 한계를 넘나들며 접촉하고 교류하고 변화가 생기는 아주 역동적인 그러나 작아서 숨겨진 공간이다. ● 그의 작품에서 읽히는 하늘과 도시의 시공간은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어 모호하다. 관객의 일부는 저녁 해가 지는 시간이라고 하고, 나머지는 새벽으로 읽는다. 헷갈린다. 낮인 것도 같고, 밤인 것도 같다. 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모두 실재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모호성 때문인지 화면의 구도 혹은 대상을 보는 각도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빛을 사용하는 화가 안성규의 선택 때문인지 동화 속 공간 같기도 하고, 게임 속 상상의 공간 같기도 하고, 과거의 잔상과 현재의 경험이 뒤섞여 스스로의 기억을 불신하게 만드는 몽환적 공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 그의 풍경은 대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그의 그림에 쉽게 이야기를 덧붙이게 되고 결국 화가 안성규 작품을 자신들의 기억과 추억으로 완성시킨다.
그리고, 화가 안성규는 여행을 한다. 일상을 벗어나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는 새로운 '경계'를 찾아서… ■ 이소연
Vol.20190816e | 안성규展 / AHNSUNGKYU / 安盛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