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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28 신관 1층 Tel. +82.(0)2.737.4679 www.gallerydos.com
기억의 시차적응 법 ● 시차증 (Jet lag)이란 급속한 장거리(동쪽-서쪽 또는 서쪽-동쪽) 여행으로 신체의 생물학적 주기의 리듬에 변화에서 발생 하는 생리적 혼돈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런던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행 하는 사람은 시간이 현지 시간 보다 4시간 일찍, 서울에서 뉴욕으로 여행 하는 사람이 현지 시간 보다 13시간 늦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 "기억을 시차적응 법"은 여행을 다녀와서 생물학적 주기에 리듬을 찾으려 애쓰는 상황을 뜻하는 시차적응에서 착안되었다. 중첩된 시간 속에서 뒤 섞여있는 기억을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 일반적으로 5살 전 후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달콤했던 사탕의 기억이나, 그네를 아버지와 함께 탄 기억일지 모른다. 하지만 더 어릴 적, 갓 난 아이였을 때가 기억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로 인하여 10살 이후의 기억이 첫 기억인 경우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이 모든 '기억'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고 생각한다. 실은 선형(線形)적 시간상의 가장 '첫'번째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기억은 현재에 소급된 순간, 마법처럼 끌려와서 현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 지금 이 순간, 기억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중첩 되어진다. 그렇기에 기억은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가 되는 중첩된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기억은 중첩된 시간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본인은 여러 실험을 통해 회화로 나타낸다. ■ 백요섭
삶에 대한 감각적 기억 (평론 일부 발췌) ● 안료와 빛의 시각적 연구 ● 백요섭은 일 년 정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만큼의 드로잉을 하였다. 이는 자신에 대한 연구이자, 기억의 시각화에 대한 연구였다. 일종의 실험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상황을 최대한 제한하여 동일한 상황을 만들고, 그 속에 변인으로 매일의 시간과 작가의 개인적 경험만이 들어간다. 그렇게 매일 겪게 되는 현실적 상황은 작가가 드로잉을 하는 순간 기억되고 시각화되며, 이미지화가 되면서 현실적인 '실재(réel)'가 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 어둠 속의 잠재된 과거가 현재에 빛나게 되면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마치 이름을 불러주어 아름다운 꽃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의 총체가 '물질'이라고 베르그송은 정의한다(Henri Bergson,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 관념론자들이 표상(representation)이라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로 실재 존재하는 물질이 바로 기억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물질은 그저 의식적으로 인식되는 것만이 아니다. 신체가 감각하고 정념으로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넘어선다. 백요섭이 표현한 화면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층적인 색감을 눈으로 지각함과 동시에 물감의 마티에르와 긁힌 자국 등으로 촉각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적 경험은 어쩌면 앵포르멜(Informel) 회화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유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백요섭의 작품에서는 개인적 감정의 분출이 아닌, 감각적 경험의 총체적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이기보다, 시간과 공간의 지속 사이에 있는 신체가 형성하는 물질, 즉 실재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우는 명상이나 혹은 트라우마의 표현이 아닌, 스스로를 드러내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 이는 「팔림세스트」 연작 이후 진행한 「안료와 빛의 시각적 연구」 연작에서 두드러진다. 전자의 작품들이 채도가 낮은 색 면과 마른 화면을 긁어서 생기는 흔적으로 단단한 표면을 갖고 차분한 분위기였다면, 후자는 보다 다양한 색과 질감을 갖고 있다. 이는 작가가 드로잉 연구를 병행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로, 역사적 시간성이 아닌 작가의 개별적이고도 찰나적인 경험과 감각을 담고 있다.
「팔림세스트」 이후 기억의 경험을 추상화한 작업을 해왔지만, 백요섭의 초기 작품들은 여러 형상들이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서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형상을 통하여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경험과 메시지가 한정된다는 한계를 느꼈다. 이에 백요섭은 재현적 형상을 과감히 제외시키고, 형상을 구성하는 조형적 요소들만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어 조형적 요소들은 더 근본적인 물질성으로 대체되었다. 근작에서 백요섭은 연필로 표면을 긁거나, 단단한 물체로 강하게 긁어내어 마띠에르가 강한 회화 표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방식들은 시각적이고도 촉각적인 감각을 환기시킨다. 그 결과 무엇보다 '회화적'이다. ● 캔버스 위에 쌓인 여러 겹의 물감과 화가가 남긴 행위의 흔적은 이 작품의 회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회화성은 주변에서 숱하게 경험하게 되는 인공적인 감각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디지털 화면의 감각은 그저 빛의 파동이기에 물질적이지 않다. 반면 물질적인 것은 실재의 시간과 공간에 살면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보다 인간의 감각에 가깝다. 백요섭의 작품은 후자에 해당하며, 인간의 근본적인 신체적 감각을 깨운다. 가장 회화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감각적 요소들이 담겨있고, 이를 통하여 우리 역시 잊고 있던 신체적 감각을 깨달을 수 있다.
삶과 생을 감각할 수 있는 회화 ●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드러남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작가만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읽는 데에 길잡이가 된다. 흔적의 명증함이 가치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작품을 차별성을 논하는 데에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차별성을 갖는 예술작품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도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팔림세스트」 이후 현재까지 백요섭의 작업들은 그러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언뜻 한국 단색화나 미국의 그래피티 아트와 비교를 해볼 수 있겠지만, 추상이라는 광범위한 공통점이 있을 뿐, 백요섭이 접근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작업의 원천이 인간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각과 기억이기 때문이다. 명상이라든지 자유롭게 인간의 행위를 풀어 헤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작가는 자신이 느낀 여러 감각을 중첩하여 표현하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작품마다 미묘하게 다른 색감과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치 프루스트의 주인공이 한 잔의 찻잔에 자신의 기억을 환기하듯, 백요섭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볼 수 있다. 녹색이 가득한 화면에서는 가족과 함께 한 캠핑의 즐거움이 떠오를 수 있고, 붉은 화면이 가득한 화면에서는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때의 뿌듯함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녹음이 우거진 풀과 나무의 냄새, 바람, 아이들의 웃음소리, 맛있는 음식 등이, 밀리는 차의 붉은 등과 애잔한 발라드 음악이 들리고,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상쇄하듯 붉게 피어오르는 저녁놀을 볼 때의 안도감 등이 백요섭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용돌이처럼 밀려올 것이다. ● 그렇기에 비록 구체적인 형상이 없어도, 백요섭의 작품은 우리와 감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형상이 있는 작업보다 더 구체적이다. 작업을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구체적인 감각을 담은 작품이며, 보는 이에게도 자신의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숨을 고르고 가만히 들여다보자, 작가가 만들어낸 물감의 요철에서, 긁은 흔적에서, 물감의 중첩을 들여다보면, 편안한 음악도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나의 기억처럼 말이다. ■ 허나영
Vol.20190605a | 백요섭展 / BAEKJOSEPH / 白耀攝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