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8_1214_금요일_02:00pm
참여작가 강지영_공은택_김다빈_김소연_김재인_김충훈 김한규_박현철_유수진_이정운_이철은_이한별 이훈상_임정은_정아사란_정성진_조경훈_최혜림
주최 /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소과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성신여자대학교 수정관 가온갤러리 SUNGSHIN WOMEN'S UNIVERSITY_GAON GALLERY 서울 성북구 보문로34다길 2(동선동 3가 249-1번지) Tel. +82.(0)2.920.7264 www.sungshin.ac.kr
'작은 집단' 『반:班』, 나누어 모은 색깔 있는 발언들 ● 1. 예술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수익과 무관한 예술은 점점 그 존재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예술이 돈만 밝힌다면 시대를 번역하고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포박하는 공공재로써의 역할 대신 가벼운 '시장소비재'의 하나로 대우받게 된다. ● 그러나 불행히도 예술은 이미 시장소비재로 전락한지 오래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예술의 자본종속화는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진열대 상품처럼 예쁘게 봐달라며 옹알거리는 경박하고 조악한 것들이 미술인 냥 포장된 채 넘쳐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즉, 더 이상 시대정신의 표출로써의 예술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 혹은 '상품'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들이 지천이라는 것이다. ●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어딘가에는 예술가로써 자존감을 지키며 작업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취미와 취향에 자신의 예술을 봉헌하지 않는 예술가들, 데미안 허스트나 무라카미 다카시를 폄훼할 이유는 없지만, 그들의 세련된 비즈니스를 동시대미술의 정의인 냥 착각하지 않는 예비 작가들도 있다. '작은 집단'이란 뜻을 지닌 『반:班』도 그 중 하나이다. ● 『반:班』은 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와 공공미술전공의 대학원 재학생들의 구성된 전시이다. 필자에게 전달된 정보에는 "18명의 작가들은 서로의 연구결과물을 발표하고 고민을 공유하고자 전시를 기획하였다."고 적혀 있다.(그래서 나눌 반(班)자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 실제로 전시에 앞서 마주한 이들의 작업은 취향공동체에 읍소하기 급급한 양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술가의 가난이 저급한 시장루트를 개척하는 알리바이로까지 작동하는 세태와도 근접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작업세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게 설치되었고, 작가로서 더 발전할 수 있는 전시로 기획되었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례로 조각, 설치 등을 통해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변태의 과정을 '시간의 중첩'으로 작업화 하는 박현철이나, 2013년 이후 회화 중심에서 탈피해 동시대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정성진, '비정상적 사회 매뉴얼에 대한 탐구'로 자신의 예술을 규정하고 있는 강지영의 작품들은 동시대미술의 흐름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성장」(2016)과 「정지적 발육기」(2016-2018) 등을 포함해 『반:班』 전에 출품된 오브제 작업 등은 박현철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성진의 경우는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원이 아니다」(2018)를 비롯해 「재구축된 세계-기하학적 도상」(2018) 등을 눈여겨볼 만하다.
2. 『반:班』 전에 등장한 일부 작품들은 상당부분 오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배적 의식의 결을 느끼게 한다. 앞서 말한 '시대를 번역하고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포박하는 공공재로써의 역할'에 무게가 있다는 것이다. ● 발언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공은택은 공동체와 개인, 실존과 현존, 진리와 타자성에 관한 화두를 공간과 시간의 경계 및 현실과 가상의 사이를 환영적 이미지로 담아냈다. 미디어아트 「THERE」(2018), 「Who is standing here」(2018), 「There is nothing here」(2018) 등은 주목받을 만한 작업이다. 비록 메시지보단 시각의존도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흐름이 엿보이지만, 장르 및 분야의 제약을 걷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틈을 가려주지 못하는 약한 표면에 대해 이야기'라는 다소 평범한 주제를 강렬한 여운으로 재구성한 이정운의 「옷장」(2016)이나 「Finate Body」(2018), 「경계」(2018) 등은 드러남보다 감춰진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작업이다. 그 중에서도 『반:班』 전에 선보인 이정운의 파라핀 작업은 '약한 표면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 단순한 어법으로 소화했다.
친절한 각주 같던 과거와 달리 최근엔 「2018.05.16.」(2018)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배제된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임정은의 작품들은 인형이 가진 보편적 편견과 인식성을 떨쳐내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다소 멜랑콜리한 것이 사실이고 주술적인 여백도 없지 않으나, 박제된 형태의 작품들은 특유의 이미지를 유발한다. ● 강지영의 오브제 작업인 「Uniform wall」(2018), 비디오아트 「Watering Cactus」(2018), 설치작품 「Purifying System」(결국 담기지 못한 것들)(2017) 등은 사회적 의제로써의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적이다. 동시대 청년들의 심리성, 관계성을 획일성의 상징인 유니폼 등을 통해 그려내고, 일그러진 구조 아래 살아가는 포스트 아프레게르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선 '세월호 사건'을 통해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의 행태와 무능한 권력에 대한 불신을 표상화한 김다빈의 작업 또한 세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껍데기와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내 작품 속에서 빛과 그 빛이 비춰지는 마이크나 확성기와 같은 오브제의 그림자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고 적었다. "마이크나 확성기에 비추어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전달하고 싶은 것만 전달하는 언론의 정치적인 모습을 은유한다."고 설명한다. ● 나아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마이크와 공간의 구석에 매달려 허공을 향하게끔 설치된 확성기는 그림자로 표현된 허구적인 지지대와 함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만 전달하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고 덧붙인다. ● 낙하는 모래 사이를 뚫고 알 듯 모를 듯 흘러나오는 라디오 설치작업은 그야말로 실상에 녹아 있는 '허구의 구조'와 맞닿는다. 어디선 본 듯한 방식은 아쉽지만 김다빈의 여러 작품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예술이 사회와 문화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자문이다. 이 자문 하나가 평이한 전개방식을 무너뜨린다.
예술의 사회적 책무를 고려할 때 『반:班』 전에 선보인 작업 중 눈에 띄는 작업은 또 있다. 도시와 구조, 현실과 비현실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영상 「트르먼쇼」(2018)와 사진 「scene ####」(2018) 등의 작품으로 인간 정서에 침투하는 환경을 타자의 시선으로 적시한, 그러나 주체성에 관한 밀도까지 덧댄 최혜림의 작업이다. 겉보기엔 영상과 사진, 휘발성 강한 퍼포먼스이지만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다층적 함의를 제공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특히 다원적 관점에서의 작업 방향은 긍정적이다.
주거의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를 조형화한 이한별의 「정연적 삶」(2016) 연작 역시 흥미롭다. 『반:班』 전에 출품한 그의 거대한 케이블 작업은 물론, 「mother」(2015), 「L씨」(2016), 「자화상」(2017) 등의 오브제 작업은 통신케이블 설치 일을 할 때 발견한 사물의 성격과 기능, 본인의 경험을 예술과 일상의 매개이자 투영체로 삼은 작업이라는 점에서 꽤나 현실적이다. 가급적 장소성까지 염두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상과 예술의 틈을 메우고 시대적 사안을 고찰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동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 삶이라는 것에 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측면에선 유수진의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작업 중 방치된 교각에 버려진 천들로 만들어진 큰 천을 설치한 작품은 공공미술 혹은 장소 특정적인데, 「가려진 시간」(2018) 시리즈와 「서산 활성동」(2018), 「바느질 놀이」(2018)와 같이 변화하는 시공으로의 침투라는 실천력과 「용두동」, 「아현동」 연작처럼 주제의 시의성이 배어 있다. 이는 "쉽게 잊히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본인으로서, 과거에 경험했던 공간이나 사물이 느리게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고 과거사용의 흔적을 찾게 된다."라는 작가의 발언에서 보다 명징해진다.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처럼 그의 작업 역시 우리의 속도를 그리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미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한다. 그러나 「Disappeared n appeared」(2018)처럼 매체에 대한 폭넓은 수용 역시 작품에 호의를 덧대게 하는 원인이다.
사회적 의제로서의 미술에 자연과 환경, 생태문제가 빠질 수 없다. 동물과 식물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을 즐기며 평등하게 인간과 공존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이훈상은 환경과 생태계,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 혹은 고민에 대해 다룬다. ● 그에 따르면 우린 인간이 야기하는 재앙을 인식해야 한다. 비참한 삶에 대해 염려하고 자연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코뿔소, 닭, 하마 등의 다양한 동물을 등장시킨다. 이는 "작은 변화의 시작으로 사람은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에 따른다. 뜻도 좋고 인식력 높은 작품형식도 나쁘진 않다. 다만 지금 작업보다는 조금 더 러프해도 된다.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자체에 대한 고민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어지면 어떨까 싶은 판단은 든다.
김재인 또한 사회의 문제점이나 이슈를 작업의 중요한 틀로 삼는다. 여기에 작가 자신의 불완전한 상황도 맞물린다. 그래서인지 고정된 의지라는 뜻을 지닌 「확지(確志)」(2015)는 다소 허약하고 연약한 느낌을 전달한다. 반면 「고뇌」(2016) 연작은 형상과 묘사 면에서 노골적이면서 거친 감정을 드러낸다. 「막」(2018)에서마냥 이때도 작고 붉은 인형이 몸뚱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 너무 설명적이라는 부담이 있고, 「Self-list」(2016)에 이르면 아예 전면에 부각되어 게임 속 캐릭터처럼 다가온다. 허나 「단비」(2017)라는 제목의 작업에선 와해되는 여운을 심어주다가, 「Door」(2018)에서는 다시 특유의 거칠고 투박하며 그로테스크한 작업으로 환원된다. ● 김재인 작업의 특징은 이와 같은 불완전함, 갈지자를 그리는 심리적 상황에 있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안착하지 못하지만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제 길을 찾으려는 불완전한 양면성이 작품의 성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도 "예측 불가능한 형태들이 마치 현 사회와 나의 불안정한 모습과 닮아있다."고 고백한다.
3. 예술이란 본래 나로부터의 발화이나, 몇몇 작가들은 개인적 서사에 보다 집중한다. 사적 내러티브를 '감정의 공유'로 전이시킨 김소연의 「수면」(2018), 「포화」(2018), 「Island」(2017) 시리즈는 의식과 무의식의 간극, 기억과 재생이라는 정신적 상황을 설탕이라는 재료로 표현한다. 가벼운 열에도 녹아버리는 설탕은 생성과 소멸, 기억과 망각이라는 작가의 감정을 투영하기에 적절한 재료이다.
정아사란의 작품은 동시대성에 적합한 조형언어를 보여준다. 자신의 미시적인 흔적을 좇는 것, 다시 말해 추적이고 기록이라고 정리하고 있으나,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부분은 매체에 대한 제한 없는 수용이다. 모니터, 노트북, 주명, 수조, 스피커, PVC필름, 프로젝터, 스마트폰까지 그의 작업에는 사용 가능한 모든 것이 재료화 된다. 설치, 미디어에 이르는 분야 간 구분도 없다. 여기엔 실시간 인터랙티브도 포함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속성을 지닌 매체를 예술에 저극 도입하려는 의지와 시도야말로 변별력을 가중시킨다. ● 이와 같은 태도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으로, 글로벌적 흐름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동시대성에 부합한다. 미술의 언어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에 가담하고 내용 역시 자신을 넘어 확장되는 상황을 견지한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매체시대에 우리가 위치한 곳이 어디인가를 자문한다지만, 그 배경엔 소통과 공유를 중심으로 추억과 기억을 재생하고 노스텔지어적 향수를 자극하며 관객들의 감성을 소환한다는 것이 배어 있다. 그것이 정아사란이 말하는 '환기'의 일부다.
빅터조의 작업도 나와 일상에서 비롯된다. 주된 형상은 그가 예전에 기르던 개 '바우'이다. 개를 잃어버린 후의 슬픔과 그리움을 캐릭터화 된 오늘의 '바우' 시리즈로 이어가고 있다. 형상은 개의 모습이지만 기뻐하고 슬퍼하며, 울고 웃고 일하고 즐기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인화된 개라는 점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렇기에 때론 해석의 맛을 저하시키는 측면도 없진 않다. 모든 예술이 죄다 진지할 필요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이철은의 작업은 인상, 기억, 감정을 다룬다. 형식은 전통조각의 범주에 놓인다. 조각의 물성에 충실하고 노동력이 강조된다. 묵묵히 조각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태도는 신뢰할 만하다. 반면 「지우다」(2014)라든가, 「애상-슬픈 생각」(2013), 「만추」(2013) 등에선 살롱조각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토끼와 거북이」(2018)처럼 뚱딴지같은 작품이 생경하게 돌출하듯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쩌면 톡톡 튀는 그러한 변주가 이철은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남다른 지점인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경우에든 시류에 휩쓸리는 경향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탁월한 미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면 동물도 그다지 환영할 만한 소제는 아니다.
4. 이상 18명의 작업을 모두 훑어보았다. 지면 사정상 더는 길게 작성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만큼 각각의 작업들은 고전적 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상업성에 연계된 마인드와 장식에 준하는 예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은 상기할 만하다. 이는 성신여자대학원 조소과의 교육방향과 동시대미술의 흐름이 어느 정도는 매치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 특히 학과 전반에 부유하는 예술개념, 즉 오늘날의 미술은 그것이 예술작품일 수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거나 미술 자체의 존재이유와 방식에 관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질 뿐, 유사한 형태를 생산해 내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의 고지는 예술가의 삶과 격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없이 사는 건 동일하나, 그래도 과거엔 품위가 있었고 격과 기품을 목숨처럼 지켰다. 만든 것을 팔아도 팔기 위해 만들진 않았다. 예술가에 대한 세인의 존중은 그런 태도에서 나왔다. 허나 예술이 상품화되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점차 가벼워지고 있다. 가난에 절은 고학력백수로 인식하는 대한민국에서 예술가가 언제 한번이라도 변변한 사회적 지위와 대우받은 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예술가 스스로 자존감을 내려놓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 때문에 『반:班』은 자본이 미술의 정의와 질서까지 부여하고, 시장의 가치가 곧 미술의 가치로까지 인정받는 시대에서 특별한 시각을 갖게 한다. 비엔날레와 아트페어가, 미술관과 상업갤러리가 서로 베끼며 탈고유성을 합리화하는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진단이 맞는다면 경계를 읊조리는 것 또한 진부함이지만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한 경주는 눈여겨볼 만하다. ● 더구나 살아서의 제프 쿤스가 되고 싶을지언정 죽어서의 박수근은 원하지 않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삶의 수단일 뿐 삶의 전부는 아니게 된 작금에서, 경력 좀 쌓은 이들조차 인테리어업자와 예술가, 장사치와 작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물론 아직은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게 없지는 않다. 의도와 표상은 일치하지 않거나 서투르다. 깊은 철학과 미적 고찰에 관한 연구가 수반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작업도 있다. 기표와 기의 엇박자를 엿보게도 한다. 허나 예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그 엇박자를 맞춰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각한 결과를 세상에 투영하는 일이다. 이는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이다. 따라서 각인되어야할 건 오늘의 흐름이 오랜 시간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담장을 넘어 필드에서도. ■ 홍경한
Vol.20181214f | 반:班-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 대학원 단체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