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형태

도녹스展 / DONOX / photography.installation   2018_1118 ▶ 2018_1229

도녹스_다른 기억_한지, 철사, 우레탄폼에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18

작가와의 대화 / 2018_1117_토요일_07: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수_예약관람 / 목~일_상시관람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제주 제주시 거로남6길 13 Tel. +82.(0)64.755.2018 culturespaceyang.com

이것은 자화상이다. ● 「기억의 형태」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작가는 부정했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의 형태」는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기억이 나를 장악하는 모습, 혹은 기억들이 흘러넘쳐 내 얼굴을 가리고, 나의 풍경마저 바꿔 놓은,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지는 낯선 풍경들. 그것은 작가의 자화상이고, 우리의 자화상이다. 기억은 우리에게 너무나 꽉 붙어 있어서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은 더욱 과감하게 우리의 형태를, 우리를 재구성한다.

도녹스_다른 기억_한지, 철사, 우레탄폼에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18

우리는 기억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때론 개인의 사소한 기억들을, 때론 커다란 역사의 순간들에 대해서 우리는 소리 높여 말한다. 또 한 편으로 우리는 이제 '기억'이 '그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기억은 망각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안다'.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우리는 쉽게 착각에 빠진다. 또 왜곡된 기억들은 다시 우리 주변으로 돌아와 우리의 기억들과 섞인다. 기억은 항상 움직이고, 늘 변화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운동, 그 운동의 중심에 우린 서 있다. 그리고 도녹스는 「기억의 형태」를 통해 이 기억의 기묘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도녹스_33.509803, 126.563411_피그먼트 프린트_43×65cm_2018

도녹스는 또한 '기억의 혼란함'에 대해서, '기억의 통제 불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 도녹스는 그가 한때 살았던 장소에 대한 괴로운 기억들이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계속 그 장소에 자신을 붙잡아 둔다고 했다. 그곳의 도녹스는 여전히 힘들게 살고 있고, 그 사실을 아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은 그 사실에 또 한 번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작가는 기억의 기괴한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에 대해서 고백한다.

도녹스_33.509129, 126.565020_피그먼트 프린트_65×43cm_2018

「기억의 형태」는 기억의 내용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을,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느냐 보다도, '기억이 있다'라는 그 사실 자체(이를 기억이 형태 혹은 기억의 존재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주목한다. 도녹스는 기억의 형태,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너무나 커다랗고 무거워서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그 기억의 형태에 대해서 말한다. 기억이 흘러넘쳐 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상황, 아니 어쩌면 형태가 없는 나에게 형태를 부여해주는 상황, 그것이 도녹스의 「기억의 형태」가 자화상인 이유이다. ● 도녹스는 고삐 풀린 기억에 대해서, 나로부터 출발했지만 이미 나를 벗어나, 언제나 동시성으로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고삐 풀린 기억이다. 기억은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그것이 바로 나의 상황이고, 우리의 상황이다. 고삐 풀린 기억들이 켜켜이 쌓이고, 내 주변을 온통 그 강렬함으로 점유한다. 기억은 공간과 나를, 점유한다.

도녹스_33.509178, 126.561850_피그먼트 프린트_43×65cm_2018

「기억의 형태」 전시는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14개의 디지털 프린트와 1개의 설치 작업이 그것이다. ● 14개의 사진 속에서 도녹스는 얼굴이 뻥 뚫린 채 강렬한 색채를 가진 이상한 형태들에 둘러싸여 있다. 때론 초록색으로 또 때로는 빨강색으로 둘러싸인 인물이 거로마을이라 적혀있는 버스 정류장에, 헌 옷 수거함 옆에, 공사장의 한 가운데에, 쓰레기 더미 아래에, 돌담길에 서 있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다만 그의 몸의 형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강렬한 기억의 덩어리들에 가려져,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 흘러넘친, 뛰쳐나온 기억들이, 그를,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장소들을 바꾼다. 흘러나온 기억의 덩어리들은 나를 가리고, 내 눈을 가리고, 내 얼굴을 가리고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흘러넘친다. 이것은 기억의 탐욕스러움이다. 나를 집어삼킨 기억의 무지막지함 앞에 나는, 기억의 뒤쪽에 숨어 버리거나 사라져 버린다. 14개의 사진 이미지는 이러한 사태를 합성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도녹스_33.506476, 126.567388_피그먼트 프린트_43×65cm_2018

「기억의 형태」의 사진 이미지들은, 일종의 합성이다. 합성이란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룸"(네이버 국어사전 펌)을 의미한다. 방법론적으로 도녹스를 합성의 방식을 채택하는데,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작업은 '합성'의 방식을 보여준다. 두 가지 이상의 성질이 기묘하게 함께하는 그런 풍경 말이다. 이미지 속에는 화려한 색깔의 기억 덩어리들이, 작가의 몸에, 얼굴에 붙어 있다. 기묘한 동거처럼, 마치 몸속에서 주체하지 못하고, 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처럼, 기억의 덩어리들은 작가의 몸속에서 뛰쳐나와, 그의 주변 풍경까지 바꿔 놓는다. 이것은 정말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어떤 경험, 기억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동일한 장소를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된다. 그래서 장소가 기억과 얽히는 순간, 그 장소는 이제 상대적인 공간이 된다. 이 지점을 장소가, (개인의)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녹스_33.509798, 126.560681_피그먼트 프린트_65×43cm_2018

그런데 도녹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기에게서 뛰쳐나간 그 기억의 덩어리들을 우리 눈앞에 물리적 실체로서 드러낸다. 그는 설치가 꼭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변형된 기억이 외부로,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도녹스에게 설치는 기억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탐욕스럽고 무지막지한 기억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조치'였다.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그러다 흘러넘쳐 버린 기억의 덩어리들을 그저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들을 물리적으로 나의 '밖'으로 꺼내 놓는 것, 그것은 기억에 대한 나의 '행동'이다. 예전 자신이 살았던 곳에서 독자적으로 살아있는 나를, 그 모습을 우리에게서 꺼내 보여주는 것, 그것은 내가 기억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적극적인 조치인지도 모른다.

도녹스_33.509174, 126.558876_피그먼트 프린트_43×65cm_2018

문화공간 양도 실은, 기억의 덩어리들을 가득 가진 공간이다. 한때는 양씨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던 이곳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하나둘 그들의 흔적을 남긴다. 흔적들이 쌓이고, 또 다른 기억들이 쌓인다. ● 오래된 집은, 문화 공간 양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전시 공간이다. 그곳은 전시 공간 이전에, 양씨 가문의 오래된 집이었다. 거기에는 벗겨진 벽지들이, 오래된 얼룩이, 눅진히 눌어붙은 먼지들이, 언젠가는 집을 따스하게 해 주었을, 그 따스한 기억을 갖고 있을 고장 난 보일러 스위치가 있다. 때문에 이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물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기억 덩어리이다. ● 그리고 드라마틱한(극적인?) 풍경이 문화공간 양의 '오래된 집'에서 벌어진다. 이는 기억과 기억이 어떻게 만나고, 기억이 어떻게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혹은 같이 자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녹스_33.505850, 126.567755_피그먼트 프린트_43×65cm_2018

도녹스는 오래된 집 안에 '기억의 덩어리'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알록달록한 덩어리들이, 오래된 집의 구석구석 부지런히도 붙어 있다. 과장된 형태와 색을 가진 그 덩어리들은, 무채색에 가까운 오래된 집과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아니 단지 잘 어울린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도녹스의 기억의 덩어리들은, 우리가 그 오래된 집에 갖고 있는 오래된 기억들, 그 흔적들에 더 주목하게 만든다. 기억 옆에 기억이 있다. 기억에 기억이 매달려 있다. ● 도녹스의 기억의 덩어리들은 마치 그 오래된 집이 드디어, 자신들의 기억들을(어쩌면 이는 집단기억 혹은 역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게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뱉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 그래서 오래된 집 안에 도녹스의 설치는, 도녹스의 기억이기도 하고 그 오래된 집이 가진 기억의 형태이기도 하다. 또 기억과 기억이 만나는 풍경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집단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만나는 지점, 기억의 내용과 기억의 형태가 만나는 풍경.

도녹스_33.509287, 126.562017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8

「기억의 형태」는 자화상이다.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억의 덩어리들이 잔뜩 붙어 있는, 도녹스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알 필요가 없다, 이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도녹스의 기억의 덩어리들이 오래된 집이라는 집단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설치) 풍경은, 집단 기억(역사)과 개인의 역사가 어떻게 서로 같이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 비록 도녹스의 설치가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의 양씨 집안사람들이 오랫동안 살던 곳에서, 그 기억들과 어울려져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그것이 제주도라는, 여전히 망각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 ■ 정남

Vol.20181118k | 도녹스展 / DONOX / photography.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