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연계 세미나 / 2018_1116_금요일_02:00pm~06:00pm
김우조, 백태호의 작품세계와 1950년대 대구화단의 흐름
참여작가 김우조_백태호_강우문_김수명_김종복_김준식_김창락 민경식_류시원_박광호_박득순_박명조_박성환_박인채 박항섭_배명학_백락종_변종하_서동균_서동진_서병기 서석규_서진달_손일봉_신석필_오석구_이경희_이복_이상범 장석수_전선택_정규_정점식_주경_추연근_최영림_한묵_함대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구문화예술회관 DAEGU ARTS CENTER 대구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Tel. +82.(0)53.606.6114 artcenter.daegu.go.kr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최현묵)은 「김우조, 백태호 그리고 격동기의 예술가」라는 제목으로 격동기 좌절을 경험한 두 작가와 1950년대 전후(前後) 대구화단을 조명한다. 전시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서진달을 사사한 김우조(1923-2010), 백태호(1923-1988) 선생의 화가로서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그 시대를 둘러싼 격동기 예술가를 조명하는 전시로 총 4부로 구성된다. 11월 9일부터 12월 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미술관 1~10실에서 열린다. ● 이번 전시는 식민지시기를 지나 해방기 이념대립과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간 작가들의 자취를 더듬어 그 시대와 작품세계를 조명하고자 마련된 전시이다. 먼저 김우조, 백태호 선생은 태평양 전쟁, 해방공간의 좌우이념대립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좌절과 고통을 경험한 세대로서 김우조, 백태호 선생의 유작 전시에서는 그들의 생애와 작품에 나타난 시각을 조명한다. 또한 "격동기 예술가"의 첫 번째 주제로 해방전 당대 화단의 엘리트 서진달 선생(1908-1947)의 교육에 자극되어 화가가 된 계성학교에서 탄생한 5명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두 번째로는 1950년대 전쟁기 우정과 열정으로 예술을 지킨 화단의 예술가들과 전쟁이 남긴 격동기 예술의 모습을 조명해 본다. 격동기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형성된 1950년대의 강렬하고 풍부한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김우조(1923-2010)-목판화와 함께한 삶과 예술 ● 김우조 선생은 1923년 8월 14일 경북 달성군 옥포면에서 전통적인 한학자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이신 김진옥(金振玉)과 부친 김창수씨는 모두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분들로 전한다. 화원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는 대구 공립중학이 아닌 계성학교로 진학했다. 이 결정으로 당시 5년제 중등과정인 계성학교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한 서진달선생과 조우하게 되었다. 서진달의 천거로 미술반에 가입하고 그의 지도로 1941년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졸업 후 1943년 청도군 송서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 해방 후 1946년 잠시 대구소년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이후 1988년 정년퇴임 때까지 교직에 봉사했다. 교사로서 학습현장에서는 물론이고 교안이나 교재개발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작가로서 창작활동도 이어가며 중등학교 미술 교사들의 화단활동을 조직하고 성실하게 참여했다. 6.25 전쟁 중에 결성된 대구화우회의 창립회원이었고 뒤에 황토회와 나상회 등의 동인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동을 견인했다. 작품은 드로잉과 수채화 유화는 물론 특히 목판화 분야의 작업에 몰두해 집중적인 제작을 했고 큰 성과를 냈다. 전 장르에 걸쳐 다량의 습작들과 함께 많은 양의 완성도 높은 판화 수준작들을 남겼다. ● 정년퇴직 후 대구 봉덕동에서 '의정미술원'을 운영하며 교육연수원 및 대구대학교 등에 판화과목을 맡아 출강했다. 생애 마지막 20여 년 동안 거의 작업에만 전념해 다양한 주제로 목판화의 표현가능성을 심화시키는 한편 새로운 기법의 응용을 통해 폭넓은 실험을 진행했다. 방대한 양의 미 발표작을 남겨두고 2010년 12월 31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부인 김달자 여사와 슬하에 사남매를 두었다. ● 선생이 거둔 예술적 성과들은 2003년 대백갤러리 초대전과 2009년 '대구의 근대미술전' 등을 통해 일부 조명되었다. 이후 해방 및 6.25 시기를 겪으며 홀로 개척한 판화분야의 업적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특히 목판화작업의 작품성에서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 활동 기간의 대부분을 목판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와 양식을 섭렵했으며 일생 미술교육과 판화보급에 힘썼는데 각 시기별로 제작된 많은 유작들을 통해서 앞으로 더욱 심도 있는 연구 및 평가 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영동
백태호(1923~1988) - 죽음으로부터 생명 ● 계성학교에서 서진달을 사사한 청년 백태호는 1943년 동경으로 건너가 가와바다 미술학교의 예비과정을 거쳐 동경예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징집으로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와야 했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였던 걸로 보인다. 그는 1946년부터 2년여 재직한 대륜고등학교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학생 동맹에 연루되어 학교를 나와야 했고, 1948년부터 한국전쟁 발발기까지 부상상업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그의 스승 서진달이 했던 것처럼 많은 제자를 양성했지만 1950년 부산에서 연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붉은 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으면서 화가로서 자유로운 의지는 좌절되었다. 이 시기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손에 불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삽화 등에는 고통 받는 이의 현실이나 고뇌하는 청년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후 그의 활동은 화단과는 거리가 둔 채 두드러진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고, 평범함 속에 자신을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 예술을 위해 형 백락종을 비롯해 나재수, 김우조, 민영식 등 가까운 이들과 함께 "황토회"(1959년 창립)가 거의 유일한 모임이었다. ● 초기 작품이 없어진 연유로 현재 그가 남긴 작품은 초기 작품 수점과 1970년대와 198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전시에서는 이 작품들을 작가의 이상과 변화하는 심경을 따라 3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주제「세잔느와 색채」에서는 백태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정물이며 초기 작품에서 세잔느풍의 아카데믹한 표현의 작품을 전시한다. 특히 1970년대 초중반 꽃, 과일 등 선명한 색채의 소재가 자주 나타나고, 때로는 사물의 색채와 관계없이 분홍, 파랑, 초록, 빨강 등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배경색으로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두 번째 주제 「죽은 사물」에서는 1970년대 초중반, 토우(土偶), 고화(枯花), 고기(古器), 폐선(廢船), 낡은 구두, 석류, 모과, 돌, 조개껍질 등의 소재의 정물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물들은 작가의 심리적 상태를 대변하거나 좌절된 작가 자신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주제는 「건어와 명태」로 말년의 명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한다. 작가는 197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이 마비되었고, 드로잉 습작을 하면서 재활에 노력하였다. 1980년대 이전에도 자주 다루었던 건어 정물은 작가가 또다시 시련을 겪은 후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좌절과 고통에서 승화된 「소리치는 명태」, 「날아오르는 명태」등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품으로 변화해 갔다.
격동기의 예술가Ⅰ- 서진달과 계성학교 제자들 ● 「격동기의 예술가 1」에서는 해방 전후 미술교육자로 1940년대 작가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진달과 계성학교 제자들을 살펴본다. 한국 근대화와 함께 일제강점기 서양화 형식이 도입된 이래 한 세대가 지나서야 예술 교육을 받은 교육자가 나타났고 이들을 통해 다시 예술가가 태어나게 되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인 서병규의 손자로 태어난 서진달(1908-1947)은 1930년 부산 동래보고(현 동래고등학교) 재학시절 부산거주 일본화가인 이치이 다메지로(市井爲次郞)로부터 서양그림을 배웠고, 1931년 제10회 선전부터 1942년까지 7차례 입선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동경예술학교 고바야시 만고(小林萬吾.1870~1947) 문하에서 수학했다. 1941년 계성학교와 인천소화여학교, 1942년 하얼빈 공과대학에서 미술을 지도했고, 해방 후 부산에 정착하여 1945년에서 1947년까지 용두산 공원 아래 중앙성당 인근에서 '서진달 미술연구소'를 운영하며 부산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나 1947년 결핵에 걸려 대구로 돌아와 동산병원에서 사망했다. ● 서진달은 계성학교에 1941년부터 1942년 2월까지 짧은 기간 재직하였지만 당시 제자들을 크게 자극한 스승이었다. 서진달은 동경예술학교를 나와 정규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후 대구에서 제자를 양성한 거의 첫 세대 미술 교육자로 그의 재직 기간 중 계성학교 미술부에는 김우조, 백태호, 추연근, 김창락, 변종하, 서복섭, 이서우, 김동철 등이 참가하였다. 김우조는 스승의 가르침과 화법을 자신의 작업의 기초로 삼는 등 서진달의 교육은 제자들의 예술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 한국 화단을 수놓은 백태호, 김우조, 변종하, 김창락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 특히 그는 그의 제자들이 진로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고, 작고 시까지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졌다. 서진달은 백태호가 그를 따라 미술공부를 하고 동경예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그의 부모를 설득하였다. 김우조에게는 친구 추연근을 그린 작품 「책을 읽는 소년」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하도록 하여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길을 열어주었다. 변종하는 1942년 일본군 해군하사관 후보생으로 뽑히자 만주로 피신하였는데, 서진달의 추천으로 만주신경시립미술원(新京市立美術院) 서양학과에 편입하였다 한다. 김창락은 신명여중 재직 중인 1947년에 그의 병고와 죽음을 곁에서 지킨 제자 중 하나이고, 1947년 말경 서진달의 유작전을 개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격동기의 예술가Ⅱ- 전쟁을 극복한 화가들 ● 1950년대 대구 화단은 전쟁을 피해 이동한 월남, 피란 예술가들과 이들과의 대구화단 작가들과의 교류와 자극으로 왕성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1951년과 1955년 사이 피란 온 허백련(1951년), 이상범(1952년), 박성환(1952년), 함대정(1953년), 이중섭(1955년) 등은 개인전을 열어 전쟁으로 고단한 사람들에게 예술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었고, 다수의 월남, 피란 작가들은 대구의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풍부했던 1950년대 화단의 흔적을 남겼다. 대구 화단에서는 서동진, 주경을 중심으로 대구의 향토작가와 일부 피난 작가들을 망라한 "대구화우회" (1952-1954)가 만들어졌고, 1951년 전쟁의 와중에도 백락종, 박인채 등은 『유화 7인전』을 열어 대구 작가들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1950년 주경이 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대구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미공보원 또는 미문화원)에서는 1950년대 대구의 중요한 예술 활동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예술의 장이자 세계의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을 기록하고 군인과 시민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 결성된 종군 화가단의 활동 역시 전쟁기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 되었고, 전쟁 중에도 피난지에서 예술을 지킨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 또한 1950년대 대구의 화단은 다음 세대로의 교체시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꽃피운 1920년대와 1930년대 대구의 근대화 초기의 결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시대 현대미술운동이 활발했던 시기 사이의 간극을 잇는 시기이다. 다음 세대로 이행과정에서 단체 활동으로는 장석수, 정점식 등이 가담한 "대구미술가협회"가 1955년 창립되었고, 대구미술가협회에서 나온 정점식이 세력을 규합한 "경북미술협회"가 1957년 창립되었고, 1959년에는 백락종 등 가까운 동인으로 구성된 "황토회"가 창립되었다. 대구화단에서 열린 개인전으로는 1951년 추연근, 1953년 변종하, 박동현, 이정구, 강우문, 정점식, 1954년 강우문, 정점식, 장석수, 1956년 강홍철, 백락종, 서세옥, 1957년 정준용, 배명학, 1959년 김구림, 이경희 등의 활동이 있었다. ● 이 시기 신석필, 전선택, 강우문, 이복, 서석규 등은 자연주의 화풍에서 탈피한 확장된 구상 화풍을 보여주었고, 정점식, 장석수 박광호 등이 대구에서 추상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동시대 전후 세계 미술의 흐름이 화단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박광호는 초현실주의 사조에 영향 받았고, 1950년대 중반이후 앵포르멜 등의 사조는 장석수는 물론 1959년 개인전을 개최한 김구림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63년에 이르러서는 당대 신진 이영륭과 김구림 등의 주창으로 "앙그리"가 창립되면서 다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 박민영
Vol.20181118i | 김우조, 백태호 그리고 격동기의 예술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