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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109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터테인 스테이지 ARTERTAIN stag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717-14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그리고, 그려지고, 지우고, 지워지는 ● 가치는,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치는 오직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조작될 수도 있는 막연한 사회적 관계의 한 단면일 뿐이다. 엄청난 오류와 잘못된 판단으로 결정된 가치에 현혹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사회적 신뢰의 노예가 된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삶의 가치를 짐작하는 기준으로 만들게 된다. 과연,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는 말 그대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흔한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듯이 살게 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치주의 인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것 자체의 가치. 는 잊은 채, 어디서 어떻게, 누가 만들어 놓은 지도 모르는 가치가 오히려 내 삶을 다 지배해 버리는 상황들. 견디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윤주일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를 늘 부정한다. 누가, 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그에게는 한 없이 의문스럽다. 도자 작업에서부터 시작해 다양한 재료들로 조형성을 실험해 온 작가는 재료가 가지는 물질성,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에서부터 과연, 우리가 느끼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원초적인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학습 효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닌다. 따라서 작가는 그것이 재료가 되었든, 아니면 조형성 그 자체든 작가의 의도적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결국, 도자 작업에서 불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작가의 뼈 속 깊이 침투해 있는 불에 대한 신뢰처럼, 재료 자체의 효과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왔던 것 같다. 허나, 그는 아름다움의 단서가 될 만한 여러 가지 요소와 방법들을 찾기는 했으나… 그 끝은 늘 너무 허무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를 찾고자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무엇인지 모를 원인에 의해 그려지고 있음을 깨달은 듯 하다.
그의 그리기는 이미, 아름다움의 기준, 그 순수하지 못한 가치의 기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리기 보다는 그려지는 것. 내 의지와 내 기술로 대상을 재현하기 보다는, 나를 유지하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는 그런 드로잉. 일종의 자동기술과 같은, 무의식의 시각화를 위해 철저하게 의식적 행위를 배제한 드로잉. 윤주일은 그렇게 일단,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화면을 채운다기 보다는 검은색 흑연으로 오히려 하얀 종이를 지운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미 채워진 것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것도 없었던 것들을 한번 더 지우는 행위. 어려운 말이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해보고 싶다. ● 우리의 정신은 가장 이상적인 것들을 쫓는다. 즉, 완벽한 대칭이나 균형 혹은 조화를 선으로 가정하고, 그렇지 않는 것들을 악으로 가정하여 나름의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선한 것들로 습관적으로 인식된 것들로부터 우리의 정신은 안정과 편안함을 찾게 된다. 아주 익숙한 것들로부터. 그렇게 정해져 버린, 선은 늘 우리에게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익숙해진 것들과는 달리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보고 느끼는 순간부터 우리의 정신은 불안하고 불편해 진다. 우선, 윤주일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그린다. 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조형언어들은 수없이 많은 작가들에 의해 검증을 통했고, 그렇기에 그 조형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함을 떨칠 수가 없다. 마치, 믿고 맡기는 보험처럼. 그런 의미로, 작가는 더 이상 그리면서 까지 누구에게나 다 익숙한 것들을 그릴 수 는 없었을 것 같다. 살짝 불편하고, 어딘가 모르게 낯선 것들이 작가에게는 오히려 더 매력적일 수 도 있었을 것 같다.
실험음악이라고, 정말이지 단 일초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소음보다 더 소음을 만드는 연주회에 갔었던 적이 있다. 연주자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듣고 있는 화음은 역사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화음으로 고증되어왔고, 그것들의 변주를 통해 음악은 우리에게 편안하고,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 줄 정도의 예술로 발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화음으로 쓰이지 못한 소리와 음계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실험적인 작곡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라, 아무도 그 소리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 실험을 이해하고자 참고 들어봤다. 왈칵 졸음이 쏟아질 만큼, 편안하게 감상이 될 수 있는 음악이었다. ● 윤주일의 드로잉 역시,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간절한 확인 작업이다. 이미 검증된 아름다운 시각 언어에서 살짝 벗어난 형태들을 무의식적으로 조합한 흔적들. 그리기 보다는 그려지는 것들을 즐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이미지들의 다양한 의미를 찾는 작업. 지우려 하기 보다는 지워지는 것들에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그리는 것 자체의 원초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임대식
Vol.20181112e | 윤주일展 / YOONJOOYIL / 尹周一 / 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