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풍경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   2018_1105 ▶ 2018_1117 / 일요일 휴관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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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작 홈페이지_www.bahkgyeongjak.com

초대일시 / 2018_1105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포월스 GALLERY 4WALLS 서울 강남구 논현동 248-7번지 임피리얼팰리스 호텔 1층 Tel. +82.(0)2.545.8571 www.gallery4walls.com

태초의 나의 시간은 나의 마지막 시간박경작의 회화세계 ● 박경작의 회화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시가 있다. 대시인 T.S. 엘리엇(T. S. Elliot)이 자신의 세계관을 가장 잘 응축시킨 「이스트코커(East Coker)」가 그것이다. ●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 집들은 끝없이 들어서다 없어진다. 그것은 모이고 넓어지다 제거되고 없어지며 다시 재건된다. 그들의 장소는 열린 장(場)이거나 공장이거나 아니면 우회로(迂廻路)이다.1)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8

엘리엇은 이 시에서 과학기술이 집도해서 생긴 자연과 시간의 불일치에 대해서 노래한다. 시인은 신성(the divine)이 결여된 장(field)에서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고도의 시어로 압축하여 피력한다. 세계를 이끄는 리더들은 과학적 믿음으로 가치를 판별하며 모든 것을 정치 · 경제적 관점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신성에 의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엘리엇은 기존의 서구인들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서구인들은 전통적으로 외재적 초월론을 믿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 저 너머에 신성이 있다. 우리 동양인들은 반대로 내재적 초월론을 견지해왔다. 신성은 우리 내면에 깃든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인도인의 아트만(atman)이나 중국인의 성(性)이 대표적이며 우리나라의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렇다. 우리 내면에 깃든 신성을 발견하고, 발견된(dis-covered) 내면이 인도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 도리였다. 우리가 말하는 도리[道]는 서구인이 말하는 구원과 같은 말이다. 엘리엇은 내면에 깃든 신성으로 세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일생 동안 관철시킨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8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계산되는 연대기적 직선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로 소용돌이처럼 연결되어있다. 과거는 나의 현재 쪽으로 흐르며 미래는 나의 현재 쪽으로 밀려온다. 그래서 나의 현재는 소용돌이쳐서 융기하는 산맥을 연상시키면 된다. 더군다나 누구나 신성을 부여 받고 산다. 신성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시작과 끝은 하나다. 삶의 매 순간이 분명한 목적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은 순간의 의미가 되고 항구적이고 더욱 의미 깊은 지평은 끝없이 열리게 된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80×116cm_2018

박경작 작가 역시 평원을 그리고 구름을 그린다. 어째서 그러한 화면을 선택했을까? 시인의 말대로 집들이 들어서고 다시 없어질 것이다. 누군가 사회법을 입안하고 정책을 기안하는 리더들이 세계를 설계할 것이다. 없어지고 다시 생기다 모든 것이 끝내는 없어질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과학적이다. 진화론적 관점을 지니고 물질적(materialistic)이다. 진화론적이고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에 약점이 있다. 진화론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는 현재의 모든 것, 현존하는 현상이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믿는다. 현재 짜여있는 질서보다 더 나은 조건은 달리 없다고 본다. 안주적이다. 구원을 믿지 못한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에서 한걸음 물러가 사태를 관찰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8

우리가 박경작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발견(發見)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짚어야 한다. 발견은 단순히 보는 것과 다르다. 발견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포대기를 들추는 것이다. 그래서 디스-커버(dis-cover)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싸는 포대기 속에서 산다. 포대기 속에서 사람들은 안락하다. 편안하다. 그리고 안주한다. 급기야 믿는다. 그런데 포대기가 들춰지면 추위에 떨게 되어 고통스럽다. 포대기나 이불이 들추어지는 순간이 바로 발견의 시간이다. 무언가가 발견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안했던 가치는 수정되어야 한다. 가치가 바뀌면 새로운 포대기와 이불이 필요하다. 새로운 이불은 새로운 언어이다. 인간은 뿌리가 있어 고정된 식물이 아니다. 인간에게 뿌리란 없다. (rootless) 따라서 새로운 이불과 새로운 언어를 찾으러 이동할 수 있다. 마땅히 이동해야만 한다. 박경작 작가는 이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 새로운 언어를 찾으러 가는 영원한 게임 속에서 박경작 회화세계의 진면목이 태어난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8

박경작의 회화는 누구나 보듯 검은 색조(black tone)의 풍경화다. 서구 전통에서 풍경화는 숭고(sublime)를 드러내거나 자연의 풍요로움을 암시하기도 했고 빛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되기도 했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든지 보고 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경작 작가의 회화는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풍경을 사생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첨삭해서 그린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을 화면에 재구성해낸 것이다. 작가는 어째서 그토록 검은 색조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인가?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8

세계는 크게 상(常)의 세계와 변(變)의 세계로 나뉜다. 상은 언제나 그러한(constant) 세계이고 변은 변화하는(changeable) 세계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시간은 상수로 느껴진다. 변화하는 세계는 인과성(causality)에 의해서 움직인다. 언제나 그러한 상의 세계는 변화하는 자연의 인과세계가 아니다. 스스로 도리를 지키는 의지의 세계다. 따라서 마이푸(馬一浮)는 말한다. "늘 그러한 상의 세계를 마음에 품은 채 변화[變]를 만나면 외물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완벽하게 도리를 소유하게 된다. [持常以遇變, 不累於物, 而有以自全其道矣.]"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60×72cm_2018

수만 가지의 법칙으로 오묘하게 변화하는 대자연에서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은 나의 마음밖에 없다. 나의 의지밖에 없다. 작가는 사물에 동요되는 사람들의 변화하는 마음의 부질없음을 표현해낸 것이다. 구름이 뭉게뭉게 지어있고 어둡게 짓눌린 대지와 집들은 시간이 정지된 것 같다. 이는 작가의 마음이 고요하게 멈추었음을 뜻한다.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세계는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천변만화로 변화하는 하늘을 올려보고 대지를 내려다보면서 이 위대한 움직임을 작동시키는 원리를 생각한다. 그 원리는 언제나 그러한 상(常)의 세계다. 누군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불사주야(不舍晝夜)로 언제나 그러한 원리를 생각했듯이, 작가도 뭉게뭉게 흐르는 구름과 시간을 따라 변화하는 대지를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만드는 원리를 마음 속으로부터 떠올린 것이다. 상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 세계 속에서 바야흐로 펼쳐지는, 가사세계(可思世界)를 향한 작가의 직관을 표현한 것이 이번 검은 풍경 시리즈의 요체이다. 따라서 작가의 풍경은 단순히 숭고의 찬미도 아니고 아름다움의 대상도 아니다.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나타낸 것이다. 천변만화하고 천태만상한 현상계 너머의 변하지 않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마음은 제행이 무상하다는 무상관(無常觀)과 대척점을 이룬다. 작가의 세계는 견고하며 의젓하고 강인하다. 그렇기에 시작도 끝도, 태초의 시간도 마지막 시간도 두렵지 않다. 작가는 말한다. ● "내가 믿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인생이 고되더라도 누구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 어디쯤에 놓여있다. 그것을 위한 방법론(methodology)으로 나는 회화를 추구해왔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8

진리는 아름다운 대상도 아니고 거창한 수식의 방정식도 아니다. 인간이 쌓아온 경험 전체가 진리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작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변화무쌍한 우리 경험의 너머에 변하지 않는 의지의, 가사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경험을 넘는 경험을 그리는 것이 박경작 작가가 추구하는 그림의 영역임을 우리는 기억해두자. 나는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의 작가 세계를 상상해보며 나의 상상이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강인하고 견고하되 누구나 즐기면서도 감동 받을 수 있는 회화가 출현할 것이라는 상상이다. ■ 이진명

* 주석 1) T. S. Elliot, East Coker, "In my beginning is my end. In succession houses rise and fall, crumble, are extended, Are removed, destroyed, or in their place is an open field, or factory, or a by-pass."

Vol.20181105a |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