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흐르는 강

정희욱展 / JEONGHUIUK / 鄭熙旭 / sculpture   2018_1017 ▶ 2019_0317 / 월요일 휴관

정희욱_무제(4개의 얼굴)_상주석, 오브제_20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예술가의 상상과 함께하는 .(닷)자갈마당의 별(別) 이야기展

기획,주최 / 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Dot Jagalmadang ArtSpace 대구시 중구 북성로3길 68-5 Tel. +82.(0)53.421.0037 www.djdrcf.or.kr blog.naver.com/jagalmadang_art

정희욱.자갈마당의 별☆ 이야기 ●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는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성매매 집결지역(속칭, '자갈마당')의 중심부에서부터 예술을 통한 변화變化를 실험하는 시작점(.)의 상징이며, 또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를 거치며 '성장成長'이라는 지속적인 기대를 받아온 도시가 봉착한 머뭇거림에 대하여 또 다른 '재생再生'을 고안하려는 미술 장치이다. ● 이 곳, 자갈마당은 100년 이상의 삶과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다. 1909년 공창으로서 최초 영업을 시작하였고, 해방 이후 6.25전쟁 기간은 연합군의 위안소로, 이후 1960년대부터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던 시기까지 특별 관리구역으로 존재해왔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자갈마당은 인권과 생존, 주거환경 개선, 정치와 경제적 이익 등 복잡한 삶의 문제들이 얽혀있는 상태이며, 최근 자갈마당 폐쇄 발표 이후에는 이 지역 도시재생의 방향이라는 첨예의 숙제宿題를 안고 있다. 우리는 이 곳 '자갈마당'을 어떻게 기억하고 변화시켜야할지를 질문하는, 100년의 삶이 담긴 장소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버리기 전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창조적 기억의 원림園林으로서 '.자갈마당'을 기록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희욱_무제(전사)_마천석, 오천석_151×41×29cm_2012

첫 번째 별 이야기, '기억정원 .자갈마당'(2017.10.18 ~ 2018.3.18)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별 이야기, '뮌&이명호.자갈마당'과'김주연.자갈마당'(2018.4.25 ~ 2018.9.16)에 이은 세 번째 전시, 1층의 '정희욱.자갈마당'과 2층의 '장준석.자갈마당'은 어떻게, 원치 않는 문화적 유산을 미래를 위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여, 특정 장소의 일상을 낯선 지각으로 발견하려는 뜻밖의 개입intervention을 통하여 지역과 도시 전체의 변화를 배양하려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창조적 기억과 상상력에 주목한다. 이는 폐업한 과거 성매매 업소 공간에 예술작업으로 개입하는 물리적인 문제와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 환경들에 대하여 예술가의 시선이 어떻게 개입하고, 그 장소 특정적 해석 속에서 예술가의 생각과 기억, 신체행위, 그 결과적 흔적이 어떠한 설계로 시각화되느냐의 지점이다. 이렇게 이번 전시는 참여 예술가의 별☆別 이야기와 행위를 기억하는 원림으로서 '.자갈마당'을 그리고 있다. ● 황폐한 땅이나 척박한 도시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며 점차 주변을 감싸 안고 치유하는 식물 본연의 특별한 능력은 변화와 생명에 관한 자연의 경외로 해석될 수 있고, 이번 .자갈마당의 전시 역시, 그 식물의 능력을 차용한다. 식물을 닮은 예술의 기억들을 채집하고 펼쳐 보이면서, 도시 한가운데에서 숲과 산이 이어진 산맥의 태도를 떠올리는 것, '.자갈마당展'은 거대한 산맥을 도심의 폐쇄된 건물 안으로 그려내면서 이 장소를 다시 창조적으로 기억하고, 결국 우리 본연의 자신을 만나려는 기대를 담아낸다. ● 세 번째 거대한 산맥과 같은 참여 예술가의 상상과 설계의 질문은 이렇다. 첫째,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여 정체된 도시의 중심지역, 이곳이 깊은 숨을 내쉴 수 있는 원림으로서 치유의 예술공간이 될 수 있을까? 둘째, '.자갈마당'이 원시와 현대, 자연과 도시문명, 음과 양이 결속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예술적 유기체로서 지속할 수 있을까? 셋째, 탐사하듯 거닐듯, 건물 내부의 공간 곳곳에서 참여 예술가의 태도와 신체행위를 발견하고, 이를 미래의 기억으로 껴안을 수 있을까? 넷째, 변화의 기대로서 '.자갈마당'이 확산되어, 동네주민들이 자율自律하는 식물적 생태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섯째, 결국에는 동네와 지역이 서서히 치유되고 변화, 성장하여, 그 기록과 보존을 공공公共으로 현실화하는 미술 장치로 지지받을 수 있을까? 등이다. ● 산, 바위, 강의 생태를 살고 있는 식물성의 태도로서, 이곳 장소의 기억과 치유와 성장을 나누려는 정희욱의 설계는 다음과 같다.

정희욱_무제_알루미늄, 흑연_19×17×8cm_2017

'거꾸로 흐르는 강'에 관한 정희욱의 설계 ● 정희욱 작가에게 이번 전시를 제안하면서 거대한 산맥의 태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북에서 남으로가 아니라 거꾸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 회야강回夜江을 말했다. 그는 회야강의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회야강은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坪山洞 천성산千聖山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덕계천德溪川을 지나 북쪽 방향의 회야댐으로 거꾸로 흐르는 강이다. 그가 말한 '거꾸로 흐르는 강'은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돌을 다루는 자신의 조각 작업에 대하여 시대를 거스르는 것만 같다며 스스로 한 말이지만, 그 속뜻은 거대한 강의 흐름에 합류되듯이 서로 비슷해지고 이미 익숙해져버려 독자성을 분별하기 어려운 동시대 미술의 경향들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태도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이번 전시의 취지에 관하여, 특수한 장소성과 오랜 동안의 기억을 지닌 이곳에서 시도하는 변화의 방향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경제와 정치적인 이유에서의 큰 흐름에 종속되지 않고 조금은 다른 독자적인 변화 가능성을 지향하는 태도라는 사실에 공감한다는 의미의 언어이기도 했다. 즉, '거꾸로 흐르는 강'은 정희욱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적美的 형상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創造 활동을 예술 행위라고 할 때, 그 창조 행위는 기존 혹은 다른 것과의 차이差異로부터 가능하고, 차이는 정체성Identity의 담론에서,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태도'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도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이끄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왜 이 작업을 하는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나?'등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검열식의 질문들에 대한 스스로의 해설과 신념의 설계 과정들로 이해된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이 '태도' 자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정희욱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태도를 '거꾸로 흐르는 강'이라는 언어로 표상하고, 이 곳 장소의 현재와 미래 정체성에 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욱_무제_분홍화강석_76×47×16cm_1994

정희욱이 선보이는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1층의 설계는 자신을 닮은'거꾸로 흐르는 강'의 가시적 공감과 또 다른 성장을 기대하며, 우리 자신들을 기억하고 치유하려는 태도이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74x126x76cm, 67x130x74cm, 80x100x75cm, 64x116x82cm 크기의 큼직한 돌들이 줄지어 놓인 사태事態와 만날 수 있다. 채석용 천공 구멍이 겉 표면에 듬성듬성 노출될 정도로 거칠고 뭉툭하게 쳐서 깎은 상주석 덩어리, 미완성처럼도 보이는 4개의 투구 쓴 얼굴 조각은 생명성 있는 것들과의 교감적 태도에 관해 새롭게 구성한 현재적 풍경처럼 보이는데, 이는 모든 존재의 다른 생명성 혹은 돌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와의 교감을 주목해왔던 정희욱이 특수한 장소성을 지닌 이곳 자갈마당 현장과 만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다루어왔던 석조 작업으로부터 또 다른 지층의 확장적 성장을 실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풍경을 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존재하도록 기여해온 과거 먼 선조들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며, 또 이 얼굴들은 작가의 작업실 주변 야외에 조각해놓은 4개의 거대한 인물석상 몸체 위에 올려져있었던 것인데, 이번 전시를 위해 몸체로부터 분리하여 이곳으로 옮겨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설치된 작품의 한쪽 옆에는 돌을 옮길 때 사용하는 파이프나 묶어놓았던 끈들을 그대로 남겨서 전시한 덕분에, 옮겨서 놓은 순간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큰 산맥을 상상하며 이번 전시를 제안했던 나로서는, 이 돌들이 마치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큰 산 근처나 경주의 남산 위에 있었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이곳으로 굴러와 자리를 잡은 것처럼 상상되기도 한다. 또 거꾸로 흐르는 강을 따라 휩쓸려온 돌덩어리 같기도 하고, 작가가 지난 2007년 12월 12일, 오래전에 연귀산連龜山의 언저리였던 대구 봉산동 봉산문화회관 광장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처럼 설정하여 설치했던 4톤 무게 180×72×205㎝ 크기 석조각 '투사의 갑옷'에 있었어야 할 머리가 이곳으로 굴러 떨어져온 것은 아닌가하고 제멋대로 상상하기도 한다. 작가는 돌로 만든 이 얼굴 작업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버지, 그 선조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말하면서도, 또 그들이 어느 시대에 살았으며 어떤 신분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긴 역사 속에 살다간 무명의 얼굴들이기 때문에 이목구비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무뎌진 대략의 형태로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분명하지 않은 재현 덕분에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은 인간이 아니라 어떤 신령스러운 이야기로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작업과정에 대한 작가의 설명에서 특이한 점은, 관람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4개의 얼굴과 투구부분 모두에 속을 파낸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빈 공간에 역사 속의 무명인들이 하고 싶었을 이야기들을 담아 기원하고 싶었다고 한다. 속이 비어있는 돌조각 속에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는 작가의 설명은 신비로움에 관한 설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희욱_멍청한_대리석, 자연석_20×20×12cm_2007

4개의 돌조각이 있는 전시실 입구 바로 옆, 전시실의 바깥 거리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 유리방에는 검은색 돌로 깎아서 만든 투구 쓴 얼굴 조각 1점이 있다. 작가에 의하면, 얼굴 부분과 투구 부분에 강한 터치를 주어 거칠고 강인한 느낌을 강조한 이 조각은 이 땅 위에 살다간 전사들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얼굴 조각에 눈과 입으로 표현한 구멍의 틈 사이로 얼굴과 투구 부분의 내부에 비어있는 공간이 엿보이면서 시간을 초월한 신화적 인물의 영혼 혹은 그 호흡의 생명력이 내 뿜어지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조각의 외형은 옛날 전사의 얼굴 이지만, 그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공기를 넣었다는 작가의 설명은 단순한 조형 혹은 재현과는 다른 독자적인 작가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 유리방과 전시실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묵직하고도 진한 어떤 감수성은 예술과 삶의 일치를 통해 생명이나 존재의 본질을 묻고, 돌과 깊이 교감하며 친밀감을 나누었던 작가적 신체 행위의 몰입 경험에 관한 향기와 파동이라고 할 수 있다. ● 전시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벽체의 일부를 철거한 방안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103×43×162cm크기의 석조두상과 큰 돌덩어리 위에 놓인 작은 두상을 만날 수 있다. 고흥석으로 만든 이 석조두상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을 포함해서 동 시대를 살아왔고 또 함께 살아갈 사람들의 얼굴, 그 상호 호흡과 영혼을 마주한 표현이라고 한다. 아마도 어지럽게 급변하는 요즘 시대의 세상사처럼 이리저리 구르고 흐른 보통 인물들의 상징일 것이다. 철저하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작가의 조각 방식은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상에 구멍을 뚫는 과정과 작품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돌이 아닌 공기로 채워 넣은 것이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먼저, 돌의 내부를 모두 파내고 다시 접합하여 눈과 입 등 두상의 전면부에 구멍을 내는데, 이 공간의 구멍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호흡하고 있는 바깥공기와 작품 속 공기의 일치된 흐름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흐름을 통하여 석조두상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시선과 석조두상 자체가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공유하여 함께 호흡하는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염원이 되기도 하고 이 시대 이전의 인류가 함께 호흡한 공기의 흐름을 서로 만나는 장치이며, 이러한 만남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사유와 정보까지 공유하고 연결시켜주는 구심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물어가거나 속절없이 사라지는 무명의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아름다움의 시선과 유의미한 호흡을 나누려는, 효용성과 속도에 가치를 두는 이 시대와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원하는 바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원초적인 힘 혹은 생명력이 서로 연결되어 느껴지는 작가의 설계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정희욱_무제_알루미늄, 흑연_30×15×12cm_2017

다음 전시실에는 바닥에 일렬로 무리지어 있는 얼굴 조각상들이 있다. 조각전시에서 흔히 사용하는 좌대 위에 올려놓지 않고, 의도적으로 바닥에 그대로 설치한 것이다. 입구 가까운 좌측에 위치한 1994년 제작 47x76x16cm크기의 분홍화강석 조각부터 2007년의 20x12x20cm크기 대리석과 자연석 조각, 2017년의 15x30x12cm크기 알루미늄과 흑연 조각, 2016년의 49x34x24cm크기 상주석 조각, 2007년의 50x31x26cm크기 절편석 조각, 2013년의 32x53x27cm크기 대리석 조각, 2010년의 48x30x23cm크기 절편석 조각까지 재질과 색상, 기법이 다양한 7점을 연이어 설치한 이 작업은 지나간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얼굴과 우리 시대의 얼굴들을 한 공간에 설치하여 그들과 우리를 수평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관람자들을 비추는 거울처럼, 실눈을 뜨고 멍청한 얼굴을 한 여기 얼굴 조각상들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에는 절편석으로 만든 자소상이 있는데, 작품의 재료인 절편석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던 마제석검磨製石劍의 재료이다. 오래 전에 사용했던 재료를 사용한 것은 거꾸로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처럼, 작가가 자신의 얼굴을 표현하면서 멍한 눈과 입의 표정으로 어쩌면 시대를 거스르는 재료라고 할 수 있는 돌을 다루는 작가로서의 고민과 시대를 살아낼 해법을 묻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작가의 이번 전시설계에서, 비어있는 돌조각의 내부와 호흡, 투박하고 파편적이며 미완성인 듯한 얼굴 조각상들은 그가 간절히 원하거나 찾으려던 것으로서 '기원祈願'을 떠올리게 한다. '기원'은 신神을 흠모하는 인간이 전하는 신을 향한 대화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화'이다. 작가의 기원에서 출발한 신화 중의 하나인 '정장군의 꿈'은 임진왜란의 부산진 전투에서 싸웠던 자신의 윗대 할아버지 정발 장군에 관한 신화이다. 작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본능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정장군의 꿈' 신화는 과거부터 전해져오는 우리민족의 오래된 신화적 메시지를 대변하며, 내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어떤 소리의 해석이기도하다. 지금까지도 그는 은연중에 뇌리 속으로 스며든 내부의 소리에 경청한다고 한다. 그 내부의 소리가 '거꾸로 흐르는 강'이라는 새로운 신화의 형태로 우리 앞에 선보인 것이다. 우리는 전시장에 설치된 두상들의 면모와 그들과의 호흡에서 무명의 시민용사일 수 있는 예전 장군들의 신화를 그려볼 수 있다. 1층 전시실에서 주인공처럼 보이는 큰 석조두상도 역시 어눌한 모습의 토속성을 지닌 보통 인물의 모습이다. 근엄한 힘의 상징으로서 장군이 아니라, 갈등하고, 의기소침하며, 비굴했을 수도 있는 인간으로서 삶 속의 투사인 그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신화는 어느새 우리의 신화로 바뀐다. '어느 날, 큰 산을 지나 이곳으로 돌덩어리가 휩쓸려왔어요.' 1미터 전후 크기의 이 돌덩어리들은 큰 산에서 이곳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로 흘러 이동해온 '신화'들 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대부분의 조각들이 속이 비워져 있는데, 이는 비워지고 생략된 부분의 공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원과 신화까지도 그려볼 수 있도록 허락한다. 변화를 시도하는 이 장소의 새로운 신화를 '거꾸로 흐르는 강'으로부터 기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작가의 '기원'은 새로운 신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정희욱_자소상_상주석_49×34×24cm_2016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흐르는 태도, 동양의 선禪과 원시적이며 자연적인 신화를 지향하는 작가의 태도와 교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경주 남산과 화순 운주사, 언양 반구대 암각화, 태안 마애 삼존불, 팔공산 갓바위 등에서 우리는 과거 우리 선조들의 미술이 주변 환경과 절묘하게 호흡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환경과 호흡하는 미술은 인간의 생존을 기원해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곳,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에서 우리는 도시재생의 환경 속에 놓인 미술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 이 도시가 우리 삶의 환경이라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인간 생존을 위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수평과 수직, 인공, 규칙과 정돈됨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환경에서 인간 생명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줄 수 있는 미술의 공공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희욱이 제안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로서 공공미술은 새로운 환경으로서의 신화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신화는 '자연으로써 치유'라는 독자성을 내재하고 있다. 자연스러움과 자연自然, 작가 정희욱의 작업에서 자연은 언제나 제 스스로의 그러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아마도 자연물을 포함한 자연은 생명에너지를 내재한 듯싶다. 덜 다듬어진 듯이 보이는 그의 조각들은 인류 문명의 역사가 각인된 자연의 어느 야산에서 방금 굴러 내려온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기 쉽기에, 그 속에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 조상대대로 전해준 생명의 에너지가 담겨져 있고, 우리 인간의 기원들이 호흡처럼 함께 스며져 있기도 하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연의 돌은 무생물이 아니라 치유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변화와 성장의 생명체이며, 자신이 감지한 자연의 생명력 혹은 치유의 힘을 드러내는 신화이다. 정희욱의 '거꾸로 흐르는 강'에서 자연과 그 치유의 성장 에너지는 이곳의 공공을 위한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지난 시대의 삶을 기억하고 창조적으로 공유하려는 이 전시는 우리 자신의 내재적인 반성과 성찰을 근간으로 스스로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기대를 상정하고 있다. ■ 정종구

정희욱_자소상_절편석_50×31×26cm_2007

얼굴, 영혼을 위한 건축을 짓다 ● 회화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조각에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함께 서양 고전주의 미술의 쌍벽을 이룬다. 유명세로 치자면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해당하는 것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피에타의 말뜻처럼 큰 슬픔을 자아내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조각이다. 여기에 피에타가 있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론다니니의 피에타.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살과 피가 통하는 마치 살아있는 생생함으로 미켈란젤로의 최전성기를 대표한다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조각가의 말년을 대변한다. 세인의 찬사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에 맞춰져 있는 내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완성조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각에서 보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각별하다. 마치 조각가가 후대 사람들을 위해 어떤 특별한 의미라도 예비해놓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게 뭔가. 주지하다시피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해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그리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합체된 주의다. 감각적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다. 이데아를 상기시키지 못한다면 감각적 현실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담 한갓 돌조각으로 이데아를 어떻게 상기시킬 것인가. 이데아가 뭔가. 신이다. 형상이다. 에이도스다. 신은 이미 돌덩어리 속에 완전한 형상을 예비해놓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감각적 현실을 넘어선다. 심지어는 살과 피가 통하는 마치 살아있는 생생함마저도. 그렇게 조각가가 말년에 제작한, 어쩜 제작하다 만 듯한 미완성 조각들이 있다. 그 조각들은 말 그대로 미완성일 수도, 그리고 단순한 감각적 현실 너머의 결정적인 무엇(이데아? 에이도스? 형상? 신? 생명 자체? 호흡? 숨결?)을 예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미완의 조각들이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해 현저하게 모던하게 보인다는 점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력한 영적 환기력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점이고, 이로써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와 개념을 재정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정희욱_무제_대리석_53×32×27cm_2013

여기에 얼굴들이 있다. 정희욱이 돌로 조각한 얼굴들이고, 돌에 아로새긴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미완 같다. 바닥에 반듯하게 서 있거나 모로 누운 얼굴들이 깨다 만 것 같고, 쪼다 만 것 같고, 갈다 만 것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어색하지도 어눌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미완 같기도 하고, 미완 때문에 오히려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미완 자체로서 이미 완성 같기도 하다. 이로써 미완인 채로 완성의 개념과 감각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지점을 작가는 감각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 강력한 영적 환기력으로 사람들을 파고드는 지점 말이다. 결국 조형이란 감각적 실재와 암시 사이의 줄다리기라고 생각한다. 얼마만큼 감각적 실재에 내어줄 것이며, 또한 얼마만큼 숨길 것인가. 아마도 충분히 감각적이기만 하다면, 그 숨긴 부분을 암시가 성공적으로 보충해줄 것이다. 다시, 충분히 감각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감각적 실재에 내어준 부분이 적을수록 꼭 그만큼 암시가 강조되고 영적 환기력이 강화된다. ● 작가가 조각한 얼굴들은 그렇게 영적이다. 풍부한 암시가 영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가늘게 뜬 실눈과 앞으로 쑥 내민 입술이, 기름하고 펑퍼짐한 얼굴이 작가를 닮은 것도 같고, 부처를 닮은 것도 같고, 흔한 선남선녀들의 초상을 닮은 것도 같다. 이로써 작가는 얼굴의 원형이며 원형적 얼굴을 겨냥한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싶다(작가의 말)는 것이 그렇다. 이런 원형적 얼굴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감정이입하게 만들고 공감하게 만든다. 개별성으로 하여금 일반성을 담보하게 만들고, 특수성으로 하여금 보편성을 획득하게 만든다. 결국 예술이란 주관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재차 객관을 주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관과 객관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게오르그 루카치).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매개로 보통사람들의 얼굴을 만든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으로 하여금 보통사람들의 얼굴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은 그저 감각적 닮은꼴이라기보다는 영혼을 표현한 영적 환기력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영적 환기력을 위해선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는 암시가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조형을 매개로 미처 조형되지 않은 부분(이를테면 영혼 같은)을 상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옮기자면 생략화법일 수 있다. 그렇다. 작가의 조각이 얼핏 미완성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을 알고 보면 암시였고 생략이었다. 암시와 생략이 영적 환기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의외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적지 않은 부처의 얼굴들이 그렇고, 대략적인 형태만 부여하다 만 것 같은 동자승이나 석상들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영적 환기력으로 치자면 가부키와 같은 가면들이 그렇고 특히 주술가면이 그렇다. 가면은 이중적이다. 일차적으로 가면은 본심을 숨기고 있는 가식적인 얼굴을 의미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학적으로 유의미한 경우로 치자면 사람의 내면을 꽤 뚫는 영적 투시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대개 이런 주술가면들에는 눈과 입이 뚫려있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바로 생기가 드나드는 관문이며 호흡과 숨결이 들락거리는 통로다. 작가의 조각이 그런데, 조각의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무슨 뇌수술이라도 하듯 돌덩어리를 절개하고 그 속을 파낸다. 그리고 그렇게 파낸 조각을 덮개석으로 덮어서 가린다. 그렇게 겉보기에 감쪽같지만, 사실 잘 보면 작가의 조각은 속이 비어있고, 여기에 눈과 입이 뚫려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미처 보이지도 않는 부분에까지 왜 이렇게 섬세하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가. 사실 작가에게 정작 중요한 부분으로 치자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생략된 부분이고, 암시가 보충해주는 부분이다. 바로 영혼과 생기, 호흡과 숨결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혼과 생기를 위한 집을 지어주는 것이며, 호흡과 숨결이 머무는 처소를 건축하는 일이다. 이로써 어쩜 얼굴의 원래 뜻 그대로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얼굴은 얼의 형태, 얼의 꼴, 얼의 집, 얼의 건축을 의미한다. 그렇게 얼굴에서 결정적인 것은 얼이고 영혼이다. 작가의 얼굴조각은 바로 그렇듯 얼의 건축을 짓는 일이다.

정희욱_무제(자소상)_절편석_48×30×23cm_2007

현대조각의 특수성으로 치자면 구멍과 함께 좌대가 사라진 일을 들 수가 있다. 조각에 구멍을 내 이쪽과 저쪽의 공간이 하나로 통하게 한 것이며(특히 헨리 무어에 의해 촉발된), 좌대를 생략한 채 조각을 그대로 바닥에 전시한 것이다(특히 미니멀리즘에서 보편화된). 작가의 조각 역시 그런데, 아예 좌대가 없거나 조각과 굳이 구별되지가 않는, 혹은 그 자체가 조각의 일부인가도 싶은 돌덩어리로 대신한다. 좌대도 돌덩어리 같고(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채석장에서 그대로 실어온 것 같은) 조각도 돌덩어리 같다. 그렇담 이처럼 바닥으로 내려온 조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조각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조각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담보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좌대는 전통적인 화이트큐브가 그런 것처럼 작품과 현실을 구별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서 발명된 것이다. 현실은 현실이고 작품은 작품이라는 논리다. 그러므로 바닥으로 내려온 조각이란 곧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박차고 현실에 편입된 조각, 현실의 일부로서의 조각, 현실을 사는 조각, 굳이 현실과 구별되지는 않는 조각의 실천이며 실현을 의미한다. 화이트큐브보다는 대안공간에 어울리는 경우라고 생각하고, 생활공간을 개조한, 그러므로 장소특정성이 강한 공간 환경에 부합하는 경우라고 생각하고, 이로써 현실성을 담보하고 확장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 작가의 집 앞에 흐르는 강 이름이 회야(回野)다. 들을 거슬러 흐르는 강이며 거꾸로 흐르는 강이다. 누구든 흐르는 강을 보면 어김없이 회상에 빠지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시적이고 철학적인 명명이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흐른다는 것, 그것은 원형을 찾아 나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로를 의미한다. 삶이 여로다. 정처 없는 길을 나서는 것이고, 진아(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 강을 보면서 작가는 이 시대에 돌을 다루는 작업은 거꾸로 흐르는 강처럼 미련하거나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 꼭 자신 같다고 생각한다. 때론 미련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 속에 진리를 보석처럼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 고충환

Vol.20181031j | 정희욱展 / JEONGHUIUK / 鄭熙旭 / sculpture

2025/01/01-03/30